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5세늦여름-제르넨(8)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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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말하지 않고 버텨볼 생각이다.
언젠가는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특히 존 포우 생각을 하면 절대로 말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까, 영주의 세리라는 새끼들도 이런 거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맞아, 그때 누가 그랬지? 모젤 형이 그랬던가? 마법 물품이라고 했으니까...그럴 가능성이 많구나. 어쩌면 이것도 그런 용도였을까? 영지의 세금을, 아니면 큰 상단에서 사용한...그럴 가능성도 있겠구나! 아니면 마법사가? 오오, 그것도 그럴 듯하다. 가만!’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난 존슨은 동전주머니의 뚜껑을 열고 손을 넣으며 나직하게 외쳤다.
“마법책.”
책이 손에 잡혔다.
“크으! 마법 책이라니!”
기뻤다.
그러나 책을 펼쳐보고는 좌절했다.
존슨은 글을 모른다.
이 글씨가 보통 사용하는 제국어인지 아니면 마법사들이 배우고 사용하는 마법문자인지도 모른다.
다만 마법책이라 했으니 마법책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일단 글을 배워야겠다. 여기 글이라도 완벽하게 배워야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겠는걸?”
다 도로 집어넣고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이곳에 온지 7개월 만에 이런 걸 얻게 되다니!”
얻기는 진즉에 얻은 거지만 오늘 확인했으니 오늘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쪽 세상의 이런 시골 마을에서 글을 배우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은 거의 불가능했다.
마을 주민은 마을에 거주하는 인원과 마을 밖의 주민을 모두 합쳐 약 380가구 정도 된다.
한 가구당 대충 7~8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으니 인구 수는 대략 2800명 전후 정도다.
그 중에 글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100명 내외다.
마을의 유지들과 그의 아들들이다.
존 포우는 마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유지에 속해있지 않다.
그저 평범한 농부일 뿐이다.
오히려 하층민에 가깝다.
글을 아는 이들이 영주부와 교류를 한다.
다른 마을과도 서신을 이용해 교류를 하는 것이다.
글을 모르면 마을의 중요한 행사에 끼워주지를 않는다.
즉 글을 알아야 하는 것은 최소한의 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영주부와는 무조건 서류가 오가야 한다.
이웃 마을에도 말로만 뭔가를 전하기 보다는 글로 적어 보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물론 말로도 전하지만.
‘마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출세를 위해서라도 글은 알아야겠다. 이거 여태 괜찮았는데, 글을 모르니 갑자기 불편해지네?’
생각해보니 존슨의 몸으로 깨어난 이후 글씨를 몰라 불편한 적은 없었다.
얼마 전 영주부에 갔을 때에도 상점의 간판은 모두 그림이었지 글씨로 쓰인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굳이 배울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디서 누구에게 글을 배워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촌장은 부드럽게 잘 대해주기는 하지만 어쩐지 어렵다.
거절할 가능성도 높다.
거의 3000명의 마을 주민을 돌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글을 배우겠다고 나서면, 기특하게 생각해서 소개해주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아주 사소한 것도 대단한 기술인 것처럼 여겨 아무에게나 가르쳐주지 않는 풍토가 있기 때문이다.
‘음, 모젤 형의 아버지인 레먼드씨라면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면 헤럴드씨? 음, 이 문제는 일리나와 의논을 해보야겠구나.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에 대한 어떤 영향력 같은 것은 존 포우 보다는 일리나가 훨씬 더 강력한 것 같아. 그럴 이유가 있나?’
물론 그럴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긴 하다.
존 포우의 집안은 가족이나 구성원의 수가 많지 않다.
친척은 고작해야 대여섯 가구 정도나 될까?
게다가 전부 농부들인데 자기 농토만으로 농사를 짓는 이는 없다.
자기 농토 일부에 나머지는 소작을 얻어 농사를 짓는다.
존 포우와 마찬가지로.
그에 반해 일리나의 집안은 우선 그 친족의 수가 많다.
이래저래 얽혀 있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마을 주민의 1/5은 그녀의 집안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마을의 유력자 또는 유지인 경우가 많다.
당장 마을의 촌장을 돕고 있는 몇 명의 유지들 중에 최소한 셋 이상은 그녀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
친척 오빠라거나 친척 아저씨라거나.
그 안에서 일리나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일리나의 활약이 꽤 잘 먹힌다.
그러니까 부자집 딸내미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과 결혼한 그런 형태였다.
일리나의 집, 그러니까 일리나의 친정 엄마이고 존슨의 외할머니는 마가렛이다.
마을 반대편에 살고 있는데 존 포우는 그 집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일리나의 친정 아버지, 즉 존슨의 외할아버지는 죽었다.
그렇지만 그 집의 가장은 큰 아들이 아니라 마가렛이었다.
존슨의 큰 외삼촌은 착한 사람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아주 유능한 그런 사람은 아니다.
마음씨 좋은 이웃 농부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성격이 유약하다는 소리도 있었다.
둘째 외삼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마가렛이 아직 그 집의 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마가렛이라고 원래 강한 성격은 아닐 것이다.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유약하고 경험 적은 아들들과는 다른가 보다.
‘마가렛은 일리나의 현재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사위인 존 포우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존슨의 기억에 마가렛의 집에 가 본 것은 굉장히 오래전, 존슨이 어릴 때였다.
