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1막 (中) 네가 잘못 되면 나는 어떡하라고 - 03
코넬리아의 요구를 적었던 메모지를 쥔 직원은 그것을 싱글 생글 웃는 재클린에게 건넸다.
“사전에 전달받은 사항이 있습니다. 여기로 가시길.”
“감사함다~”
받아 든 메모지에는 코넬리아가 묵고 있는 방 번호가 적혀 있다. 그녀는 승강기 대신 계단으로 향하였다.
마치 평지에서 가벼운 몸풀기라도 하듯. 계단을 올라가는 재클린의 호흡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코넬리아로부터 맡은 역할은, 경의사의 《대역》.
제아무리 비밀리에 임명하고 암약(暗躍)을 전제로 활동하는 경의사라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는 이상 신분이 노출되는 건 막을 수 없다. 지방의 각 지역은 정부의 간섭에 반발하는 것 하나만큼은 기묘한 유대감으로 공유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경의사 정보는 빠지지 않는다.
게다가 예전과는 달리 언론이 자유롭게 풀린 지금이다. 민간에 드러나는 모든 것이, 더는 기밀이라고 감출 수가 없었다.
판매 부수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허튼소리라도 자극적으로 라인을 뽑아서 윤전기를 돌리고 보는 일간지엔, 반역과 적국 찬동을 제외한 그 무엇도 ‘실을 수 있는 먹잇감’이었다.
수도의 영향력이 거리에 반비례했기에, 이는 지방 지역으로 갈수록 심해졌다. 선(先)보도 후(後)검열이 일상화된 신문 기자들마저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보아야 했다.
그렇기에.
옛날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려고 했다면. 지금은 처음부터 정보 누수를 전제로, 하나의 진짜 정보를 수십, 수백 가지의 가짜 정보로 가려지도록 기만하는 여러 가지 교란 방법을 사용한다.
그중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 지금처럼 경의사를 ‘복수(複數)의 의원으로 조직된 집단’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흥 흥 흐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재클린이 이윽고 발을 멈춘 문에는 ‘1505’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잠깐 앞머리를 왼쪽으로 가지런히 넘기고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띵똥-]
문 너머에서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코넬리아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흐응~…?”
늦게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잡은 손잡이가 빙그르르, 돌아가고.
잠금장치가 걸려 있지 않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제법 어두워진 하늘은 창문을 더는 환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고, 방 안은 불빛 하나 없다. 그걸 본 재클린의 얼굴은 마치 공화국의 도자기 인형처럼 웃는 채 고정이 된 낯이다.
“그럼 1층 로비로 돌아갈까?”
말은 그렇게 하고.
문은 열어둔 채, 재클린은 구두를 벗고. 검은 양말을 신은 발 뒷꿈치부터 천천히 1505호실 안으로 내디딘다.
그녀는 클록 안에 숨기고 있던 총을 꺼내었다.
압축 증기 카트리지를 사용하는 스팀건. 화약을 사용하는 일반 플린트락 소총과 비슷한 생김새지만 한 손으로 쓰기 편한 스팀건은, 근접 거리에서 사용되는 호신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안전태엽을 풀고. 복도에서 비쳐오는 불빛에 의지하여 그녀는 방 안을 바라보았다.
‘욕실은 닫혀 있네.’
재클린은 벽에 등을 댄 채,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자유로운 오른손만을 앞으로 뻗었다.
침실 입구 탁자에 고정된 가스등의 밸브를 돌리고.
[티딕—]
점화 스위치를 돌리자.
한순간에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그녀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모습.
외출 복장을 한 채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코넬리아의 새하얀 얼굴은, 입술마저 새파랗게 말라가고 있었다.
입 바깥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경악을 간신히 참고, 재클린은 돌아서서 문을 닫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잠금장치를 걸자마자 곧바로 코넬리아의 곁으로 달려간다.
“안돼… 안 된다고….”
그녀는 코넬리아의 귓바퀴 아래 경동맥을 짚어 보았다. 그다음에 바로 코끝에 손가락을 대니, 미약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날숨이 느껴졌다.
최악의 경우는 일단 피했지만 안도할 틈은 없었다.
소녀의 몸은 죽어가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코넬리아의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클린은 잘 알고 있었다.
“미안, 오빠! 허락 없이 벗겨서!”
의미 없는 사과를 하면서, 재클린은 코넬리아의 재킷을 젖히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모두 풀었다. 그리고 침착함과 공황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코넬리아가 가져온 두 개의 가방은 다행스럽게도 침대 바로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중에서 왕진 가방을 들어서 열었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뒤섞여서 가지런함과는 꽤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가방 안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꺼낸 건, 수통이었다.
보통 흔하게 볼 수 있는 금속제 수통처럼 생겼지만, 그 겉에는 호화로운 무늬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십자가 모양의 나무 지팡이를 감싸고 있는 두 마리의 뱀. 주위로는 오래된 잠언이 알기 힘들게 흘려 쓰는 필체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묵직한 수통을 흔들어보니, 물이 찰랑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곧이어 가방 안에서 재클린은 증기 주입기(蒸氣注入器)를 꺼냈다. 작고 투명한 실린더가 훤하게 보이는 장비에서 분리한 실린더에, 조금 전 수통의 물을 눈금만큼 집어넣고.
‘제발 작동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재클린은, 실린더를 다시 재장착한 주입기의 용두(龍頭)를 반 바퀴 돌렸다.
그러자, 일순간.
