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화 〉2막 (上) 어린 애라고 안 봐준다고 - 2 (20/111)



〈 20화 〉2막 (上) 어린 애라고 안 봐준다고 - 2

회중시계 시침이 12를 가리킬 무렵, 기차는 천천히 그 속도를 늦추었다. 여태 세상 모르게 꿈나라에 빠져 있던 재클린이 희한하게도 눈을 떴다.

“으응…? 벌써 도착이야?”
“벌써는 무슨.  두시 다 되었거든. 짐 챙겨.”
“우웅—…. 짐은 챙겨야지, 응….”

눈은 반  감긴 채 재클린은 용하게도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서 자신의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곧이어 열차는 움직임을 멈추었고, 4인용 객실에서 나온 코넬리아와 재클린은 다른 승객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코넬리아의 짐은 두 개, 왕진 가방과 옷가방. 재클린은 어깨에 메는 자그마한 가방 하나였다.


레드우드 중앙역의 플랫폼은 확실히 아르샤 시와는 다른 활기찬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타고 내리는 손님이 많은  둘째 치거니와, 온갖 광고 선전지를 돌리는 사람들부터 잔뜩 있었다.


“오빠, 짐 무겁지? 들어줄게!”

어느샌가 한 무더기의 전단을 받은 재클린이 손을 내밀었지만.


“운동하려고 드는 거야.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고개를 저은 코넬리아는 낑낑대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작 수 걸음을 걸었을까.


“대신 내 거랑 가방 바꿔서 들자, 오빠!”

재클린은 코넬리아의 옷가방을 뺏어 들고는, 자신의 가방을 코넬리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 새로운 괴롭힘인가.’

어릴 때 갈구었던 업보를 갚으라는 건가. 복잡한 마음으로 코넬리아는 재클린의 가방을 들었다. 단단히 각오하고 쥐어 든  가방은.


“어라. 네 옷가방은 왜 이렇게 가벼워?”

분명히 코넬리아 자신보다도 체면적이나 부피가 큰 이상, 재클린의 옷이 자기 옷보다 작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옷가방의 무게는 거의 절반에 가까웠다.


“꼭 필요한 옷만 넣었거든♪”
“꼭 필요한 옷.”


코넬리아는 재클린의 말을 되뇌었다.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흉내를 내야 할 때 입는 옷. 그리고 속옷 몇 개가 전부야!”


그렇게 말하며 재클린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진청색  테일러드 드레스가, 회전하며 일렁이는 바람을 따라 꽃봉오리처럼 살짝 떠올랐다.


“나머지는 지금 입고 있는 옷. 어때?”
“어떠냐니… 음, 어울리네.”
“그치?”

지금 재클린이 입은 드레스는 언제든지 걷고 뛸 수 있도록 활동하기 좋도록 디자인이 된, 일반 계층의 숙녀들이 폭넓게 즐겨 입는 옷이었다.

실제 생활에 유용할뿐더러. 알게 모르게 ‘변장’의 의미도 있었다.


만약 귀족들이 으레 입는, 호화로운 문양이 수놓아진 채 바짝 코르셋의 끈을 조여야만 입을 수 있는 크리놀린 드레스를 입었다면, 수백 미터 밖에서도 보일 만큼 ‘저기에 수상쩍은 귀족 여자가 있다!’란 존재감이 나타나질 것이었다.

재클린이 입고 있는 치마는 누군가가 무의식중이라도 눈여겨볼 일이 없을 정도로 무난한 갈래에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 오빠, 뭔가 수상해… 지금 일부러 나랑 말하는 거 피하는 거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럴 때만 쓸데없이 감이 좋다.

플랫폼에서 빠져나와 역사 건물로 들어간 재클린이 지—긋이 코넬리아의 눈을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느낌을 풍기는 소녀를 보면서 고민하던 재클린은 비로소 원인을 알아차렸다.


“오빠 옷가방… 여기에 뭐가 있는 거야?”

재클린의 지적은 정답이었다.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는 코넬리아의 모습이 훤하게 보인다.

“옷가방이잖아. 그야 당연히, 옷이 있지.”
“무슨 옷이 들었길래 가방이 조금 묵직한 거지. 수상해….”


