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1막 (中) 네가 잘못 되면 나는 어떡하라고 - 04
거추장스러운 재킷과 옷은 벗었다. 흰 블라우스 차림으로 푹신한 깃털 베개를 끌어안으며 코넬리아가 물었다.
“지금 시청에서 바로 오는 길이잖아, 너. 뭐어 나도 네가 실수할 거라고는 나도 생각하지는 않는—”
“우와!”
재클린이 얼굴을 들이밀자, 무의식중에 코넬리아는 몸을 뒤로 움찔, 하고 젖혔다.
“뭐, 뭐야…. 갑자기.”
“내가 시청 갔다가 온 건 어떻게 알았어 오빠? 그거 말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긴.”
코넬리아는 어이가 없는 시선으로, 재클린의 클록에 핀으로 꽂혀 있는 출입증을 가리켰다.
“그거 반납 안 한 거 보면 아직 일 끝나지도 않은 거 같네.”
“깜박했네. 헤헤.”
웃는 거로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는 건, 어렸을 때부터 재클린이 자주 쓰곤 하였던 방법이다. 그 기능의 위대함을 코넬리아가 실감하게 된 건 최근이었다.
자칫 싸해지려는 분위기의 뻑뻑한 기어에 윤활유를 치는 정도는, 다른 것보다도 일단 웃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렉스의 몸이었을 때에도 언제나 재클린의 아부 아닌 아부를 받아들였지만.
코넬리아의 몸이 된 이상, 의식하지 않으려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애가 짓는 미소는 남자에게만 먹히는 게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코넬리아는 일부러 의식적으로 표정을 감추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하였다. 무표정하게 사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단지.
이 가벼운 잔기술에 너무 의지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손해 볼 건 없다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래선지 몰라도 전엔 그대로 흘려버렸을지 모를 것들도 확실하게 짚게 되었다.
“웃는 거로 넘어가려 하지 마, 동생.”
코넬리아는 책상다리로 침대 위에 앉았다.
“일은 마저 끝난 다음에 묻기로 하고… 그것보다 첫인상은 눈에 확실하게 띄도록 했지?”
조금은 바뀐 질문. 그리고 그다지 걱정은 담겨있지 않은 질문이었다.
허셜로부터—아마도—민간으로 빠져나갈 경의사의 인상착의와, 시청에서 직접 목격된 경의사의 모습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많아야 한다. 자신과 재클린 정도면 최저한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재클린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나도 나름대로 요란하게 하려고 했는데… 시장이 경의사를 너무 의식하는 거 같더라고. 일단 아르샤 시에 경의사가 있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어.”
“그럼 기본적인 감사 서류는 준비되고 있었겠네.”
“준비는 무슨~ 찔리는 거 감추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더라고!”
“어, 그랬어?”
첫 단추부터 무언가 코넬리아가 상상했던 것과는 영 다른 식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과 의학국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지방 지역에서 경의사를 받아들이는 인식이 훨씬 부정적일 지도 모를 일이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물었다.
“소문과는 다른 경의사가 왔다, 고 시장이 생각하진 않았어?”
“웬걸. 무슨 저승사자처럼 생각하던데.”
“하하! 저승사자라고?”
웃음을 터뜨린 코넬리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데.”
“그치?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침대에 걸터앉은 재클린도 마찬가지로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해도 우선 그 자리에 있는 시청 직원들 시선은 빠짐없이 다 끌었어. 적어도 시장보다 큰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강렬한 첫인상.”
“확실해. 장담할게. 오빠.”
앉은키만으로도 이미 코넬리아를 내려다볼 정도인 재클린의 미소에는 한 점 티끌도 없었다. 마음에 구름이 낀 건 코넬리아 쪽이었다.
‘끄응… 속이 쓰리네….’
원래 몸이었을 때에도, 재클린은 자신과 키가 엇비슷한 정도였다. 이때 ‘엇비슷한 정도’라는 건, 코넬리아의 양심이 허락하는 선에서 자신에게 속일 수 있는 거짓말의 한계였다.
