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15세가을(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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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나에게는 몇 가지 말로 일러두었다.
“뭐, 드러내놓고 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은 아니야.”
“으음...”
일리나는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 했다.
사춘기의 아들이 밤마다 집을 비우고 나가 아주 늦게 들어온다는 데 무신경하게 놔둘 부모는 없다.
존 포우를 제외한다면.
존 포우도 말은 한다.
욕을 해가면서 애새끼가 정신이 나가서 그런다거나 나쁜 짓만 골라서 한다고 욕을 해댄다.
나쁜 새끼들과 어울려 못된 짓거리를 한다거나 해가면서.
그런 소리를 듣기는 싫다.
이 고생하는 것은 순전히 존 포우 때문이다.
존 포우가 에거시 같은 음흉하고 수상한 인간과 어울리지 않았다면 존슨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마음속의 불길함 때문이다.
매일 추운 밖에서 덜덜 떨면서 남의 집 창밑에서 쪼그리고 앉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다 집어 치우고 따뜻한 침대에서 누워 편히 자고 싶은 존슨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헛탕이다.
몇 시간씩 술집이나 도박장 창밑에서 쪼그려 앉아 남의 대화를 엿들었다.
때로는 에거시 씨 집의 침실 창밖에서, 어떨 땐 촌장의 침실 창 밑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게 가서 들을 때마다 뭔가 영양가 있는 얘기를 하면 좋겠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의미없는 일상의 대화 뿐이다.
다만 어쩌다 한 번, 운이 좋을 때가 있다.
그들의 집에서 만날 때는 아니다.
누가 다른 누구의 집을 방문하거나 둘 또는 셋이 밖에서 따로 만날 때 의미가 있는 대화가 오가기도 한다.
물론 존슨은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들도 있다.
대개는 존슨과는 전혀 상관없는 마을의 얘기들이거나 그들끼리 뭔가를 작당하는 얘기들이다.
마을의 유지들이고 부자라 해도 그들은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한다.
99마리 양을 가진 놈이 1마리 양 가진 것을 빼앗아 100마리를 채우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게 정말일까?”
에거시와 만나기로 한 로젠씨, 커틀러씨 등이 독한 술을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무슨 얘기?”
“푸른 소금 말이야.”
“아아, 그거야 당연히 헛소리지.”
“그러면?”
“어...말해도 되나?”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를?”
“푸른소금 말이야.”
“으음, 그건 그만두기로 한 거 아니었나?”
이 사람 저 사람이 끼어들며 얘기가 복잡해졌다.
대충 듣기로는 푸른 소금을 소량 들여왔는데 그걸 판매하기는 어렵다는 얘기였다.
에거시씨의 제안으로 진행되던 일이다.
굳이 영주부의 공식 소금인 핑크소금을 대신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이었다.
‘도대체 푸른 소금이 뭐지?’
마을의 모든 가정은 영주부에서 공식적으로 판매하는 핑크 소금을 사용한다.
그래서 이쪽 세상의 소금은 핑크색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소금의 색은 여러가지인 것 같았다.
‘암염이 흰색이나 핑크만 있는게 아니었나?’
존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 소금 얘기를 하다가 이내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누군가가 예전에 짝사랑한 소녀에 대한 얘기였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없는 그 누군가다.
다들 킥킥거리며 웃었다.
“야야, 그때도 그 녀석은 유부남이었거든! 유부남 주제에 어린 소녀한테 마음이 빼앗겨서는! 근데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그야 모르지. 근데 사실은 그게 아니래. 소녀가 아니라 유부녀였다는 데?”
“유부녀는 무슨! 열넷인가 열 다섯인가 그랬다지 않아?”
대상인 여자에 대해서도 설왕설래하니 실제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존슨은 피부에 소름살이 확 돋았다.
‘이건...설마...’
막장드라마 또는 불륜 드라마의 장면이 휘리릭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 없는 에거시의 아내는 튼튼하고 억센 여자다.
가정을 잘 꾸려가기는 하지만 애교 있고 다정한 그런 여자는 아니다.