코넬리아가 온몸을 비틀면서 간신히 들었던 옷가방을 ‘조금 묵직하다’고 표현하고.

그렇게 말한 재클린은, 성큼성큼 역사 대합실의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그 다음 코넬리아가 말릴 틈도 없이 옷가방을 열어젖혔다.


“…언제부터 이런 마음의 양식을 입고 다녔어?”

가방 안에는 책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작은 문고본 하나 자체로는 그다지 무게가 실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 권이 두 권으로 되고, 두 권이 네 권으로 불어난다. 체감될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질 때는 이미 수습할  없다.

“어, 어쩔 수 없잖아. 이게 없으면 안 된다고.”
“뭐가  돼. 이거 그냥 추리 소설책이잖아!”
“열차에서 심심하면 봐야 한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 코넬리아의 목소리에도 영 자신감이 실려 있지 않았다.


코넬리아가 여태 다른 사람 앞에서 기운차게 말하였던 건, 그 말을 본인 스스로,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자신이 이렇게 기운 없이 말을 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앨버스에서 떠나기 전 소녀는 이미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는 양의 책을 샀었다. 그리고 사실 아르샤 시를 떠날 때도 동생과 허셜의 눈을 피해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골랐었다.


그걸 어떻게 다 읽을지는 미래의 자신에게 모든 고민을 떠넘긴 채.

“끄응…. 오빠, 이 중에서  본 건 여기 두고 가자.”

재클린은 대합실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쓸모없는 무게는 최대한 줄이는  여행의 요령이잖아. 이거랑 이거, 1권은 다 봤겠지?”

기차에서 내리면서 다 본 책이나 잡지나 일간지 따위를 꽂아두고 가게 만든 책장. 사람의 선의를 바탕으로 돌아가는 만큼 도서가 일정하지 않다. 그래도 여기에 둔 책을 누군가가 집어 들고 가서 읽는 건 확실했다.


“다 본 거 없어. 그러니까, 두고 갈 거 없어.”

이런 재클린의 선의가 무색하게, 코넬리아는 고집을 피웠다.


“다 가지고  거야. 명령이야! 이건 오빠의 명령이다!”
“중요한 명령을 이럴 때 가볍게 쓰면 어떡해….”


재클린은 화도 짜증도 나지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 또한 어렴풋하게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렇다. 코넬리아는, 함정에 빠져 있었다.

철도가 놓이고 증기기관차가 달리기 시작한 건  예전부터 있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민간 자본이 투입된 선로가 왕국 곳곳에 깔린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과거에 ‘여행’이라면 대개는 신의 가호와 은총을 위하여 나서는 성지순례(聖地巡禮)였다. 성지순례의 길은 홀로 나서는 게 아닌, 모두가 함께하는 길. 역사 속에 이름을 새긴 성인(聖人)과 신의 흔적을 좇아서 걷고  걸으며, 자신의 보폭에 맞추어 풍경을 눈에 담았다.


거기서 조금 더 발전하여서 아예 마차 전체를 빌려서 이동하는 마차 여행이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적게는 두세 명에서 많게는 십 수 명의 하인을 데리고 다니는 초호화 여행이, 물론, 일반 계층에서 유행할 리가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 시작된 건, 철도가 사방팔방으로 깔리고, 탑승 비용이 현실적인 수준으로 맞추어진, 아주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일이었다.


즉, 지금 코넬리아와 재클린의 여행은, 최신 유행 중에서도 최첨단을 달리는 여행이었다!


“세상에, 오빠가 「열차 여행」의 함정에 걸리다니….”


이걸 다르게 설명하면, 여태까지  누구도 철도 여행처럼 ‘따분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알아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여정을 밟은 적이 없었다.

“다음번에는 진짜로 심심하면 읽을 거라고. 진짜, 지인짜.”

 부작용의 교과서적인 예시가 바로 지금 코넬리아였다. 주섬주섬 책을 챙겨서 옷가방에 꾹꾹 쑤셔 넣는, 이런 케이스가 비단 코넬리아만 겪는 일은 아니었다.

