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15세늦여름-제르넨(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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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은 왜 그 혼인을 허락했을까요?”
“그러게. 그것에 대해서는 여태 아무 말 하지 않지?”
“말 하겠어요? 그럭저럭 살고 있는 딸 부부에 대해서 말하는 걸 좋아하겠어요?”
마가렛은 일리나의 엄마, 즉 존슨의 외할머니다.
어려서는 몇 번 왕래를 했는데 커서는 도통 가보지 못했다.
마을에서 서로 반대편에 살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존 포우와 마가렛이 아주 사이가 좋지 않다.
“하여간 남자들이라니! 유부남이 유부녀를 좋아해서 어쩌자는 건지!”
버틀러 부인이 푸념을 하듯 말하자 남편이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책이 없는 일이니 뭐라 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존 포우가 워낙 개차반이라 함부로 하지 않아 다행이지.”
“요즘 존 포우가 부단장네 드나드는 거 알아요?”
“부단장? 에거시?”
“그래요.”
“왜?”
“그야 모르죠. 그 둘이 접점이라도 있나?”
“접점?”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진짜 그럴까?”
“알 수 없죠.”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도대체 무슨 얘기지?’
“에이, 아니겠지. 에거시의 부인과...”
“그만 해요.”
“어...그래서 촌장하고?”
“그만하라구요!”
버틀러 부인이 파르르 화를 냈다.
그런데도 버틀러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에거시 부인? 촌장?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일리나 얘길하다가 갑자기 에거시 얘기가 나온 것도 황당한 일인데...’
내막을 모르니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서둘러요.”
버틀러 부인이 냉정해진 목소리로 남편을 닥달했다.
“어어, 다 했어. 자, 여기.”
“들어 봐요.”
곧 버틀러씨와 부인이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꾸리다 보니 좀 커졌네. 나중에 보내줄게.”
버틀러 부인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부인. 어어, 로프를 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버틀러 씨가 재빨리 가서 로프를 가져왔다.
그걸로 예전 조선의 등짐 장수들이 등짐을 메는 것처럼 상자를 등에 지고 X자가 되도록 몸과 묶었다.
“됐습니다. 가볼게요.”
“어어, 미안해서 어쩌지?”
“괜찮습니다, 부인. 버틀러씨 안녕히 계세요.”
“어, 그래. 조심해서 가거라.”
오는 동안 궁리를 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촌장, 에거시, 에거시 부인....모르겠네.’
존슨은 자기네 집에 있던 양모와 가죽을 모두 챙겼다.
그건 물론이고 일리나의 인맥을 이용했다.
이웃한 농가에 보관 중이던 양모와 가죽을 모조리 헐값에 사들였다.
가격만 정하고 외상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가서 팔아 주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해서는 수수료만 받을 수 있다.
그 보다는 적당한 가격에 구입하는 걸로 했다.
팔아서 대금을 치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존슨이 가진 돈의 대부분은 물론이고 일리나를 통해 보리 자루들이 건네졌다.
존슨의 집에는 아직 보리의 여유가 있었다.
존슨과 일리나가 감춰두었던 것의 일부였다.
그렇지 못한 농가들도 많았다.
살림이 늘 빠듯하게 돌아가는 농가에서는 비록 보릿고개니 밀 고개라는 말은 없다.
그렇지만 수확 직전에는 정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야 했다.
그럴 때 보리 한 자루, 밀 한 자루는 정말 가뭄 끝의 단비나 마찬가지다.
지금도 거의 그 시기의 시작이었다.
늦봄에 수확한 보리는 거의 다 떨어져 간다.
남은 것은 가축의 사료용으로 비축해 놓은 콩, 호밀, 귀리 같은 것들뿐이다.
그 마저도 상해 있거나 벌레가 생긴 것들이 많다.
습하고 더운 여름을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도정하지 않은 통보리 한두 자루는 정말 소중한 것이다.
