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16세 새해(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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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런 걸 배우고 있다거나 안다는 것을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나중에 공식적으로 글을 배운 후에야 자랑할 일이다.
지금은 일단 모른척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필기체를 읽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사람마다 필체도 다르고 흘려 쓰는 정도도 달라서 곤란했다.
다행이 보고서만 그렇고 정식의 서류로 꾸밀 때는 되도록 정자체로 쓰게끔 되어 있는지 상당히 또박또박 글씨를 써놓았다.
그런 서류를 보고 단어 공부를 남들 모르게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동전주머니에서 책을 꺼내 하나씩 살펴 보았다.
존슨이 배운 문자로 이루어진 책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언어체계와 다른 형상의 문자로 기록된 책도 있다.
‘역시!’
마법책 또는 마법서라 부르고 꺼낸 책들 중에 그런 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얼른얼른 배워야겠다! 음, 남들 모르게...’
자경단 사무실에는 꽤 많은 서류와 보고서들이 있다.
남들 없을 때 몰래몰래 살펴 본다.
누가 어디서 뭘 했는지 다 기록되어 있다.
누가 언제부터 어떤 훈련을 받고 있으며 마을 바깥에서 어떤 순찰활동이 있었는지도 적어 놓았다.
변동사항이나 이상 상황 유무에 대한 것도 적혀 있다.
그렇게 모여든 보고서와 서류들은 자경단의 서기에 의해 정자체로 기록되어 있다.
또 별도의 서류로 보고되거나 보관되는 형태인 것 같았다.
‘존 포우와 에거시의 서명을 확인해봐야겠다. 나중에 분명히 필요할거야.’
자경단 입단할 때도 서류에 서명을 했다.
또 근무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도 서명을 받아둔다.
말로만 언제부터 근무했다고 해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분란의 소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입단할 때의 서류를 찾아보고 웃었다.
존 포우와 에거시의 서명과 에거시의 보고서도 살펴 보았다.
그의 필체가 중요하다.
아직은 필체를 흉내 낼 수준은 아니지만 대략 그의 필체를 눈에 익혀 두려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일상들이다.
새벽에 집에서 나와 자경단에 머물면서 훈련을 한다.
또는 정찰 임무 등을 하다가 날이 저물고 나면 퇴근하여 집으로 간다.
해가 일찍 저무는 겨울엔 다들 일찍 잠이 든다.
존 포우와 헤나와 데이지와 제티도 잠들어 있다.
일리나만 큰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자야지 아직 안 잔거야?”
“아들이 안 들어 왔는데 어떻게 자니? 배고프지?”
오후 4시쯤 되면 자경단에서 뭔가를 먹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일리나는 늘 기다렸다가 뭐라도 주며 아들이 그걸 먹는 걸 보고서야 잠이 든다.
식량이 넉넉한 편은 아니다.
늘 빠듯한 살림이다.
이번엔 곡식을 좀 넉넉하게 남겼고 따로 500자루 정도를 구입하기도 했다.
일리나는 그 곡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나는 겉으로는 아니지만 속으로는 남편 보다 큰아들 존슨을 더 챙긴다.
‘이런 착한 여자를...병신 쪼다새끼 같으니라고!’
자경단은 단순하게 창을 찌르는 훈련만 하거나 마을 바깥을 순찰하거나 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자경단에서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를 듣거나 배우는 장소이기도 하다.
훈련의 요령, 실력 향상을 위한 방법, 몬스터의 구분법 같은 것도 배운다.
몬스터가 싫어하는 풀과 좋아하는 냄새 같은 것, 몬스터의 습성이나 흔적 구분법도 배우고.
몬스터나 동물을 사냥하는 여러 가지 방법, 농사의 방법 같은 것들도 배운다.
전해 내려오는 걸 말해주거나 자기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하는 식이다.
창이나 화살을 만드는 방법도 이때 배우는 것이고 삶의 여러 가지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의 제대로 된 마을 주민으로, 자경단원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성인의 경우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도제식의 훈련을 받았다.
그 때문에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첫눈이 내리면 대부분의 움직임이 멈춰진다.
그때부터는 겨울을 견뎌내고, 먹고 사는 일에만 움직일 뿐이다.
앞으로 두세 달 정도는 이렇게 조용히, 눈 덮힌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영지는 조금 북쪽이라 첫 눈이 겨우내 녹지 않고 쌓여 있다가 봄에 가장 늦게 녹는다.
첫눈 내리기 직전까지 부지런을 떨어가면서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
첫눈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뒤늦은 비가 내릴 때도 있지만 낮 기온도 영하로 내려갈 정도가 된다면 눈이 올 확률이 훨씬 높아지는 것.
그러니 낮 기온이 영하인지, 하늘이 흐린지 등을 늘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존슨은 자경단의 남은 기간을 채우기 위해 매일 새벽에 집에서 나간다.
하루 종일 자경단에서 지내다 날이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그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반복하고 있었다.
그동안에는 존 포우가 쓰던 장비들을 사용했었다.
그것들은 작아지기도 해서 이리저리 처분해 버렸다.
영주성 제르넨에 갔을 때 장만한 것들로 무장했다.
존슨 역시 훈련으로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서 배우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고 있다.
존슨의 온 신경은 존 포우에게 향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위험한 상대는 존 포우라고. 그까짓 몬스터가 아니라.’
몬스터는 마을 밖에 있지만 존 포우는 마을 안, 집 안에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더구나 가족이 제대로 대항할 방법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이다.
물론 존슨이 보기에 마을은 좀 많이 위험한 상태다.
그가 알기로는 몬스터가 들끓는 이런 마을이라면 당연히 울타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 마을엔 제대로 된 울타리가 없다.
왜냐?