처녀적이야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생김새며 말투며 행동으로 봐서는 예전에도 비슷했을 것 같다.
씩씩하고 튼튼하고.
에거시는 아주 일찍 결혼했다.
이곳이라고 모두 연애결혼 하거나 모두 중매 결혼 하는 것은 아니다.
연애 결혼도 있겠지만 유지들 집안 간에는 중매결혼이나 정략 결혼도 드물지 않다.
존슨은 창밑에 쭈그리고 앉아 어두운 색의 천을 뒤집어 쓴 채로 궁리를 해보았다.
존슨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흘려 들어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소한 것도 다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은 장진오가 존슨의 몸에서 깨어나면서부터다.
장진오에 대한 것은 많이 기억하지 못한다.
오히려 차차 잊어가는 중이다.
그에 반해 존슨에 대한 기억은 아주 세밀하고 사소한 것까지도 다 기억난다.
아주 어릴 때의 사소한 것들까지도.
존슨이 흘려 들었던 에거시와 그 부인에 대한 것들.
물론 존슨이 태어났을 땐 이미 에거시는 결혼한지 오래되었고 자식도 여럿이 있었다.
존슨보다 나이가 많은 에거시의 자식들이 서너 명은 될 거다.
‘정확히는 넷.’
존슨은 계속 궁리를 하면서도 한쪽 귀로는 창 안쪽 사람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토막토막 들려오는 단어들.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는 내용들.
마을의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한 험담, 비방, 소문들.
지금 촌장에 대한 욕과 반발, 이전 촌장에 대한 비방거리들.
자기들끼리 서로 디스를 해대다가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문득 이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존슨이 있는 쪽은 아니다.
현관문쪽이다.
에거시였다.
딱딱하고 무뚝뚝한 에거시답게 그가 오자 갑자기 사람들의 대화가 싹 멈추었다.
곧 반 공식적인 얘기가 오고간다.
친밀감이 사라지고 건조한 내용이 대화들.
좀 전에 떠들어대며 누군가를 흉보거나 헐뜯던 그런 내용이 아니다.
촌장 반대파벌들의 모임이 분명했다.
촌장의 실정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를 몰아내자는 의견도 있었다.
다음 촌장을 누구로 세울 건지에 대해서 묻기도 했지만 결론은 나지 않는 얘기다.
‘에거시 놈이 촌장이 되려는 걸까?’
그런 비슷한 얘기는 없다.
그런데도 왠지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에거시 씨를 열심히 따라 다니는 존 포우지만 이런 자리에 끼지 못한다.
마을의 유지도 아니거니와 성품 자체가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못한다.
그런데 문득 존 포우 얘기가 나온다.
“촌장의 땅을 얻어 소작하는 자 중에 존 포우라는 자가 있어. 촌장의 말에 찍소리도 못하는 버러지 같은 놈이지.”
“으음, 존 포우.”
“언제부터인가 자꾸만 눈에 거슬리네? 촌장한테 알랑방귀 뀌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서도 나한테 와서는 또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헤실거리며 손바닥을 비비고.”
“그 새끼는 예전부터 그랬어.”
잠깐 존 포우에 대한 욕과 비난이 이어졌다.
“당장 촌장을 어떻게 하기는 어려우니 그에게 알랑거리는 새끼들을 어떻게 처리해서 본 때를 보여주는 건 어때?”
‘이건 누구 목소리지? 잘 모르겠네.’
“당장은 어려워.”
에거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아부를 떨어대니 일단 내가 이리저리 엮어보지. 멍청한 놈이라 말로 잘 달래면 제 죽을지도 모르고 달려들거야.”
“그런 놈이라면 함부로 떠들어 댈 수도 있잖아?”
“그러지 못하도록 해야지. 그 새끼 약점을 알거든. 그걸로 협박해 입을 다물도록 하고 그 새끼는 위험한 곳으로 처밀어 넣고.”
“흐흐, 재미 있겠네.”
