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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군주 이성계-32화 (32/33)
  • 032. 하로산또와 궤네깃또 (2)

    조금 전, 한라산의 주인 <하로산또>가 유린청의 화살을 피한 직후,

    ‘피해? 일반 화살도 아니고 유린청의 궁극기 대초명적을? 그것도 괴수가?’

    이성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역시 강하군. 고민 좀 해봐야겠는데?’

    테무게만 데리고 떠날 것인가? 위험을 감수하고 하로산또와 궤네깃또를 잡을 것인가?

    ‘하로산또랑 궤네깃또, 둘 중에 하나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리 이성계라 해도 아수라급 괴수를 둘이나 상대하는 건 무리였으니까.

    ‘하지만 제주도까지 와서, 때마침 눈앞에 등장한 괴수들을 두고 가는 건 좀…….’

    이성계가 생각에 잠겼다.

    ***

    기갑기에 급수가 있는 것처럼 괴수들도 급수가 있었다. 급수의 이름은 국가마다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었다.

    (괴수 중에서는) 가장 작고 약한 <축생급>, 그보다 더 크고 강한 순서대로 <아귀급>, <야차급>, <아수라급>, 그리고 <마왕(魔王)>급!

    대부분의 괴수들은 축생급이나 아귀급이었다. 야차급만 되어도 웬만해선 보기 힘들었다. 아수라급은 더더욱 드물었다. 광활한 중원 대륙에서조차 아수라급 괴수는 많지 않았다. 마왕급 정도 되면 백 년에 두셋만 나와도 많이 나왔다고 할 정도였다.

    아수라급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100여 대의 기갑기가 필요했다. 기갑기 100대는 류큐국(오키나와) 같은 소국(小國)들의 전체 국방력과 비슷했다.

    ‘국가의 전력을 전부 갈아 넣는 셈이지. 만약 그랬다가 실패하면?’

    일시적으로 국방력이 제로(0)가 된다. 주변국들이 이때다 하고 쳐들어와도 속수무책이 되는 셈이다.

    실제로 아수라급이나 마왕급 괴수를 토벌하다가 망한 나라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정도로 강력한 <아수라급> 괴수가 두 마리나 등장한 것이다.

    ‘까짓거, 해보지 뭐!’

    이성계가 결심했다.

    ‘아수라급이 두 마리지만, 카라 쥬르켄은 마왕급이니까.’

    “자랑스러운 가베치 용사들이여!”

    발전자에서 이성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저 두 놈을 잡을 것이다!”

    물론 <잡는다>는 말은 <돼지를 잡는다>라고 할 때처럼 <잡아 죽인다>는 뜻이었다.

    “공을 세운 자에겐 두둑한 포상이 있을 것이다!!”

    “우오오오오!!”

    30여 대의 가베치 기갑기들이 무기를 치켜들고 환호했다.

    몽골 기술자들과 충샨, 판챠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렸다.

    “하로산또와 궤네깃또는 보통 괴수들과 다릅니다 공자님!”

    “그렇습니다! <격> 자체가 다릅니다.”

    “그래, 확실히 격이 달라 보이는군.”

    이성계가 아침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두 마리의 거대 괴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싸우려는 것이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말이지.”

    “예?”

    “하로산또는 척 보기에도 마법형이나 지원형이고, 궤네깃또는 괴력형이 아니냐?”

    이성계가 전술을 구상하며 말했다.

    “때마침 나한테는 지원형 기갑기도, 괴력형 기갑기도 없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란 말이냐?”

    충샨과 판챠가 질린 표정으로 읍소했다.

    “공자님, 정말로 혼자서 모든 종류의 기갑기를 갖추실 생각입니까?”

    “꼭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요! 동료들과 가족들, 그리고 전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동료? 가족? 전우?”

    이성계가 피식 웃었다.

    “잘 들어둬라 충샨, 판챠. 이 세상에 믿을 놈은 아무도 없다.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마라.”

    “아무도 믿지 말라니…….”

    “섭섭합니다요 공자님!”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셨기에 그렇게 비뚤어져…… 가 아니라 냉소적이 되신 겁니까요?”

    “너희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이성계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충샨과 판챠의 표정이 더더욱 알쏭달쏭해졌다.

    “전원 총공격하라! 놈들이 궁극기를 쓸 틈을 주면 안 된다!”

    이성계가 몽골말로 외쳤다.

