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1막 (上) 일어나려 할 때 - 05
건물에서 나와서 뒤로 돌아 다섯 블럭. 도시에서 한층 깊숙한 방향으로 향하니 그제야 비로소 인기척이 한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도착한 레스토랑은 모처럼 활기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매장의 안과 밖이 트여 있는 레스토랑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은 빈자리가 드물었다. 허셜은 용케도 둘이서 앉기에 적당한 둥근 테이블로 코넬리아를 안내했다.
“여기는 다른 곳보다 사람들이 붐비는 편이네요.”
허셜이 이것저것 주문을 하는 동안,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각기 자신의 갈길 대로 움직이는 행인들로 가득 찬 거리.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색상과 장신구만 조금씩 다르다. 단조로운 양식으로 통일된 복장을 보면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솟아오른다.
수도에서는 어딜 가더라도 흔하게 받을 수 있었던 느낌. 그리고 여태까지 아르샤에 와서는 받을 수 없었던 느낌. 도시의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네에. 이쪽은 관공서가 많아서 그럭저럭 예전 모습이죠.”
“예전 모습이라.”
“한창 잘 나가던 시기의 아르샤, 라고 할까요? 하하, 솔직히 지금은 좀 망하긴 했죠~.”
농담조로 말할 부분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든 코넬리아는 내심 그의 말에 동의하였다.
샘의 도시, 아르샤.
수백 년 전부터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솟아오르는, 특별한 샘이 있었다.
여신 『이샤카』의 축복이 깃들어진 그 샘물은 마시면 오랜 뱃병이 씻은 듯이 낫고, 그 물로 몸을 씻으면 지독한 고름이 말라붙으며, 흉한 상처에서 분홍빛 새 살이 솟아오른다─고 하였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연합 왕국의 각지에서 몰려온 온갖 난치병 환자들은, ‘독실하게 신을 믿는 자’에게만 찾아올 기적을 바라면서 샘물을 마시고 몸에 끼얹었다. 특별하게 건강이 나쁘지 않은 사람들도 그 소문을 듣고 순례를 하듯 찾아왔다.
시청에서 아무리 높은 입장료를 매겨도, 터무니없이 비싼 요금 때문이 아니라 빈자리가 나지 않아서 아우성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숙박업소는 사시사철 예약 만료인 건 당연. 전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리는 곳이니, 무슨 장사든 망하는 법이 없었다.
이 정도는 교수로부터 아르샤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전달받기 전에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었다.
전부 과거형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건, 지금 아르샤에서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사람들의 기억에서나 존재하는 꿈과도 같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새하얀 식탁보가 덮인 테이블 위로 순식간에 음식과 식기 세팅이 완료되었다.
“샘이 말라붙은 건… 십 년 정도 되었던가요.”
“네에, 그쯤 되었습니다. 우물우물.”
허셜은 나이프로 적당히 썰어낸 제국식 소시지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땅은 별로 비옥하지 않으니 농사로 먹고사는 동네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축을 키우지도, 공장을 세우지도 않았거든요~ 여기. 음음, 그러다 보니, 꿀꺽.”
붉은 와인을 마시면서 허셜은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샘이 말라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 망해버렸죠.”
“샘이 마르기 전에 와 보는 거였는데.”
코넬리아는 켜켜이 쌓인 팬케이크 위로, 시럽이 담긴 작은 다기를 기울였다. 끈적이는 호박빛 윤기의 시럽은 어디 한 곳 눌어붙은 곳 없이 매끈하게 구워진 따끈따끈한 팬케이크의 표면을 적시며 접시로 흘러내린다.
푸념 섞인 코넬리아의 말에 허셜은 가볍게 웃었다.
“하하, 샘이 마른 건 한참 전이니까 뭐어~… 어렸을 때 오셨더라도 너무 어릴 때라서 기억이 나지 않았겠죠. 어쩌면 왔었을지도 몰라요~?”
“음, 그렇네요. 그 말이 맞습니다.”
소녀가 쥔 나이프의 끝이 푹신한 팬케이크를 파고들었다. 도톰하게 쌓인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코넬리아는 안도의 숨을 돌렸다.
‘쓸데없이 말실수할 뻔 했군. 하마터면.’
자신이 기억하는 십 년 전은 의학국에서 한창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시험에 신음하고 있는 시절이다.
허나 코넬리아의 십 년 전은 간신히 두 발로 아장아장 걸어 다닐 유아(幼兒)였을 때. 예전에 일어난 사건이나 나이 등등. 자칫 말실수했다가는 시간을 역산할 수 있는 소재는 대화에 올리지 않는 편이 좋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알면서 실수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허셜은 나이프를 쥔 손으로 주위를 비잉 둘러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렇게 도시가 쪼그라드는 건 좀 이상한걸~ 하는 생각 드시지 않나요? 역에서부터 사무실로 오는 길은, 제 기억으로는 분명히 여기보다도 더 조용한 구역이었을 텐데요.”
