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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화 〉2막 (上) 어린 애라고 안 봐준다고 - 4 (22/111)



〈 22화 〉2막 (上) 어린 애라고 안 봐준다고 - 4

그렇게 말하는 재클린의 밝은 미소를 깨트리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코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올라갈 필요는 없어. 동생. 2층에서 내리자.”
“응? 하지만 거기는 남성복 쪽인데, 오빠?”
“바로 그거지.”

코넬리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남자애들 옷을 입을 거야!”
“오빠, 지금 비겁하게 도망치시려는 거 아니지?”

일단 2층에서 내린 둘은, 주위에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복도 끝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진땀을 흘리는 건 재클린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남자애 옷을 입겠다니, 세상에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오빠가 고작 여자애  하나 입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약했었어?”
“그건 아니지. 어차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여자애’가 입는 옷이잖아?”
“읏, 그, 그건 그렇지만….”

여성용 의학국 제복을 입고 있는 자신에게 붙일 만한 주장은 아니다. 아무리 관대하게 넘어가려고 해도, 좀 부자연스러운 억지가 느껴지는 도발이었다.

‘후후. 오늘은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진 않을 거라고.’

평탄한 가슴을 자신 있게 펴면서, 코넬리아는 말했다.

“어딜 보아도 이차 성징이 이뤄지지 않은 이 미성숙한 몸을 봐. 그냥 남자애 옷을 입는게 무난해서 좋잖아.”

아무리 반바지를 입고 있다고 해도, 허리 아래로 뭔가 얽매이지 않은 천이 나풀거리는 느낌은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네가 나한테 이색적인 옷을 입히고 싶은 건 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아니야. 무난한 게 최고인 오빠에게 제일 무난한 건, 여자애들이 입는 옷이야. 오빠에게 딱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히려는 내 개인적인 흑심과는 별개로!”
“이젠 숨기지도 않고 아주 자신 있게 말하는구만…!”

거꾸로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면 그냥 넘어가 줘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에잇, 여기까지 와서 또 이러기냐!’

코넬리아는 자그마한 손으로 자신의 토실토실한 뺨을 팡팡 두들겼다. 뒤이은 재클린의 말은  헛된 저항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오빠는 자신의 외양에 좀 더 자부심을 가져도 돼♪”
“필요 없어 그런 자부심….”
“그렇지만 난 오빠가 자랑스러워.”

재클린은 뒤로 물러서려는 코넬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오빠를 자랑스러워 하는 만큼, 오빠도 지금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코넬리아를 올곧게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함의 힘이 담겨 있었다.

정말로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생각해 보면 재클린은 용케도 지금까지 코넬리아의 몸이  자신에게 꼬박꼬박 ‘오빠’라고 불렀다. 단지 아르샤에서부터 지금까지 뿐만이 아니었다.

수도에서 재활 훈련을 하는 동안, 속에 담겨 있는 ‘렉스’를 지탱해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여동생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손 놓아 줘.”

괜스레 쌀쌀맞은 양 굴던 코넬리아는, 재클린의 기대 대로  층 더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싱글벙글하는 재클린에게 말을 이었다.

“그래. 여자애 옷도 살게. 네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옷 갈아 입히는 인형 노릇, 기꺼이  주겠다고.”
“자학하는 건 좋지 못한 버릇이야. 오빠. 괜한 인형 노릇이 아니라 진짜 인형처럼 예쁘거든!”
“징그러우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부탁할게.”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무튼. 여자애 옷을 사고 나서는 남자애 옷도 사야 해.”

올라가는 계단에서 내린 코넬리아의 말은, 조금 전과는 달라진 뉘앙스였다. 재클린로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신분을 감추려는 변장…의 목적은 아닌 거 같네?”

3층 플로어에는 오가는 손님들이  있었기에 특별히 자신들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괜스레 옷가게 직원이 손님인 자신들에게 신경을 써서 접근할 수도 있었다.

조금 전처럼 약간 외진 곳으로 이동한 재클린은 목소리의 크기를 줄였다.

