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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1막 (上) 일어나려 할 때 - 04 (4/111)



〈 4화 〉1막 (上) 일어나려 할 때 - 04

*  *  *  *

“감찰 허가증, 여기 나왔습니다! 후우, 후우 후우~!”

갓 휘갈긴 서명의 잉크가 어서 마르라는 양 야단법석을 떠는 허셜. 그의 모습에 코넬리아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경의사님이야말로 수고 많습니다! 그러면 저는~”
“허셜 씨.”


소녀는 집게손가락을 세웠다.  끝을 입술에 대며 말한다.

“아직 못 찾은 재작년 결산 서류도, 가져오셔야죠?”
“예에. 금방 찾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 붙들어 매시길!”

말은 자신감이 넘쳐 흐르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그 자신감에 근거는 없을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후우우─….”


고개를 푹 숙이고, 코넬리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긁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죄, 죄송합니다! 당장 찾아서 가져오겠습니다! 당장요!”


완전히 얼굴이 하얗게 질린 허셜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화  거 아닌데.’

이 습관은 자신이 이렇게 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번이나 지적을 받았던, 다른 사람들에겐 항상 나쁜 인상을 심어주던 버릇이다. 고쳐야 할 때 고치지 않은 습관이 지금처럼 민감한 타이밍에 터져 나온 걸 누굴 탓하겠는가.

“아니다. 그게 아니지.”

응접용 탁자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 서류의 대부분은 수년 동안 손길  번 받은  없이 뽀얗게 먼지로 덮인 채 사무실 구석 캐비닛에 처박혀 있었다. 아직 출근조차 하지 않은 직원을 대신하여, 허셜이 손수 찾아서 가져온 것들이다.


두서없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건 코넬리아가 즉석에서 알아서 정렬하면서 읽어야 한다. 짜증이 극에 달하면 거꾸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 지금 진짜로 화난 건가?”

혼잣말을 내뱉으니  뒤에서 “히이이익” 하는 소리가 들린다. 환청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기계적으로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이곳에 오기 전, 새로운 신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훈련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경의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철저하게 주입을 받았었다. 여러 가지 머리에 새겨진 정보는 무수히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을 손꼽으면, “경의사인 척하는  아니라, 진짜 경의사다”란 거였다.

경의사가 지역을 방문했을 때에 무엇을 해야 하고, 해서는  되는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었다.

하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본업.

둘. 강제하지 않는 윤리적인 책무.

반드시 해야 하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왕립의학원 협회 지부의 연간 결산 서류 검토’ 정도는, 원래 코넬리아의 예상대로라면 좀 더 깔끔하고 영리하게 해치웠어야 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금방 따뜻~한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지금 차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짜증이 벌컥 나오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홍차로 부탁드립니다. 우유는 넣지 말아 주세요.”
“예에, 주문 접수했습니다~”


차를 마시고 릴렉스를 하길 원하는 허셜의 대응은, 때에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반응을 하려고 했으니까. 코넬리아는 이런 자신의 변화가 조금은 걱정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날카로워진 걸까. 역에서 여기까지 힘들게 걸어오긴 했지만, 전엔 몸이 지쳤다고 해서 정신까지 지치진 않았었는데.


‘압박감이 영향을 끼친 걸까?’


경의사를 맡으면서 감당해야 하는 압박감은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가볍게 떠안을 만한 건 아니다.

[왕립의학원] 협회 지부는 연합왕국 곳곳의 지역마다 존재한다. 협회 지부가 맡는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간단히 말하자면 지부가 관리하는 지역 내 의원들을 관리하는 것. 그 위에 있는   지역의 조그마한 자치 권력이 아닌, 엄준한 ‘왕실’의 명령이다.


그리고 이 협회 지부를 들쑤시고 있는 자신.


코넬리아 B.


이 소녀는, 의학국에서 올 6월 경의사로 추천한 인물이다. 가상으로 꾸며낸 게 아닌, 어디까지나 번듯하게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소녀. 만약 누군가  이름을 왕실로 보내어서 확인 요청을 하더라도 문제가 될 건 없다.

게다가 어지간한 말썽에 휘말려도 혼자서 벗어날 수 있는 ‘특수 신분’.

다른 누가 강요한 게 아닌, 렉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였다. 자신이 내린 선택이니 누굴 탓하거나 원망할 필요도 없었다.


교수와 의학국의 후원은 더는 기대하기 어렵다. 딱히 염치없이 부끄럽다거나 미안해서가 아니라, 이미 경의사가 된 이상 경솔하게 관계를 이어갔다가는 되려 오해와 의심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빼곡하게 글씨가 채워진 서류를 읽어 내려가면서.


코넬리아는 공백과 공백, 페이지와 페이지, 그 찰나의 사이마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일이 잘못되면, 오롯하게 자신의 잘못이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압박감. 그 감정이 만들어낸 부담이 심야 열차를 탔을 때부터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감정의 부산물을 애꿎은 허셜에게 쏟아내어선 안 될 일이었다.

“자아, 이거 마시고 일하세요~ 차 나왔습니다!”

어느 사이에 찻잎을 우려낸 홍차를 잔에 담아서 허셜이 쟁반에 받쳐 가져온다. 조금 전까지 싫은 소리를 한 코넬리아에,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웃는 낯으로 허셜은 찻잔을 건네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긴장이 풀리고 일에 몰입하고 싶어진다니까요?”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 코넬리아는 찻잔을 입에 대었다. 퍼져 나와서 비강에 스며드는 홍차의 향에 한번 놀라고,


“오….”