사실은.
코넬리아의 몸이 되기 전으로 비교를 하더라도, 키만 놓고 보면 동생에겐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었다.
렉스였을 때 재었던 키는 일 미터 팔십 센티미터 정도. 재클린의 키는, 조금 까다롭게 보아도 삼사 센티미터는 더 컸을 터.
예전에도 가끔 얼굴을 볼 때마다 서로 내 키가 크니 네 키가 크니 하는 식으로 가볍게 다투긴 했었다. 코넬리아의 몸이 되고 나서는 비교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민망할 정도였다.
“괜찮아, 오빠는 작아도 여전히 내 오빠니까.”
“아 허락 없이 보지 말라고!”
손을 가린다고 마음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그래도 무의식중에 가슴을 가리는 건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걸 보던 재클린이 입술을 혀로 핥으며 비릿하게 웃는다.
“안 봤어, 안 봤어. 오빠 얼굴에 쓰여 있는걸.”
“그 거짓말 못 믿겠는데… 진짜야?”
“응. 오빠가 아직도 힘으로 날 이기려고 하는 생각 같은 건 본 적 없어.”
“봤잖아!”
품에 안고 있던 베개를 힘껏 집어 던졌지만, 그걸 받아 쥐어서 바로 역습을 하는 재클린의 완력은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다. 완전히 제압당한 채 바둥거리는 코넬리아의 얼굴이 금세 땀으로 젖었다.
살짝 장난기가 올랐던 재클린은, 얼굴이 빨개진 채 금방 지쳐버린 코넬리아의 힘든 기색에 힘을 풀었다.
“환자를 괴롭히면 안 되니까 내가 봐 줘야지. 어쩔 수 없네~”
“너 진짜… 나중에 컨디션 좋을 때 정정당당하게 한 판 붙자고….”
헥헥 거리는 코넬리아는 다 흐트러졌던 상의를 추슬렀다. 재클린도 약간 헝클어진 앞머리칼을 왼쪽으로 쓸어 넘겼다.
“그건 그렇지. 지금 오빠랑 싸울 때는 아니지.”
“달리 싸울 상대가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거.”
“응, 오빠가 좀 전에 한 말이 맞아. 시장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확실해. 그건 좀 이따가 물으러 갈 거고, 아차.”
클록 안을 주섬주섬 뒤지던 재클린은, 코넬리아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수첩.
“이게 뭐야?”
“볼드 시장 거야. 아까 인사할 때 슬쩍~”
“다른 사람 거는, 함부로 훔치지 말라고 했을 건데.”
코넬리아는 엄격과 근엄을 담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전의 몸이었다면 모를까, 동생보다도 한참은 어려 보이는 아이의 몸으로 그래 봤자 전혀 위엄이 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있는 건지 재클린은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리면서 변명했다.
“훔친 거 아니야. 그냥 잠시, 아주 잠시 빌린 거라고.”
“말은 잘해요, 너 이렇게 티 나는 걸 훔치면, 언젠가 크게 고생 한 번 할 거야!”
“어머, 오빠가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거야?”
“당연하지. 네가 잘못되면 나는 어떡하라고.”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답을 하면서도 코넬리아는 수첩을 뒤적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동생, 이리 와 봐.”
수첩의 맨 뒤 페이지에는 여러 주소가 죽 적혀 있었다. 악필이라 정확히 알아보긴 어려워도, 각 주소의 앞에 이니셜이 쓰인 건 알아볼 수 있다. 머리글자 몇 개가 적혀 있는 것만으로는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이거… 여기 주소.”
코넬리아가 그 수많은 목록 중에서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의학국 근처 같은데?”
“아, 여기 나 아는 곳.”
바짝 옆에 붙어 앉은 재클린은 휘익, 하고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못생기기로 소문이 난 콘크리트 빌딩, 버트랜드 준장님 저택. 머리글자도 마침 딱 맞네.”
“콘크리트 빌딩.”