15세늦여름-제르넨
다음날 새벽 존슨은 전날 미리 챙겨둔 가방을 가로질러 멨다.
현관 앞에 놔두었던 나무 상자를 마차에 올려 실었다.
상자 안에는 옷가지, 침구 대용으로 쓸 노루 가죽, 양모피, 담요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식사 준비는 해준다지만 만에 하나 필요할까 싶어 준비한 치즈, 햄, 소시지 같은 것들이다.
일리나가 챙겨준 아침을 먹고 점심에 먹을 빵까지 받았다.
그레이펄이라 불리는 회색의 새로 얻은 암말에게 마차를 연결했다.
존슨이 일리나에게만 인사하고 떠났을 때에도 존 포우는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저번에 갔을 때 자기 것을 자기가 해먹어야 했던 존 포우였다.
머저리 같은 존슨 놈이 밥 준비도 하지 않고 떠났다고 속으로 희희낙락했다.
그동안 잘 길들인 신발을 신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니 많이 걸을 일은 없을 것 같긴 했지만.
모젤 형도 이번 호위대에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 잘 웃고 쾌활하던 모젤은 투덜거리기만 했다.
최근에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자기가 돌봐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렇지만 아버지 레먼드 씨에게 욕만 먹고 결국은 포함된 것이다.
레먼드씨나 버틀러씨 같은 마을 유지의 경우에는 자기가 손해 보더라도 아들 중의 하나를 포함시키는 것에 그다지 꺼리지 않았다.
마을에서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꼭 땅이나 돈만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럴 때라도 자기 가족 중의 누군가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들이 쌓여서 영향력이 되는 것이다.
마을의 유지들 중에서 촌장도 나오고 부촌장이나 자경단장이나 무슨, 무슨 감투들을 해먹는 것이다.
존슨은 촌장의 지원에 따라 원래의 사절단에 포함 시켰다.
오가는 동안 함께 식사하고 잠자리도 돌봐주라고 명령해두었다.
호위대장 격인 자경단의 부단장 헤럴드씨나 사절단 대표인 부촌장 데이비드씨와 함께 움직이라 했다.
불편할 법도 한데 존슨은 개의치 않았다.
상관을 모시고 수행하는 것쯤이야 직장 생활하는 동안에도 많이 해봤다.
사업을 시작하고도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관련 공무원이나 무슨 국장이니, 무슨 위원장이니 하는 것들 모시고 식당이나 술집이나 골프장 순회도 수없이 해봤다.
헤럴드씨는 존 포우 보다 나이가 많은 마을 유지 중의 하나였다.
말이 별로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애들이 묻는데 입 딱 다물고 모른 척하는 그런 성격의 사람은 아니다.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존슨이 뭔가를 궁금해 하며 물으면 아주 상세히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하면 대답을 해주었다.
출발 전날에도 찾아가 자문을 구하니 세세하게 일러 주었다.
그 덕에 필요 없는 짐은 빼고 필요한 짐을 챙겼다.
또 일리나와 의논하여 양모와 양가죽, 염소 가죽, 쇠가죽 같은 것들을 되도록 많이 챙겼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계절이지만 가죽을 다루는 무두장이들은 벌써부터 겨울을 대비하여 여러가지 준비를 한다고 했다.
이때가 모피나 가죽이 가장 가격이 좋을 때라고 했다.
가축을 도축할 시기가 아닌데다 밀 수확을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할 때였다.
농가에서 굳이 장에 나와 가죽을 처분하려 들지 않는다고 했다.
밀 수확이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 도축을 시작한다.
그 때는 가죽과 양모가 쏱아질 듯이 많이 출하된다고 했다.
그러면 가격이 폭락하고 무두장이들은 헐값에 사들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미 겨울 작업은 다 끝나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
어차피 가죽이나 양모는 어느 집이나 조금씩 있게 마련이다.
본인들이 사용하기도 하고 방한을 위해 사용하거나 모직을 짜기 위해 조금씩 여분을 두기도 하는 것이다.