    “몽골인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마정석을 얻기 위해서! 하나로 힘을 모으자!”

    “우오오오오!!”

    30여 기의 가베치 기갑기들과 30여 대의 몽골 기갑기들이 포효했다. 물속에 있던 해전용 기갑기들도 뭍으로 올라왔다. 테무게의 <아바르가 자가스>와 나릉토야의 <달라인 모리>도 전투자세를 잡았다.

    “돌격하라-!!”

    쿵쿵쿵쿵쿵

    60여 대의 기갑기가 두 패로 나뉘어 돌진하기 시작했다. 가베치들은 한라산 자락에 있던 하로산또에게 달려갔고, 몽골 기갑기들은 궤네깃또에게 달려갔다.

    이성계가 발전자에서 내린 다음 바가투르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발전자를 하로산또 쪽에, 기갑표범 현표를 궤네깃또 쪽에 보냈다.

    궁술 기갑기 유린청은 저격 모드로 바꾼 다음 두 놈 모두에게 화살을 날리도록 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전장을 주시하던 이성계의 바가투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하로산또>는 새하얀 거대 사슴 괴수였다. 둥지는 한라산 백록담이었지만 사실상 한라산 상층부 전체를 지배해 왔다. 그래서 <한라산의 주인>이라고도 불렸다.

    벌레 같은 인간들과 마물들이 감히 떼지어 공격해 올 때도 있었고, 제물을 바치며 숭배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로산또는 어떤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그럴 만한 힘과 지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랬다. 크고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에서 섬뜩한 살기를 뿜어내며, 한라산 아래에서 달려올라오는 가베치 기갑기들을 고고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신의 무서움을 알아라!]

    하로산또가 웅장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음파공격처럼 뇌를 후벼파는 소리였다. 기갑기에 타고 있지 않거나 소형 기갑기에 탄 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어? 저 새끼 봐라? 괴수 주제에 말도 하네?”

    “조심해 판챠! 말을 한다는 건 지능이 높다는 뜻이니까!”

    “나도 알아 충샨! 이야아아아-!”

    쌍도끼 기갑기 수허와 원숭이 기갑기 보뇨가 무기를 휘둘렀다. 30여 대의 가베치 기갑기들도 일제공격을 개시했다. 발전자가 일반기인 <전격>을 퍼부었다. 고압전류가 화살처럼 빠르게 발사되었다. 유린청도 다시 한 번 궁극기 <대초명적>을 발사했다.

    끼에에에-!

    꽈과과과광!

    하로산또가 거대한 흙먼지와 파편으로 뒤덮였다. 기갑기들조차 앞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해치웠나?”

    충샨과 판챠가 외쳤다.

    ***

    <궤네깃또>는 키가 6장(18m)이나 되는 거인이었다. 도깨비를 수십 배로 키워 놓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일반적인 도깨비보다 훨씬 뚱뚱했다.

    궤네깃또는 주로 다른 괴수들이나 마물들을 잡아먹으며 살았다. 제주도에는 괴수와 마물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괴수와 마물이 많으면 인간이 살기 어렵다. 그러나 기갑기 생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게다가 제주도는 바다 괴수들도 우글거렸다. 제주도가 기갑기 생산 거점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배고-파아-!]

    궤네깃또가 거대한 팔을 휘두르며 고함쳤다.

    콰아아앙-!

    끄아아아-

    단순히 팔을 휘두른 것뿐이었는데도 서너 대의 기갑기들이 한꺼번에 나뒹굴었다.

    [밥-줘어-!]

    콰지직!

    궤네깃또가 거대한 왼손으로 몽골 기갑기 한 대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기갑기의 머리를 뜯어내 버렸다.

    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궤네깃또가 침을 질질 흘리며 가슴의 장갑을 뜯어낸 다음, 몸부림치는 기갑기사를 집어내서 입 안에 넣고 꿀꺽 삼켰다.

    “이 새끼가!!”

    “형니임-!!”

    몽골 기갑기사들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기갑기용 검과 창, 곤봉으로 일제히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원거리에서 화염 공격이나 폭발 마법을 사용하는 기갑기들도 있었다. 3장(9m)에서 4장 5척(13.5m)까지의 기갑기 30여 대가 5장(15m) 크기의 거인을 한꺼번에 공격하고 있었다.

    뻐어억! 쿠아앙! 콰콰쾅!