“그럴려면 몇 가지 필요한 게 있어. 그 새끼가 꼼짝 못하게 얽혀들도록.”
에거시 새끼의 차갑고 단호한 말에 소름이 오싹 끼친다.
“몇 가지로 얽어두면 그 중 하나는 걸리겠지. 운이 좋으면 쉬운 쪽으로 걸려서 목숨은 건지는 거고. 그게 아니면 목숨도 날리고 그 새끼 재산과 가족도 다 날아가는 거고.”
“그 병신 새끼, 술 취해 지랄 떠는 거 정말 꼴 보기 싫었는데. 확 쫒아내는게 낫지 않아?”
“그런 거지새끼는 절대로 안 쫒겨나려고 발버둥친다니까.”
“그 꼴 보는 게 더 재미있지 않아?”
“그것도 그렇지만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서서히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게 더 재미있지.”
“큭큭큭, 그건 또 그렇지.”
듣다 보니 슬그머니 화가 난다.
존 포우 하나만 어쩌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집을 싹 다 뭉개려는 수작이다.
그것도 에거시 새끼가 주도해서.
“어떻게 하려고?”
누군가가 끼어들어 물었다.
“뭐 슬슬 달래서...음, 그 새끼 땅이 조금 있잖아? 그걸 팔도록 해야지. 그리고 그 판돈을 싹 털어내고.”
“큭큭.”
“하하.”
“그런 다음에 그놈은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빚을 잔뜩 지워놓으면 되겠지.”
“하하,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드는 거로구나.”
“좋지, 좋아.”
‘이 새끼들이!’
“씨팔, 아예 빚은 잔뜩 지워서 싹 다 노예로 만들어 버려. 그 아들 새끼 요즘 덩치 커졌다고 눈을 아래로 쓱 깔고 다니더라?”
누군가 존슨 얘기를 했다.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케머시 잔튼인 것 같다.
‘하아, 잔튼...씨팔!’
케머시 잔튼의 아들인 조니 잔튼 놈을 지난해인가 두들겨 패놓았다.
조니 놈이 워낙 잘못한데다 증인도 많아 끽소리도 하지 못하고 존슨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케머시 놈이 그걸 기억하고 해꼬지를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새끼들, 이런 얘기를 이렇게 주의도 않고 떠들어대다니!
허긴, 이 추운 계절에 이들의 얘기를 엿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봐야 이 집 식구 중의 누구인데, 이 집 식구 역시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다.
촌장과는 하여간 사이가 안 좋은 놈들뿐이다.
그러니 이 집에서 만난 것이겠지.
“그래, 그 새끼 처와 새끼들 갈갈이 찢어 여러 곳에 나누고 아예 영주부에 팔기도 하고 그러자고!”
술이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목소리로 케머시 잔튼 놈이 큰소리 쳤다.
“나도 한 몫 돕지.”
“그럴 것도 없어. 그런 하찮은 새끼 밟는데 무슨!”
에거시가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술자리를 한동안 이어졌다.
특별한 의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저 모여서 술 마시 불평불만 토해내고 이런저런 가십거리를 술 안주 삼아 떠드는 그런 자리인 모양이다.
그런 자리에 하필이면 존 포우가 안주거리가 되어 집안 다 말아먹게 생겼다.
‘하아, 그 새끼, 도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얼마나 병신처럼 보였으면 벌레 취급을 받는 거지? 그나저나 왜 에거시 새끼는 존 포우를 노리는 걸까? 촌장 따까리라 할만한 놈도 아닌데? 그렇다고 엄청나게 뭔가 밉보인 것도 아니고. 생각할수록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 보니 뭔가 내가 모르는 내막이 있는 거지?’
요 근래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면 뭔가 존슨이 모르는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아니면 하여간 그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아직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런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
이 말은 지금의 이 사정도 확실히 뭔가 내막이 있고 음모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 후로는 잡다한 얘기들, 존슨과 전혀 관련이 없는 얘기들이 오고갔다.
한참 지나 에거시가 먼저 자리를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