그 후로는 갔었던 기억이 없었다.
‘왜 교류하지 않는 걸까? 같은 마을에 사는데?’
일리나에게 물으면 되겠지만 어쩐지 묻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존 포우가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리나가 그런 말을 아들인 존슨에게 대놓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 앞에서 남편을 흉보는 일이니까.
사실 악착같이 물어 볼 정도로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장진오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존슨은 아예 별 관심도 없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여기까지 이른 것일 뿐이다.
나중에 혹시 기회가 닿는다면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였다.
일단 마법서를 발견한 것은 좋은 징조다.
마법사는 현대 한국의 용, 천사, 귀신, 유령, 신기루 같은 것이나 비슷하다.
본 사람도 있다고들 말하는데 아무도 직접 본 사람은 없다.
주변의 누군가가 보았다더라, 하는 수준이다.
이곳의 마법사 역시 그런 존재다.
마법사가 있다더라, 마법을 부리는 걸 보았다더라, 말하지만 실제로 마법사를 본 사람은 없다.
아니, 있다.
있긴 있는데 짝퉁 마법사다.
그건 영주부에서도 번듯하게 상점을 운영하는 약초사 또는 치료사라 부르는 자들이다.
그들도 마법사라고 말한다.
치료 마법사.
실제로 치료 마법을 펼칠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무에게나 치료 마법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영주라거나 하여간 많은 돈을 주는 사람에게 치료 마법을 해준단다.
대부분의 환자인 평민들에게는 약초로 만든 약을 줄 뿐이다.
그조차도 절대 싸지 않다.
아주 비싸다.
효과는 고만고만 하다.
잘 들을 때도 있지만 전혀 듣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마법을 배우면서 치료 마법도 배운다면 나도 도시에서 치료 마법사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존슨은 별로 그에 대한 지식이 없다.
장진오는 시골 출신으로 약초에 대해서도 좀 알고 있었다.
민간처방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약간 알고 있었다.
그 효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조금 더 보강하면 되는 것 아닐까?’
어차피 심각한 상황은 아니니 편하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 자신이 진짜 약초치료사나 마법치료사가 될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한국에서도 의학을 제대로 하려면 정규 과정만 6년에다 그 후로도 거의 10년 가까이를 수련 과정을 거쳐 가면서 교수들의 심부름 해가며 노력해야 하잖아? 여기라고 다르겠어? 그러니 최소한 10년은 애써야 한다는 소리지.’
물론 무슨 일이든지 10년은 노력을 해야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기는 하다.
그러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농사일을 돕기 시작한지 10여 년 간 경험 해 온 농사를 계속 짓는게 낫다.
뭔가 새로운 걸 배우기 위해 또 다시 10년을 투자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이나 직업이 엄청나게 좋은 것이 아니라면.
‘돈을 잘 벌고 명성도 얻으니 의사가 좋긴 좋지. 그렇지만 하루 종일 병원에 앉아 환자만 본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직장 생활을 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루 종일 한 곳에 앉아 정해진 일만 한다는 것.
얼마나 지루하고 끔찍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밤이 늦어서야 잠이 들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때문이다.
이런 신기한 마법 물품에다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니!
‘가만! 이 주머니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다른 물건들과 공통점이 있지 않았나?’
그렇다.
이 주머니에 찍혀 있는 것과 똑같은 검은 점이 찍혀 있었다.
존슨의 피를 빨아들인 주머니의 점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다른 물건, 즉 단검, 구두, 벨트 등을 꺼내 놓고 점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뭔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같은 것 같기도 하고...돋보기 같은게 있다면 좋을텐데...’
호롱의 심지를 살짝 올려 밝게 해서 살펴 보았다.
기름 많이 든다고 지랄하며 호롱도 빼앗으려던 존 포우를 죽일까 말까 망설였었다.
그 사이에 일리나가 얼른 호롱을 존슨에게 쥐어주며 기름 아껴서 쓰라고 말해서 그냥 넘어갔었다.
사사건건 존 포우가 발을 걸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모라는 새끼가 왜 그 모양이지?’
생각할수록 이상한 놈이었다.
몇 번이고 다시 확인을 해 봤다.
주머니의 흑점과 다른 물건의 흑점은 조금 다르다.
다른 물건들의 흑점들끼리는 똑같아 보인다.
존슨은 그걸 양손에 들고 무릎 위에 펼쳐 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이거...주머니는 내 피를 머금어서 조금 달라진 걸까? 그래서 다른 것들끼리는 같아 보이는데 주머니와는 달라 보이는 걸까?”
맞을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럴 땐 하나 해보는 거지.”
가장 예리한 칼로 긋는다 해도 자기 살을 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고도 아니고 자진해서 자기 피부에 칼집을 내는데 손이 떨리지 않을 리가 있나?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칼로 베었다.
주르륵 흐르는 피를 앞에 나란히 놓아둔 물건들의 흑점 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하나같이 흑점들이 존슨의 피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피가 사라졌다.
흑점 옆으로 새어나가거나 흘러나간 피가 없다.
‘확실한가보다!’
피가 옆으로 흐를 수도 있고 번지거나 묻을 수도 있는 법인데 하나같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하! 하! 하!”
도대체 어떤 마법 물품으로 변할지 기대가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