혼자만의 시간에  해야 할지 방황하는 사람들이 자주 저지르곤 하는 실수였다.


“하아~…. 책만 빼면 이거보다 훨씬 가벼울 텐데. 오빠도 참.”


그렇게 말하면서 재클린은 가방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가방 속을 훑어보다가.

“아. 그렇지, 오빠..”


둘둘 말아진 망토를 보면서 재클린이 말했다.


“여기서 그 제복은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그래?”


지금 코넬리아가 입고 있는 의학국 제복은 하얀 블레이저와 흑색 세퍼릿 재킷의 상의, 짙은 푸른빛이 들어간 검은 톤의 스커트와 그 아래 짧은 반바지를 포함한 하의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지역의 사람이 섞이는 열차와 기차역 안에서는 아직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음~ 아르샤에서는 군중 속에 묻히는 효과가 있었지만… 여기 레드우드에선  기대를  하겠지.”


원래 이럴 때를 대비하여서,  두세 살 소녀 또래에 어울리는 무난한 외출복도 하나 마련하긴 했었다.

기껏 꾸며서 입었던  외출복은, 어제 소동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적당하게 양장점(洋裝店)이라도 들리자. 여기서 안 튀는 외출복부터 하나 사야겠네.”
“그보다 좋은 생각이 있어.”


재클린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입으로 “짜짠~♬”하는 효과음을 내면서, 아마도 소매 속에 감추고 있었을 전단지를 꺼냈다.

“백화점! 백화점에 가보는 게 어때?”
“백화저엄?”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 주목을 받는 건 싫었다. 그것보다 코넬리아가 보기엔, 지금 재클린이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백화점에 데리러 가는지 뻔했다.

수도에서 벗어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를  참아서 또 하려는 것이다.

자기 취향대로 오빠  갈아입히려는 몹쓸 취미를!

 속이 훤하게 보였기에 일단 반대부터 하려고 했던 코넬리아는. 잠시간 재클린이 내민 전단지를 물끄러미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좋아. 가볼까?”


전단지를 반듯하게 접으면서 말했다.

“옷 말고 사고 싶은 게 하나 더 있거든. 그게—”

모처럼 기분 좋게 말을 이어가는 코넬리아의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기차 매표소 앞, 어린 꼬마애 하나가 자지러드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이제  네다섯 살은 되었을까. 남자애의 양옆에서 팔을 잡고 그네처럼 흔들고 있던 부모가 당황스럽게 아이를 끌어안고 토닥거렸지만 아이는 팔꿈치를 잡고 울음을 그칠 기색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던 코넬리아보다 재클린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잠시만요~”


최대한 온화한 얼굴로, 재클린이 불쑥 부모 앞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몸을 숙여도 여전히 재클린의 시선이 높았다.

“누, 누굽니까?”
“의원입니다. 잠시만 자녀분을 좀 봐도 될까요?”

만약 부모가 거부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클린은 아이가 비명을 꽥꽥 지르면서 붙잡고 있는 팔을 먼저 확인했다.

“오른팔.”


아픈 부위를 확인하고, 재클린은 자신의 왼손으로 아이의 팔꿈치와 요골(橈骨, 아래팔에서 엄지손가락 측면의 기다란 뼈) 이 연결된 쪽을 감싸듯이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소년의 손을 악수하듯 가볍게 맞잡고, 좌우로 살짝 돌리면서 흔들었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

“천천히~ 그대로 손을 가슴에 올리세요♪”


아픔이 사라졌다고 팔을 멋대로 흔들지 못하도록, 재클린은 아이가 팔을 접어서 왼쪽 가슴 위에 올리게 시켰다.


“이 아이의 어머니 되시죠? 이대로 별로  아프면 다행이고, 보름 정도는 지켜보시면서 아프면 동네 진료소에 가보시면 돼요♬”
“아휴, 감사합니다! 의원 선생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치료비는 30링 입니다. 어머님.”

이 말은 재클린이 한 말이 아니었다.


엄격하고 근엄이 넘치며 진지함을 잃지 않는 삼위일체를 띤 얼굴로, 의학국 제복을 입은 소녀—코넬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