동생의 입에서 나온 설명을 들은 코넬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집이 아니라 무슨 요새를 꾸려 놓은 거기?”
“응. 그 아저씨, 덩치는 곰처럼 크다면서도 뭐가 그렇게도 겁이 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왕립 의학국을 다니면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건물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주택 주소가 왜 아르샤 시장의 수첩에 적혀 있는 거지?”
재클린의 당연한 의문.
그리고 그 의문조차도, 코넬리아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재클린.”
“응, 오빠. 왜?”
“이따가 시청으로 돌아가면, 이거 시장한테 물어봐.”
그렇게 말하면서.
코넬리아는, 주소의 끝에 적혀 있는 표식을 가리켰다.
* * * * *
다음 날.
허셜의 얼굴에 가식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았다. 순수한 감정만 정제되어 남은 그 표정.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 순간의 경악이 담겨있었다.
“어제는 수고 많으셨습니다. 허셜 씨.”
의학국 제복이 아닌 흔하디흔한 외출복을 입고 있으니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녀로 보인다.
“시장님이 꽤 놀라더군요. 혹시 질책을 당하진 않으셨는지.”
“하, 하하~… 저를 너무 놀리십니다, 경의사 님.”
“어제 시청에서 무슨 일이 있어 났을까, 하는 불필요한 호기심은 가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렴요~ 하하, 그, 그렇고 말고요….”
코넬리아가 입고 있는 흑회색으로 통일된 상의와 하의는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었지만, 어깨에 두른 버건디 색의 숄과, 손에 끼고 있는 하얀 실크장갑이 적절한 강조를 주고 있었다.
전날에는 짧게 위로 올려 묶었던 머리도, 지금은 가지런히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상태.
별생각 없이 코넬리아 자신의 심미안을 믿고 사복을 입으면 엉망진창이 된다.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너무 조숙한 척하는 꼴로는 보이지는 않도록 재클린이 주의를 기울인 옷이었다.
“그런데 경의사 님, 어쩌다가 다치셨는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말입니다. 하하, 별 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코넬리아의 왼손에는 자흑색 지팡이가 쥐어져 있다.
단지 분위기를 잡기 위한 소품으로만 쓰이는 건 아니었다. 보행할 때 적잖이 체중을 분산하여 지지하는 역할을 해 준다.
아침에 활력을 충전하고 오긴 하였지만, 컨디션을 최대한 해치지 않을 정도의 준비는 하는 편이 좋았다. 지팡이를 짚는 자체가 허약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코넬리아는 그다지 사용하고 싶진 않았다.
‘어제 그 사달이 났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일찍 출근한 직원의 귀에 들리게 하고 싶진 않은지, 허셜은 작은 목소리였다.
“어째서 이런 이른 아침에 찾아오셨는지요. 감사 결과에, 무, 문제라도?”
“걱정하지 마시길. ‘그런’ 건 아닙니다.”
당연히 품을 법한 의문이었다.
오해는 빠르게 해결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늘은 허셜 씨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코넬리아는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여행 안내서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펼쳐서 허셜에게 보여주었다. 조심스럽게 펼쳐진 페이지를 받아서 본 허셜은, 모처럼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지, 그리고 그 부탁의 대답도 어떻게 해야 할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여유로움의 미소.
“일단 아르샤에 온 이상 떠나기 전에 꼭 한 번은 들려보고 싶거든요.”
그런 허셜과는 달리 코넬리아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여기에 표시된 온천만 해도 스무 개가 넘습니다. 제가 새로 만든 표시도 아니에요. 안내서가 ‘효능이 있는 샘’이랍시고 설명을 쓴 것만 해도 그 정도입니다.”
“크하하, 말씀대로 정~말 많네요!”
안내서를 활짝 펼치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아르샤 시 전체의 조감도가 양 페이지를 걸쳐서 그려져 있다. 거기에 붉은 잉크로 표시가 된 온천은 불규칙하게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이 중에서 무엇이 [진짜]였는지는… 안내서 설명만으로는 도통 알 수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