[치이익─]
안에 담긴 물이 투명하게 보이던 실린더가 뿌연 젖빛으로 바뀌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실린더가 불투명하게 변하는 마술이라고 놀랄 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뀐 건 실린더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던 수분이다.
재클린이 증기 주입기의 손잡이를 꽉 쥐자 끝부분에서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바늘이 튀어나왔다.
이걸 쑤셔 넣어야 한다.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코넬리아의 블라우스 앞섬을 양옆으로 헤쳤다. 옷가지로 감추어져 있던 소녀의 가슴이 재클린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어린 연령의 착색 되지 않은 유륜은 엷은 분홍빛을 띠고 있고, 살결은 제법 서늘한 공기가 닿아서 그런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코넬리아의 왼쪽 유두에 재클린은 검지와 중지를 붙여서 대고, 그 아래를 따라 내려 더듬으며 위치를 잡았다. 마른 갈비뼈의 오돌토돌한 윤곽이 그대로 보였지만 믿을 수 있는 건 촉각이었다.
3번 4번 늑골 사이의 공간, 손가락 끝에서 무언가 살짝 걸리는 느낌이 느껴진다.
인간의 몸에서 만들어진 신체 구조가 아닌, 확연하게 이질감이 감도는 금속제 인공물.
더는 망설일 틈이 없다. 실수가 용납될 여지 또한 없었다.
빠르게. 그러면서도 실수가 없이 침착하게. 재클린은 증기 주입기의 바늘을, 코넬리아의 가슴 아래에 파묻힌 인공심장(人工心臟)의 튜브에 꽂았다.
“윽─!”
의식을 잃은 코넬리아의 입술 틈 사이로 희미하게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를 질끈 악물고, 재클린은 방아쇠를 당겼다.
[피시시시-]
실린더 안을 채우고 있던 농밀한 증기가 소녀에게 주입되자마자, 창백한 코넬리아의 뺨에 곧장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으으─…” 하는 작은 숨을 토해내면서 천천히 의식을 차리려는 소녀 위에 올라탄 채.
“오빠! 정신 차려! 눈 감으면 안 돼!”
증기 주입기를 뽑아내고, 재클린은 거침없이 뺨을 때렸다.
찰싹, 찰싹, 찰싹. 네 번째 후려 내갈기려는 순간 코넬리아가 팔을 들어, 재클린의 손을 잡았다.
“그… 그만 때려….”
“오빠! 정신 차렸어?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알다마다, 내 사랑스러운 동생인 거 누가 뭐라고 해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만해 제발… 아파 죽어….”
아직 시커먼 눈그늘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지친 상태이기는 해도 코넬리아는 의식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자신의 몸을 깔아뭉개듯 걸터앉아 있는 재클린을 밀쳐 내려고 했다.
너무나도 미약한 완력이었지만 동생은 알아서 비켜주었다.
“에구구… 이게 무슨 꼴이람….”
나이에 걸맞지 않은 한탄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자신이 헐벗은 걸 깨달았다. 깨닫자마자 소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더듬었다.
굵은 바늘이 들어갔던 상처가 닿자 자신도 모르게 “아야!” 하는 소리를 내었다.
짧게 자른 손톱 아래로 묻어진 핏자국을 보면서, 비로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이 되었다.
“증기 주입을 한 거구나, 재클린.”
성수(聖水)로 만든 증기를 인공심장에 주입하면 강제적으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적응이 되면 좋아지는 감각이라고 해도 코넬리아는 도통 적응을 하기 어려웠다. 마치 뜨뜻미지근한 납을 억지로 동맥에 쑤셔 넣듯, 몸이 근질근질하게 느껴지는 불편한 열기가 혈류를 따라 퍼져나가고 있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고. 코넬리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튜브를 찔렀네. 훌륭한 솜씨야.”
“화, 안 내는 거야?”
“내가 왜 화를 내?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지. 고마워.”
주섬주섬 블라우스의 단추를 채우고, 코넬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빠르게 단념하였다.
“하아, 그 영감탱이 분명히 이틀 치 활력은 된다고 했었는데.”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허리. 억지로 세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코넬리아는 침대에 큰 대 자로 드러누워서, 어린애처럼 팔다리를 흔들며 짜증을 냈다.
“아 진짜! 이게 무슨 이틀이야! 하루도 제대로 못 쓰잖아!”
“오빠, 화내면 안 돼. 내면을 가다듬어. 씁씁 후후─”
“쓰, 쓰읍 씁….”
재클린의 호흡법을 마지 못해 따라 하면서도, 소녀의 얼굴에 드러나는 신경질은 숨길 수가 없었다.
수도 안에서 재활 치료를 할 때는 이런 고민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성지(聖地) 위에 구축된 왕국의 수도는, 그 지역 자체에서 모든 존재가 성스러웠다. ‘마법’과도 같은 활력은 길거리의 풀포기 따위조차 넘쳐 흐르는 정도.
하물며 ‘신룡의 염(炎)’으로 불타오르는 보일러에서 공급되는 증기의 활력이야 더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코넬리아의 인공심장은 인공으로 활력을 넣어야만 그 작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수도의 증기가 활력으로 가득했던 건, 오로지 수도 안에서일 뿐. 도시를 떠나면 그 증기는 아무런 활력이 없는─평범한─흔해빠진 증기에 불과하였다.
성스러움이 깃들어져 있는 건 증기가 아니라 도시라는 지역 그 자체이기 때문.
수도 밖에서도 코넬리아의 인공심장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신의 은총이 깃든 성수(聖水)로 만들어진 증기를 정기적으로 주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후우─… 재클린, 부탁했던 ‘일’은 다 끝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