    보통 사람은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의 충격파와 굉음이 뿜어져 나왔다. 땅이 진동하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거나 짓밟혔다.

    [끄으으~ 아프다아…….]

    피투성이가 된 궤네깃또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몽골 기갑기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테무게와 나릉토야는 굳은 표정으로 궤네깃또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을 멈추지 않고 있어!’

    ‘뭔가를 하고 있다!’

    [헤-에헤헤!]

    궤네깃또가 해맑게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궤네깃또의 오른손 손바닥 위에서 커다란 구체가 빛을 발했다.

    “저…… 저것은……!”

    “기갑기의 마력핵이잖아?”

    아까 붙잡았던 기갑기의 마력핵을, 수십 대의 기갑기들에게 얻어맞으면서 뽑아낸 것이다.

    꿀꺽!

    궤네깃또가 마력핵을 삼켰다. 그리고는 입을 오물거리더니 마정석 외의 부분, 그러니까 괴수에게서 뽑아낸 마정석이 기갑기의 마력핵으로서 작동하게 해 주는 복잡한 기관진식을 퉤! 하고 뱉아냈다.

    [으우오오오오-!]

    궤네깃또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포효했다. 그와 동시에, 몽골 기갑기들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일제히 아물었다. 놀라운 재생속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야! 피부도 더 단단해지고, 키도 더 커졌어!’

    주근깨 소녀 나릉토야가 경악했다.

    후우웅-!

    궤네깃또가 거대한 주먹을 하늘 높이 쳐든 다음 내려찍었다.

    퍼어억!

    “끄아아악!!”

    중형 기갑기 한 대가 직격당했다. 엄청난 괴력으로 머리를 얻어맞자, 머리가 몸통으로 푹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두 무릎이 털썩 꿇려졌다.

    [밥-이다-! 바-압!]

    궤네깃또가 두 손으로 기갑기의 장갑을 잡은 다음 좌우로 쫙 찢어 버렸다. 그리고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기갑기사를 잡은 후, 이빨로 허리 위를 잘라서 씹어먹기 시작했다.

    “우…… 우웨엑!”

    나릉토야가 토하기 시작했다. 테무게가 본능적으로 딸의 기갑기 앞을 막아섰다. 궤네깃또가 기갑기사의 하체를 입안에 털어 넣은 뒤, 기갑기의 마력핵을 우드득 뜯어내서 입안에 삼켰다.

    [우히히히히-!]

    궤네깃또가 기묘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30여대의 몽골 기갑기들과 현표가 덤벼들었지만 꿈쩍도 않았다.

    ‘제기랄! 더 커졌다!’

    궤네깃또는 이미 5장 2척(15.6m)이 넘었다.

    ‘이대로 가면 절대로 못 막는다!’

    ‘이것이 아수라급 괴수들의 힘인가?’

    ‘다 죽을 거야! 우린 다 죽고 말 거라고!’

    테무게와 몽골 장인들의 표정에 절망이 어렸다.

    [바-압-!]

    궤네깃또가 바보처럼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고 새까만 눈동자가 귀기를 뿜어내며 희번덕거렸다. 몽골 기술자들 중 일부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칠 생각조차 못하고 오줌을 지리는 자들도 있었다.

    “대형을 무너뜨리지 마라! 대오가 무너지면 한 명씩 사냥당한다!”

    테무게가 고함쳤다.

    ***

    같은 시각, 한라산 중산간.

    거대한 흙먼지가 가라앉자 하로산또의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가베치들이 경악했다.

    “전혀 타격이 없잖아?!”

    “말도 안 돼! 분명히 적중했다고!”

    “괴수 토벌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버러지 같은 인간들아.]

    생채기 하나 없는 새하얀 사슴 괴수, 하로산또의 음성 파동이 울려 퍼졌다.

    [너희들은 내 털끝 하나조차 건드릴 수…….]

    “바가투르 궁극기! <무릉도원!>”

    이성계가 외쳤다. 그와 동시에 바가투르와 하로산또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공자님!”

    충샨과 판챠가 소리쳤다. 가베치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이럴 수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바가투르의 궁극기가 먹히지 않다니!”

    가베치들이 고함쳤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어깨까지의 높이가 4장(12m)이나 되는 초거대 사슴 괴수 <하로산또>의 두 눈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속죄의 시간이니라!]

    하로산또가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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