“의원인 걸 숨기려는 거라면 굳이 여자라는 것까지 감출 필요는 없잖아. 레드우드 시에서 꼭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보험 같은 거야.”

원래 코넬리아는, 수도 앨버스에서 출발하기 전에 대략적인 계획은 세웠었다. 그 계획에서 자신들이 레드우드를 방문했을 때 백화점에 들르는 건, 시에 와서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뒤쪽 순위로 두었다.

그 당시에 계획을 짰을 때는 합리적인 순서였다.

아르샤 시에서 계획이 적지 않게 헝클어진  상태에서는 더는 합리적이지 않았지만.

“우리가 들려야 할 기계 공방(工房) 쪽 말이야. 예전에 ‘여자는 못 들어가는 공간’이었거든. 요즘에는 그런 분위기는 사라지긴 했지만 거부감은 여전히 있고.”

관습이라는 건 하루 아침에 없앨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뭐, 여차하면 경의사 직책과 본분을 내세워서 억지로라도 들어갈 수는 있긴 해. 하지만….”
“응. 응응.”

코넬리아의 말이 흥미로운지, 재클린은 소녀가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원래는 이쪽 도시에 오자마자 협회 지부에 들러서, 직무용 가운을 빌려 입고 곧장 쳐들어갈 생각이었거든.”
“그 생각이 바뀌었다는 거지?”
“그런 거지.”

아르샤에서 자기 뜻대로 일을 밀어붙였다가 그 사달이 났다.

원래 생각을 했던 것보다 위생국에서 의뢰를 받았던 조사 업무에 너무 깊숙이 관여하였고, 정작 경의사로서 진행해야 할 직분(職分)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되었다.

“오빠의 말을 듣다 보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나는 남장  해도 되는 거야?”
“앗.”

솔직히 말을 하자면. 재클린은 공방의 금기가 해당하는 여자아이로 보이진 않는다. 원래부터 짧은 비대칭 단발인데다가, 시원하게 뻗은 체격에 알맞게 기장을 맞춘 슈츠를 입으면, 필시 대도시에서  멋진 신사라고 생각되리라.

‘흉부 쪽만 어찌어찌 숨길 수 있다면 말이지.’

거기까지는 말을 안 했고, 그건 아마 재클린이라고 해도 인정하고 납득을  부분이지만, 지금 동생이 짚은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미안하다. 동생. 내가 좀, 그, 무례한 생각을 했군.”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코넬리아를, 재클린은 가볍게 품에 끌어안았다.

“약간 서운했지만 괜찮아, 오빠. 용서할게.”
“동생….”

아,  얼마나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아이인가! 그렇게 감탄을 하는 코넬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클린이 말했다.

“서운한  톡톡히 갚을 거야.”

재클린의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함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코넬리아를 번쩍 들었다.

“도, 동생? 내려주지 않겠니?”

이미 코넬리아의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곧장 걸음을 옮기는 재클린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혼잣말이 흘러 나왔다.

“일단은 외출복부터 시작할 거야. 사교 모임에 참석해야 할 이브닝드레스도 물론 입혀볼 거고, 잠옷이랑 수면용 캡도 이 기회에 직접 입어 보면서 골라야지. 아, 사는 건 나중에 사도 되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일단 입어 보자고!”
“동생…!”

플로어에는 코넬리아의 자그마한 절규만이 남았다.

그 뒤로는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은 시간.

먼저 산 여성복 옷은, 아르샤에서 입었던 외출복과 흡사한 것이었다. 곁붙은 장식물이 많고 색상이 좀  밝은 청색 계열로 바뀐 정도.

 뒤로도 물론, 코넬리아가 맨정신으로는 절대로 입지 않았을, 화려한 프릴이 달린 드레스를 입는 등, 재클린의 만족을 위한 인고의 시간이 지나갔다. 여성복 부분에서 쓴 시간이 9할이라면, 한 층 아래 남성복 부분에서 적당하게 대충 옷을 고른 시간은 1할 정도.

그리고 거기서 구매하자마자 입은 옷이 바로 코넬리아가 당분간 입고 다닐 복장이었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걸.”