“저야 이방인이니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었습니다.”
그의 말에 코넬리아는 순순히 동의했다. 허셜은 익살스럽게 목을 아래로 쭉 내밀며 중얼거렸다.
“실은 말이죠오…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자기가 얽힐 수 있는 성가신 주제는 피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허셜은 선뜻 그 화제를 이어나갔다.
“축복의 샘이 말라붙어서 아르샤가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건 맞는 말이거든요. 마침 제가 이곳에서 자리를 잡았던 때가 정확하게 그즈음이니 말입니다.”
“꽤나 타이밍이 나쁘셨군요. 허셜 씨.”
“하하~ 안 그래도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재빠르게 다른 지역 교구(敎區)로 옮기지 그랬어! 이런 식으로요. 아, 경의사 님의 발상이 안일하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건 제가 생각해도 당연하다고 보거든요! 당연한 거죠~!”
만에 하나 오해를 살 일 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걸 필사적으로 어필하는 것처럼. 허셜은 몇 겹이나 되는 방패를 내세우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우물쭈물하다가 다른 교구로 옮겨갈 타이밍을 놓친 건 맞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저도 꽤~나 눈치가 어두운 편은 아니거든요.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요! 아고고, 이거 참 벌써 말해버렸네~”
“허셜 씨. 잠시만.”
귀는 열어둔 채, 입은 비워두지 않는다. 어느 사이에 팬케이크 접시를 비운 코넬리아는 테이블 한쪽에 올려진 핸드벨을 울렸다.
가느다란 은세공 손잡이 아래로 매달려 있는 작은 벨이 맑은 소리를 내었다. 다가온 웨이트리스에게 빈 팬케이크 접시를 가리켜서 재주문을 한 코넬리아는 말을 이었다.
“샘이 말라붙은 후에도 몇 년 정도는 환자 수가 적절하게 유지되었던 거죠, 허셜 씨?”
“바로 그겁니다! 역~시 경의사 님의 통찰력!”
“후후. 제가 머리가 좀 좋기는 합니다.”
살짝 어깨를 펴는 코넬리아에게 겸손함의 한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허셜에게 적당하게 어울려주는 거긴 했지만. 서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지, 허셜은 연거푸 와인을 들이켰다.
“여기 사는 주민이 아니면 잘 모르는 거긴 한데, 지금처럼 사람이 확 줄어든 건 겨우, 겨~우 삼 년 사이의 일이란 거죠.”
삼 년.
‘너무 짧은데….’
“아르샤가 쇠락한 이유는 달리 무언가 숨어있다는 거죠. 샘이 아니라~”
허셜과 눈이 마주친 코넬리아는 살짝 왼손을 들었다. ‘조용’이라는 의미의 손짓이다. 입을 다문 그의 등 뒤에서 웨이트리스가 가져온, 갓 구워져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팬케이크 위로, 코넬리아는 아낌없이 시럽을 부었다.
“허셜 씨.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소식(少食)하는 성격입니까.”
“예, 예에?”
“식사를 너무 천천히 하시길래, 개인적으로 살짝 궁금해져서.”
그가 떠드는 동안 묵묵히 식사를 이어나갔던 코넬리아의 앞에 놓여 있던 여러 접시가, 어느덧 다 비어 있다. 새로 온 팬케이크도 코넬리아의 정교한 손놀림 앞에서 금세 자로 재고 자르듯 반듯하게 동강이 났다.
“이걸 다 먹으면 허셜 씨는 저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갈 겁니다. 그전까지 부지런히 식사에 집중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싫습니까?”
“아, 아니요! 싫기는요~ 맛있는 건 언제나 나중에 아껴 먹는 성격이라서요! 이제 다 먹어야죠~”
“여기 레스토랑 음식을 정말로 좋아하시나 봐요? 아껴 둔 음식이 꽤 되십니다.”
“그, 그, 그러게요, 크허허!”
허셜은 황급히 음식을 입에 쑤셔 넣기를 했다. 지금 이 아저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코넬리아는 감이 왔다. 신이 나서 떠들던 그의 말은 단지 기분이 좋아서, 단지 술기운이 돌아서 그런 건 아녔다. 이런 서툰 연기로 누가 속을까 싶다마는.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팬케이크와 메이플 시럽의 풍미를 진하게 느끼며. 입에 머금은 미소를 풀지 않으며 소녀는 좀전의 대화를 반추하였다.
그는 일부러 허허실실해지고 있지만.
