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1막 (上) 일어나려 할 때 - 03
“이 정도 가방 따위.”
본디 넉넉잡아서 반년가량은 받아야 하는 재활 치료를, 코넬리아는 겨우 석 달 정도만 진행했다. 일상적인 생활을 간신히 할 수 있을 정도의 근육과 체력은 마련했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는, 데에에에….”
이십 수년 간 남자로 성장하면서 알게 모르게 마음속으로 생각해두고 있던 체력의 한정선은, 고작 석 달이라는 시간으로 덮어 쓰이진 못한다.
머릿속으로는 어깨에 지푸라기 하나 맨 것처럼 거뜬하게 가방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과장도 아니고, 망상도 아니었다. 스무 살 무렵의 남성이라면 당연하다.
“끄으응… 끄으으…….”
그러나 현실은 수백 미터를 걸은 것만으로도 손발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 코넬리아의 몸은 과거 렉스로서의─자신의─몸에는 비교할 가치조차 없었고.
엇비슷한 십 대 또래의 소녀보다도 훨씬 허약했다.
“후욱, 후우욱, 흡흡 후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코넬리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는 반 토막이 났어도 연륜이 느껴지는 복식 호흡을 하면서 꾸역꾸역 걷는다. 그렇게 쉬지 않고 협회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탈진 상태였다.
옛 번화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풍스러운 2층 석조 건물. 한때 호화로운 색칠이 되어 있었을 외양 조각들은 군데군데 흉물스럽게 벗겨져 있다.
원래는 상점이었던 것 같은 1층의 정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진열대의 커튼도 전부 드리워진 채였다.
숨을 고른 코넬리아는 손목에 매고 있던 끈을 풀어 머리를 고쳐 묶었다. 뒷머리 위로 짧게 올려 묶은 금빛 머리칼과 목덜미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예전처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를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코넬리아 자신도 좋아서 긴 머리로 다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호불호를 따지자면, 렉스였을 때에도 짧은 머리를 훨씬 좋아했었다. 외모엔 둔감한 편이었으니 대충 감고 대충 말려도 되는 쪽이 편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긴 머리칼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긴 있다.
뺨을 살짝 덮으며 내려오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머리띠를 써서 앞머리를 뒤로 넘겨 이마를 훤하게 내보이면, 자신이 어렸을 때의 모습 그대로가 거울 속에 있었다.
아무리 외양이 심각하리만치 달라졌다고 해도 만에 하나의 여지는, 줄일 수 있는 건 최대한 줄이는 게 맞다. 그걸 알면서도 지금처럼 머리를 적당히 정돈할 만큼 관리가 껄끄러울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다면, 감히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흐으음…….”
지금 코넬리아가 입고 있는 의학국 제복은, 일상적인 사람들이 입는 외출복과는 제법 차이가 있었다.
하얀 블레이저 위에 입은 검은색 세퍼릿 재킷은 붉은 라인이 재봉선을 따라 강조하듯이 들어가 있다. 마찬가지로 검은 톤의 스커트는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그런 옷차림을 깔끔하게 가리는 월넛 색상의 코트는 좋게 말하면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망토는 가방 안에서 적잖은 부피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스커트 아래로 입은 반바지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았기에,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만약 여기가 수도 안이었다면─그 안에서도 여러 아카데미가 모여 있는 학술원 부근이었다면─특별히 시선을 끌 만한 복장은 아니다. 오히려 제복과 교복이 뒤섞인 수많은 사람 사이로 숨어들 수 있는 위장복이 될 수 있다.
그 수도에서 한나절 거리 떨어져 있는 이곳, 아르샤에선 그런 역할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채도가 탁한 빛의 외출복을 입고 다니는 행인들 사이에선 제복이 거꾸로 두드러지게 보인다.
소녀는 이 시선을 끌기 쉬운 제복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딘가 수상쩍게 여겨지는 건, 코넬리아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닌 쪽이었다.
‘내가 잘못 온 건 아닌데.’
닫힌 1층 정문 옆,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의 옆에는 분명 협회의 간판이 내걸려 있었다.
찾아온 건 제대로 찾아왔다.
어차피 협회라고 해도, 특별하게 여러 사람이 쉴 새 없이 드나들어야만 하는 공간은 아니다. 협회의 손을 빌릴 사람이 적다는 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고, 거꾸로 일 처리를 잘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인적이 드물다는 것이 협회의 흠이 되진 않는다. 코넬리아의 마음에 걸리는 건, 이곳이 아르샤 안에서도 제법 목 좋은 중심가임이 틀림없다는 점이었다.
‘썰렁해도 너무 썰렁해.’
나는 죄가 없다, 난 코넬리아란 소녀다, 라고 아무리 믿음과 신뢰를 퍼부어도─어찌 되었든─렉스 자신은 지명수배가 된 신세다. 가녀린 이 모습을 보고 그 누구도 다부진 체형에 상큼한 미소가 어울리던 상남자의 렉스를 떠올릴 리는 없더라도,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건 본능적으로 꺼려진다. 그런 자신조차도 지금의 이 상황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긴 해도 보는 눈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 또한 사실이다. 코넬리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쥐어보니, 잠깐의 휴식이 도움이 되긴 했던 것 같았다. 양손에 가방을 쥔 채 힘차게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끝, 2층 사무실의 문 앞. 약간 삐뚤어진 각도로 내걸린 팻말에도 [왕립의학원 협회 및 경의원 지역 감찰 등록 인가 지원소 - 남방지역 아르샤 지부]라는 기나긴 이름이 쓰여 있었다.