코니는 자신의 머리에는 조금 큰 갈색 플랫캡을 꾹꾹 눌러 썼다.

몸은 여느 또래의 소년들이 입는 활동복이 감싸고 있었다. 펠트 재질의 회갈색 재킷 아래로는 하얀 셔츠. 거기에 멜빵으로 고정된 짧은 반바지, 그리고  없는 로퍼 구두 차림이다.

골목 어느 구석에도 한두 명씩 모여 있는, 도시 남자애들의 복장.

“으~음—… 역시 모자가 큰가?”

살짝 아쉬운 기색을 보이는 재클린이었지만, 플랫캡은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라는 건 재클린 또한 알고 있었다. 기다란 코넬리아의 머리를 바짝 끌어올려서 모자 속으로 숨기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아냐, 아냐. 이 정도가 딱 좋아.”

동생과는 대조적으로 코넬리아는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의 수치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랜만에, 그래도 자기가 어렸을 때 입었던 옷을 입는 만족감이 코넬리아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혼자서 옷을 골랐다가는 큰일 날 뻔했어. 고마워, 동생.”
“에헤헤, 별말씀을.”

재클린은 쑥스럽게 웃었다. 코넬리아가 어렴풋하게 손짓 발짓으로 설명하던 소년 복장을 그대로 재현한 건 오로지 재클린 덕택이었다.

“이제 오빠가 사고 싶은 거 살까? 옷 말고도 살 거 있다면서.”
“오. 기억력 좋네.”

그렇게 말하고 코넬리아가 간 곳은 백화점의 로비층보다도 낮은, 지하 일 층. 거기에는 서점이 있었다.

코넬리아가 향한 곳은 의학 관련 도서와 잡지가 모여 있는 섹션이었다. 거기를 뒤적거리며 소녀는 말했다.

“레드우드의 ‘지역 약전’을 보고 싶었거든. 아, 여깄다.”

먼지로 뒤덮인  무더기의 잡지들 사이에서도, 코넬리아는 용케도 원하는 것을 찾아내었다. 후후 입으로 바람을 분 소녀는 그걸 재클린에게 번쩍 들어 펼쳐 보였다.

“어때. 봐 봐, 한눈에 봐도 여기 약전은 앨버스  약전이랑 다르지?”

본디 약전(藥典)이란 건, 제각기 다른 곳에서 일하는 수많은 의원과 약방에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을 할 때, 행여나 약재료와 제법을 헷갈리지 않도록 정한 목록이다.

그중에서도 정부 주도로 제작되는 『국가 약전』은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최소한으로 수정이 되고, 새로운 제법이나 넣고 빠져야 할 약재 변경 주기가 너무할 정도로 길었다.

그렇기에  지역마다 자신의 지역에 맞는 약전을 따로 발행하는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가령 지금 코넬리아가 찾은 레드우드 시의 지역 약전(地域藥典, city pharmacopoeia)은 국가 약전을 바탕으로 하되, 이 지역에서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북부 지역의 한대 산림 허브나 각종 동물성 약재는 통째로 빠져 있다.

그 대신에 강조된 섹션이 하나 있으니, 바로 「광물성 약재」다.

왕국 남부에서도 험준한 산맥 속에 위치한 레드우드는 질 좋은 석탄은 물론이거니와 철광석은 기본이요, 지층을 그리는 암반에서 각종 희귀 금속이 풍부한 광산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자연스럽게 주위 환경에서 흔히 구할  있는 물질이  지역에서 약으로 쓰이기 마련이고.

그 현실이 반영된 레드우드 시의 지역 약전은, 앨버스에서는 부록 쪽으로나 몰아놓았을 각종 희귀한 광물과 듣도 보도 못한 신물질이 「광물성 약재」 섹션에 잔뜩 적혀 있었다.

“응. 귀여워…♬”

재클린이 그걸 보면서 뜨거운 숨을 토해내듯 말한 감탄사는, 분명히 약전을 향한 거겠지. 대체 약전 어느 구석이 귀여운 건지는 모르겠군.

그렇게 코넬리아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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