지지난 해에 산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불타버렸단다.
흔적만 남은 곳에다가 대충 얽기설기 엮어 둔 상태다.
존슨 생각에는 그것 먼저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을의 의견이 여럿으로 갈렸다.
제대로 힘을 합쳐 만들어야 할 목책을 만들 수가 없었단다.
사람들 생각엔 반대하는 놈들에게 어부지리를 주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목책을 만들자는 측에서 아무리 소리를 높여도 반대파에서 협조를 안하겠다면 한쪽이 일방적으로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두 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목책의 설치에 대해서 무려 다섯 개로 파가 나뉘어서 의견 대립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아직 울타리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존슨의 집은 특히 위험하다.
마을에서도 바깥쪽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더 위험한 것은 집 동쪽의 농토 밖의 숲이었다.
마을 주변이 다 숲이긴 하지만 특히 동쪽의 그 숲은 예전부터 많은 동물과 몬스터가 서식하던 곳이라고 했다.
토벌해도 금방 몬스터나 동물이 꼬인다고 했다.
존슨은 그 말을 들을 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암염이다.
채취할 정도인지는 모른다.
바위에 암염성분이 섞여 있으면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꼬인다고 했다.
채취할 수준이었다면 마을 주민들 중에서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아니니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좁은 굴 속 같은 곳에 암염의 광맥이 드러나서 그곳에서 소금이 녹아 나오면서 동물이 모여드는 것일 수도 있다.
가보지 않았으니 알 도리는 없지만 존슨은 거의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몬스터나 동물이 모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장진오의 기억에 암염이 발견되면 그 마을은 그때부터 노예나 다름 없이 변한다고 했다.
영주의 명령에 따라 소금 광산에서 죽을 때까지 소금 캐는 강제 노역을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아니라 해도 이 마을에, 존슨의 가정에 도움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소금광산노예가 되기 싫다면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설마 에거시의 파란소금이 이 마을 근처에서 발견된 소금은 아니겠지? 그건 필사적으로 막아야 할 일인데...’
소름이 오싹 했다.
이십 일 간의 훈련과 근무를 마치니 완연한 겨울이었다.
존 포우는 그동안 두 번이나 술에 취해서 난동을 부렸다고 했다.
낮에 그랬으니 존슨이 알지도 못했고 나설 수도 없었다.
일리나와 헤나와 데이지와 제티가 그걸 감당해야 했다.
집에 돌아온 존슨이 화를 냈지만 존 포우는 잠들었다.
일리나나 헤나나 데이지와 제티의 얼굴이나 몸의 멍자국은 그대로 남았다.
‘자는 놈을 죽여 버릴까?’
그런 생각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여러 번 했지만 완전 범죄를 저지를 자신이 없었다.
어찌되었건 존슨은 훈련과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에 파묻혀 지내는 동안 묵은 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되었다.
그러나 존슨은 바뀐 것이 별로 없었다.
여전히 일을 해야 하고 여전히 가족을 돌봐야 한다.
존 포우는 겨울엔 손가락 하나 까닥거리는 것도 싫어한다.
미진한 일을 처리하고 나니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존슨은 창고 뒤쪽의 공터에 네 개의 구멍을 팠다.
얼어 있긴 하지만 아직 깊이까지 얼어 있는 것은 아니다.
창고 벽 쪽에 붙여서 두 개, 거기에서 뚝 띄어서 두 개를 파고 장작을 하기 위해 베어 온 나무 중에서 가장 긴 것들을 골랐다.
“그건 뭔데?”
존 포우가 어느 날 보고 물었다.
“작업장을 만드는 거야.”
“작업장? 무슨 작업장?”
“눈이 와서 장작을 팰 수도 없고...”
“이런 미친 새끼가. 그렇다고 건물을 짓는단 말이야? 눈 그친 맑은 날 하면 될 일을?”
“그 일만 해? 겨울에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갖은 욕을 해대는 걸 들은 척도 안했더니 기둥으로 박아 놓은 나무를 어느 날 보니 도끼로 찍어 잘라 놓았다.
“하아, 씨팔!”
잘려진 나무를 보고 한 숨을 내쉬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훼방을 놓는 게 이건 가족이 아니라 원수 같았다.
‘씨팔, 도끼로 가서 찍어 버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끼를 들고 집안에 들어가니 존 포우가 없었다.
“어디 갔어요?”
“누구?”
“하아, 씨팔! 누구긴 누구겠어?”
어리둥절한 표정의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대답해 주었다.
“자경단 훈련 받으러 갔는데?”
“에에? 지난 달에 갔다 왔잖아요?”
“올해는 일찍 다 받아버리겠다는 걸?”
일을 저질러 놓고 존슨을 피해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자경단 숙소에 머문대?”
“그래.”
내내 집으로 안 돌아오고 거기 머물 것이다.
그러다가 화가 풀렸을 때쯤 와서 도리어 큰 소리를 치려는 속셈이었다.
존슨은 기다렸다.
여러 날이 지나고 일리나가 존 포우의 옷가지를 챙겼다.
“데이지, 데이지!”
일리나가 데이지를 불렀다.
“데이지는 왜?”
“존에게 옷 가져다 주려고.”
“제가 가지요.”
“아니야. 존이 데이지에게 가져다 달라고 했어.”
“언제?”
“저번에 떠나기 전에.”
‘하아, 씨팔 새끼!’
속으로 욕이 나왔다.
“그랬군. 알았어.”
아직 존슨의 화가 풀리지 않았을 것을 예상하고 데이지에게 심부름을 시키려는 것이다.
강제로 자기가 갖다 주겠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존 포우가 자경단에 있는 한 존슨이 가서 지랄을 떨기는 어려웠다.
존슨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