딸랑딸랑.
도어벨의 줄을 당기니, 문 너머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에에~ 들어오십쇼~”
문의 안쪽은 혼란스러웠다. 마룻바닥을 덮은 루비색 양탄자 위로 응접용 탁자와 의자가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식물에 관심이 많은지 현관부터 온갖 크고 작은 화분이 많았고, 이리저리 놓여진 책과 탁자 위에 널려 있는 티포트까지.
빈말로도 ‘깔끔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그 가운데에서 의자 하나에 아무렇게나 앉은 채, 쭉 뻗은 다리를 꼰 채로 당당하게 탁자 위에 턱─하니 올려둔 중년 남성이 있다.
쭈글쭈글한 와이셔츠에 지저분한 얼룩이 잔뜩 묻은 양복바지, 다 헤어진 구두 끝은 거칠어져 윤기를 잃었다.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멜빵에 달린 홀스터에는 자그마한 개인 화기(火器)가 꽂혀 있다. 정리할 생각이 없는 덥수룩한 갈색 수염은 턱과 뺨과 구레나룻을 뒤덮고 있다.
밤갈색 곱슬머리인 그의 입에 물고 있는 엽궐련은 언제 마지막으로 털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재가 기다랗게 붙어있다. 손님이 들어오든 말든, 사각 금속테 안경 너머의 녹색 눈동자는 정신없이 신문 활자를 읽고 있었다.
“아, 거기 빈자리에 대충 앉으…….”
적당히 말하면서 시선을 뒤늦게 손님으로 돌린 그는 말을 하던 입을 그대로 멈추었다. 들고 있던 가방은 적당하게 화분 옆에 두고, 코넬리아는 그의 맞은 자리에 앉았다.
“…쇼.”
“예. 대충 앉았습니다.”
소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황급히 재떨이에 엽궐련을 비틀어 껐다.
“어휴~ 이거 초면부터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크허허, 하고 넉설 좋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가 내민 명함에는 ‘허셜 웰스’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편하게 허셜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허셜 씨.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어휴, 참 민망하게, 요새 여기에 누가 오는 일 자체가 별로 없다 보니 말입니다.”
'어린 애가 이 어른의 공간에 무슨 일로 기어 들어왔냐'는 반응이 아니다. 허셜은 코넬리아가 아니라, 코넬리아가 입고 있는 의학국 제복에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한창 스탬프를 모아 다닐 때죠? 크허어~ 그립네요.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하하하… 그럴 때이긴 하죠. 예.”
“어어,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면 오던 행운도 달아납니다. 웃어요, 활짝! 하하~”
알맹이가 없는 허셜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소녀는 명함의 뒷면을 보았다. 거기엔 그가 맡은 여러 직책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겉은 허허실실하면서도, 그 겉모습만 보고 방심하는 경솔한 자들에게 쓴맛을 먹이는 스타일.
얽힐 일이 없다면 별로 얽히고 싶진 않은 타입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눈으로 빠르게 직책을 쭉 읽었다. 여러 가지 직책과 담당 업무 가운데에, [Sheriff Doctor Moderator]란 글자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역시 이 사람이군.’
이 도시, 아르샤에서 내가 가장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다. 아무리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있어도 이런 중요한 생각은 마음속으로 꼭꼭 씹어 삼켜 넘긴다. 코넬리아는 재킷 안에서 자신의 명함 하나를 꺼내었다.
“코넬리아 B.입니다. 코넬리아─라고 불러주시길.”
“아무렴요, 코넬리아 씨. 아니지 미스 코니라고 부를까요? 하하!”
편리하게 웃는 낯을 유지하면서 허셜은 소녀의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능글능글 웃는 낯 그대로 입에서 “끄억” 하는 괴이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록 상대방에게서 긴장을 사지 않기 위해 느슨하게 행동하고 있어도, 허셜 또한 어엿한 의원.
사람을 치료하고 보살피는 의원이라는 직업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항상 존경과 두려움이 뒤섞인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단순한 의원의 역할이 아닌, ‘지역’과 ‘사회’를 살피고 치료하는 책무가 부여되는 자들이 있다.
치안유지(治安維持)의 의무, 즉결심판(卽決審判)의 권리.
왕실 명령으로 이 둘을 위임받는 특별신분을 일컬어 경의사(警醫師)라고 칭한다. 이들은 그 어떤 예고도 없이 벼락처럼 나타나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지역’의 병균을 말소시키고.
‘사회’의 곪은 부위를 도려내는 칼날.
어느 마을에서 경의사가 나타났다더라, 하는 뜬소문은 시시때때로 신문에 오르내린다. 그렇지만 언제나 A 마을, B 도시, C 관청 등등 알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나고, ‘자기가 사는 곳’에서는 나타나는 법이 없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
“겨, 겨겨겨, 경의사!?”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웃으세요. 활짝.”
씩 웃으면서, 코넬리아는 말했다.
“이 도시에서 ‘감찰 등록’을 하려는데─ 허가증은 언제 나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