입에 한 모금 들어온 감미로움의 깊은 감각에, 소녀는 무심결에 감탄하였다.  반응을 보던 허셜이 호들갑스럽게 추임새를 얹는다.

“차 맛 하나는 죽여주게 좋지 않습니까, 아르샤에서 이 맛을 보지 않고 떠난 사람은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본 거라니까요!”
“그것참 다행이네요. 제가 손해  일은 없다는 거니.”

성격의 상성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언제나 피곤한 일이었다. 의학국에 있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걸 거꾸로 생각해보면

‘내가 불편한 건 저쪽도 같은 입장이라는 거지.’

홍차를 홀짝이면서, 허셜이 산더미처럼 가져다준 서류를 쭉쭉 훑어본 코넬리아.

커다란 찻주전자를 두  정도 비우고 나서 적당하게 중간에서 끊었다. 괜스레 안절부절못하면서 짐을 치웠다가 서류철을 꽂았다가 뺐다가 하는 허셜을 보면서 소녀는 말했다.

“배가 고프네요. 점심을 먹으러 갑시다.”
“아, 제가 잘 아는 식당이 있습니다! 팬케이크가 끝내주게 맛있는─”
“가기 전에 가볍게 대화를 해요.”

코넬리아는 맞은편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쪼르륵 달려와서 거기에 앉는 허셜에게 소녀는 물었다.

“허셜 씨. 뭔가 저에게 물어보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하하~ 제가 감히 별달리 여쭈어볼 게 있겠습니까! 단지,  뭐랄까, 경의사 분께서 여기엔 무슨 일로 행차하셨는지 궁금하긴 하지요.”
“별거 아닙니다. 형식적인 점검이란 거죠, ‘형식적’으로.”
“그 말씀은 희소식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요….”
“희소시익?”

코넬리아는 말끝을 살짝 올렸다.


“그 말이, 허셜 씨가 정말로 궁금하게 여기는 거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아하하, 하하…. 예에. 그렇죠 뭐어….”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허셜. 지금의 코넬리아와 그 사이에는 적어도 부모와 자녀 정도의 나이 차가 있다. 그런데도 허셜은 코넬리아에게 거의 애원하다시피 저자세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처지를 바꿔서, 만약 코넬리아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체포하고 구금할  있는 무소불위의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을 탈탈 털어낼 각오를 하고 찾아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었을까.

‘저런 태도는 안 할 거 같은데. 나는.’
“제… 제 얼굴에 뭔가 유감스러운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물끄러미. 잠시 얼굴을 쳐다본 것만으로도 허셜은 금세 코넬리아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헤헤 웃었다.


솔직히. 코넬리아는 지금 그의 태도에 공감은 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허셜 씨의 외모는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네에?”

시답잖은 농담에도 혼란스러워하는 허셜을 보면서.


그가 어째서 이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지, 이해 정도는 할  있다.

어른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면 허셜의 선천적인 성격이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으로 적용되었을 터였다. 억지로라도 자신의 위치를 낮추면 상대적으로 상대의 위치가 올라간다.

밑에서 위로 향하는 말은 부탁이 되고, 위에서 아래로 전하는 말은 명령이 된다.


명령과 부탁이 오고 가는 사이.
그 사이의 간격을 좁히면서, 타협이 시작한다.


여태까지 그가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높으신 분들’을 상대했을지 코넬리아는 알 도리가 없었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소녀가 확신할 수 있는  하나.


그의 청산유수와도 같은 언행도, 딸뻘인 자신을 상대로 해서야 그저 우스꽝스러운 연극처럼 될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허셜 필립스 씨.”

코넬리아는 짐짓 힘이 들어가 있는 듯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표정에 허셜은 꿀꺽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해서 침을 삼킨다.

“무언가 걱정이 과하신 거 같은데, 저는 허셜 씨를 털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지금 자신의 앞 탁자에 놓인 서류 뭉치들을 하나로 쌓으면, 거진 자신의  정도는 쌓이고도 남을 정도다. 이렇게 오전 내내 들볶았으면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설득력은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한층 더 긴장하기 시작한 허셜에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경의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몰라도, 저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려야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건 지극히 최근이니 말입니다.”
“최근이라면 어느 정도 신지…?”
“이제 막 정오가 되어 가는 참이니까.”


벽에 걸려 있는 추시계를 보며, 코넬리아는 말했다.


“네 시간 정도 되었네요.”

똑딱, 똑딱, 똑딱.

시계추가 세 번 왕복하는 시간. 그 짧은 사이 동안 허셜의 입이 아무런 어휘도 꺼내지 못하였다. ‘말문이 턱 막힌다’는 표현을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든 누군가의  상대도, 바로 지금 허셜과 같은 상태였겠지.


진공과도 같은 침묵.

 사이에 끊어진 말을 이은 건, 허셜이 아닌 코넬리아였다.


“제가 명을 받아서 찾아가야 하는 목적지는 여기에서 훨씬 남쪽에 있습니다. 아르샤는 잠시 사정이 생겨서 들렸을 뿐이고, 각 도시를 방문할 때 경의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즉.  짓도 별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뜻.


“저는 요령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을 지켜서 형식적으로 점검을 할 거고, 형식 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걸로 끝일 겁니다. 그러니 하나만 부탁을 드리자면─”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는 의학원 출신 의원을 총괄하는, 아르샤 지부의 시시콜콜한  굳이 깊숙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그 의미가 부디 잘 전달되기를. 코넬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셜 씨. 저는 메이플 시럽이 맛있는 집이 좋아요.”
“아무렴요… 최고죠, 메이플 시럽….”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는지, 허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그의 손을 잡고 코넬리아는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먹으러 가요. 끝내주게 맛있는 팬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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