허셜에게 자신은 완전히 얕잡아 보이고 있다. 그것만큼은, 분명히 알았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는 건, 너무나도 그 속셈이 뻔히 보이는 허셜이 거꾸로 귀엽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넬리아는 한 번도 와인에는 손을 대지 않았고, 맑은 물이 담긴 잔을 깔끔하게 비우는 것으로 소녀는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허셜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와 오전과 마찬가지로 지루한 사무 작업을 이어나갔다. 변함없이 허셜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뒤늦게 느지막하게 출근한 직원은 다행히도 모든 면에서 허셜보다는 나았다.
나머지 일이 다 끝났을 때는 어느덧 오후의 햇살이 꽤 기울어져 있었다.
좁은 탁자 위에서 새하얀 산과 들판을 이루고 있던 서류 뭉치는 코넬리아의 앞에서 십 수 장의 보고서로 압축되었다. 그 보고서는 매일 아침 해가 뜰 무렵 수도로 향하는 우편열차로 전달될 것이었다.
“이건 내일, 의학국에 올리겠습니다.”
“벼- 별다른 문제는 없었겠죠~?”
“그건 의학국이 판단할 일입니다…만.”
상대를 너무 무정하게 대하는 건 좋지 않다. 아군으로 만들지는 않을지언정, 원수가 될 트집은 안 주는 편이 좋겠지. 코넬리아는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커다란 흠결은 없었습니다.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경의사 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 은혜 갚기. 그거 좋은 전통이죠.”
“네?”
“한 가지 부탁을 드릴 게 있거든요. 이건 ‘의원’으로 부탁드리는 겁니다.”
비록 허셜을 온종일 괴롭히는 악역을 떠맡았지만, 코넬리아가 만약 경의사가 아니었다면 거꾸로 허셜에게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숙소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무조건 시설은 최고로 좋은 곳으로.”
잠을 자는 장소에는 돈을 아끼지 마라. 짠돌이로 소문이 났던 그 교수가 이런 조언을 한 건, 자신이 아끼는 제자가 건장한 성인에서 작은 체구의 청소년이 되었으니 이만저만 걱정이 된 탓도 있었겠지. 코넬리아는 교수의 조언에 충실히 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고로 좋은 곳! 제가 자~알 알죠. 역 앞에 있는 프리시카 호텔로─”
“그리고.”
마치 이 부탁을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기 시작한 허셜에게, 말의 찬물을 끼얹어 보자.
“최고로 목이 좋은 곳으로 잡읍시다.”
“모… 목이 좋은 곳 말인가요오…?”
“네. 이왕 아르샤에 왔으니 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그렇지. 조금 전 저희가 갔던 레스토랑이 있는 거리.”
거기서 한참 허셜에게 속아줬으니. 이번엔 자신이 속여주는 게 공평할 것이다. 마치 우연히, 즉석에서 떠올린 것처럼, 코넬리아는 말했다.
“근처에 있던 아르누보 양식의 고층 호텔. 거기에 가고 싶네요.”
이미 아르샤에 오기 전부터 코넬리아는 그 호텔에 가기로 내심 정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아르샤 시(市)의 시청 바로 맞은편에 있는 숙소다. 시청 공무원들에겐 그야말로 천벌과도 같은 소식이겠지.
점심을 먹었을 때. 허셜은 일부러 식당에서 여봐라는 듯 「경의사」란 단어를 몇 번이나 입에 올렸다. 관공서가 모여 있는 식당에서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시청 직원들에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경의사가 왔다!’란 사실이 귀로 들어가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어떤 생각으로 허셜이 그랬는지는 뻔했다. 조금 불편한 자료는 숨겨 두든지 파기를 하든지 준비를 일 분 일 초라도 빨리하라고, 괜히 알려주는 생색을 낸 것이다.
‘그런 건 나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도 되었을 텐데….’
하긴, 허셜의 입장에서는 감히 경의사에게 유착(癒着)을 암시하는 행위를 대놓고 할 배짱은 없었겠지. 그렇긴 해도 허셜이 한 짓은 거꾸로 코넬리아 입장에서 아주 나쁜 건 아니었다.
행정구역 감찰은 경의사가 수행할 임무이기는 하고, 썩 내키지는 않아도 코넬리아는 사전에 아르샤 시에 대해서 다른 기관으로부터 미리 ‘요청’을 받은 게 있었다. 단 자그마한 협회 지부가 아닌 시 단위의 행정은, 절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경의사는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일정 표본을 검출하는 식으로 감사를 진행한다. 그게 정확하게 어떤 내용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주 기본적인 감사 서류 정도는 시에서 미리 준비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확인’하는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서류는 미리 대비를 해주는 편이 피차 도움이 될 터였다.
완전히 다른 이해관계가 기적적으로 일치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