그걸 싹 쓸어 모은 것이다.
존슨은 그것들을 가죽은 가죽대로 차곡차곡 펼쳐 쌓았다.
양모는 그것대로 따로 상자나 큰 자루에 꽉꽉 눌러 담았다.
그걸 마차에 싣고 보릿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다.
누가 보지 못하게 가려둔 것이다.
누군가 물으면 촌장님 물건이라고만 말했다.
‘어어, 생각이 날 듯 말듯한데...양털 말고 그 뭐더라...염소털이었나? 그런 걸로 펠트 만든다고 했는데...’
기억이 가물거렸다.
장진오가 직접 만들어 본 것도 아니다.
어디선가 들은 얘기 거나 본 것일 수도 있다.
고개를 흔들었다.
금방 생각나지 않더라도 계기가 있다면 또 금방 생각나기도 하니까.
나중에라도 생각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진오가 존슨으로 깨어난 이후 하게 된 첫 여행은 그가 듣고 각오한 그대로였다.
지루하고 지치고 힘들고 어렵고 고단한 여정이다.
다만 직접 밥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다.
잠자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다.
나머지는 다 똑같고 이전의 기억이나 각오한 것과 똑같다.
새벽에 일어나 준비해서 출발하고 하루 종일 걷고 또 걷다가 마을에 들어가 머문다.
마차를 가져가서 그나마 덜 걷는 것일뿐이지, 덜컹거리는 마차를 오래타서 허리와 등이 몹시 아팠다.
씻고 밥 먹고 잠들기 바쁘다.
그런데다 땀은 지랄같이 많이 난다.
벌레는 말도 못하게 많아서 진저리를 친다.
어른들은 그런 와중에도 머무는 그 마을의 유지들과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한다.
그렇게 안면을 트고 친해놓는 것이 나중을 위해, 서로를 위해서 좋은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또 마을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그들에게 소개하고 인사를 시키기도 한다.
그래야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흘러도 마을 간의 친교가 유지되고 유대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존슨도 그래서 피곤해서 일찍 쉬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자리에 불려 갔다.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전날과 똑같이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잠들었던 그곳을 떠나 새로운 길을 하루 종일 걸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 마을과 마을이 연결된 도로를 따라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결국에는 영주의 성인 제르넨 성에 도착했다.
영지의 이름은 다스리는 영주의 가문이 바뀌면 쉽게 바뀐다.
영주가 바뀌는 경우는 거의 드물지만.
도시 이름도 그렇지만 대개 도시 이름은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제르넨 시, 또는 제르넨 성이라 불리는 도시는 꽤나 오래된 도시다.
그에 반해 영지는 오스왈드 밀러디 백작이 영주인데 그래서인지 밀러디 영지라 불린다.
이 이름으로 불린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예전엔 베르얀 영지라고 했다던가?
밀러디 백작 가문이 이 영지의 영주가 된 것이 30여 년 전이라고 들었다.
자경단의 부단장인 헤럴드 씨는 마을 대표 격인 부촌장 데이비드 씨 등과 함께 제르넨으로 향했다.
인사도 해야하며 보고도 하고 마을의 문제도 해결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슨 역시 당장은 그저 성의 시장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워야 했다.
헤럴드 씨가 영주성 일이 끝나면 거래처를 소개시켜 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존슨이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상점들과 시장을 두루 구경하며 가격을 알아보았다.
눈으로는 물건의 품질을 살펴 보며 지냈다.
오랫동안 사업을 했던 장진오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건을 보고 품질과 가격을 비교해보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또 상인의 성향이 어떤지도 눈여겨 봐두었다.
큰 상회도 있겠지만 작은 상회도 수없이 많다.
백작의 영지뿐만 아니라 인근의 작은 영지에서도 많은 사람이 이곳을 오간다.
인근 지방의 물류 허브 역할을 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