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군주 이성계-28화 (28/33)

028. 기갑기 장인 테무게 (1)

커다란 보름달이 떠오른 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이성계와 충샨, 판챠가 개경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순식간에 썰어 버리다니…….’

‘그것도 한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충샨과 판챠가 말을 타고 달리는 이성계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이성계는 환도를 들고 왜구들을 쳐죽였다.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오고 내장이 쏟아졌다. 수백 명이 고압전기에 새까맣게 타 버렸다. 역겨운 악취와 비명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20대 초반의 애송이(?)가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련해도 너무 노련했다.

‘잔혹하기로 유명한 성주님(이자춘)보다 더 냉혹했었지.’

‘맞아. 이런 게 바로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아냐! 늙은 가베치들이 그랬잖아. 성주님도 젊었을 땐 어리버리하셨다고.’

‘맞아. 아무리 ‘군대 체질’이라도 그게 정상이지.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럼 대체 뭐란 말이냐? 공자님의 저 냉철함과 원숙함은?!’

충샨과 판챠가 이성계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

다음 날 오후,

이성계와 충샨, 판챠가 개경으로 이동하던 본대를 따라잡았다. 한씨 부인이 주축이 된 본대는 여자와 아이들, 이삿짐 때문에 속도가 느렸다.

“오셨군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답니다.”

한씨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두 손을 맞잡았다. 이성계가 임신한 조강지처를 가볍게 안아 준 다음 외쳤다.

“개경에 거의 다 왔다! 모두들 의관을 정제하고 몸가짐을 바로 하라!”

“예, 나으리!”

고려의 수도 개경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국제도시였다. 고려는 조선보다 훨씬 개방적인 국가였고, 무역과 상업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궁벽한 함경도 일대에서 살다가 번화한 대도시에 도착하면 어리버리할 수밖에.’

전생의 이성계가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성계는 개경에서 수십 년 살았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이쪽이다! 한눈팔지 마라! 두리번거리지도 말고!”

이성계가 개경의 동대문인 숭인문(崇仁門)을 통과하며 외쳤다.

개경 시내는 과연 화려했다. 왜인들과 몽골인, 한족들은 물론이고 회회인들, 색목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번화했을 것이다.

개경 사람들이 험상궂은 가베치들과 고려 무사들로 이루어진 행렬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검은색 마정철 갑옷으로 무장한 가베치들의 분위기가 워낙 살벌했기 때문에, 대열의 중간에 있던 꽃가마들과 하얀 천막들이 더욱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선두에서 대열을 이끌던 젊은 장수, 이성계였다.

“저 청년이 기철을 죽인 바로 그 장군이래요.”

“중전마마의 최강 기갑기, 알탄 다리에크를 이겼다죠?”

“어머머 저 우람한 근육 좀 봐~!”

“늠름한 등이랑 잘생긴 얼굴은 또 어떻고?”

“으응~ 잘생긴 얼굴은 좀…… 아니지 않니?”

“흥! 넌 꽃미남 파니까 그렇지!”

“맞아! 저 강인한 턱과 넓은 등! 딱 한 번만 안겨 봤음 좋겠당~!”

개경 사람들이 이성계를 보며 소곤거렸다.

이성계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충샨과 판챠가 이성계의 무심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20대 초반이라면 한 번쯤 우쭐할 만도 한데, 이성계는 도통 표정 변화가 없었다.

‘70살 넘은 마니응개 장군님보다도 더 노련하잖아?’

하지만 충샨과 판챠는 몰랐다.

이성계의 나이가 150살이 넘는다는 사실을.

***

“자, 이 집이다! 모두 짐을 풀고 청소를 시작하라!”

이성계가 커다란 기와집 대문 앞에서 외쳤다. 공민왕이 직접 마련해 준 집이었다.

“가베치들도 갑옷을 벗고 일하라! 우물과 지붕을 수리하고 담장을 보수하라!”

“존명!”

가베치들과 시녀들, 노비들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한씨 부인도 큰아들 방우의 손을 잡고 안채로 들어갔다.

이성계가 늙은 도사와 풍수사를 불렀다.

“이 집은 기철의 오른팔 중 하나의 집이었소.”

이성계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다들 아실 거요. 가장(家長)은 죽고, 가족들은 죽거나 노비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는 뜻이지.”

흰머리가 성성한 도사와 대머리 풍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집터가 나쁘거나 사악한 주술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닌지 확인하라는 말씀이군.’

“저는 숨겨진 마법진이나 기물(아티팩트)이 없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도사가 새하얀 수염을 쓸며 말했다.

“저도 집안 곳곳을 돌아보겠습니다.”

대머리 풍수사가 말했다.

풍수사는 땅의 기운을 읽을 수 있는 지관(地官) 들 중에서, 괴물이 출몰하는 <균열>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는 자들을 뜻했다.

풍수사는 오직 각성자만 될 수 있었다. 균열과 연결된 <마굴>의 기운을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한 시진(2시간) 후,

“집안에 사악한 주술이나 원혼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집터에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백발의 도사와 대머리 풍수사가 돌아와서 말했다.

“다행이군. 그럼 목욕재계하고 대기하시오. 오늘 밤에 이 집의 토지신과 성주신, 조왕신, 업신 등에게 제사를 드리겠소.”

이성계가 말했다.

***

며칠 뒤,

이성계가 궁궐로 가서 공민왕을 알현했다.

공민왕 곁에는 노국대장공주가 앉아 있었다.

‘언제 봐도 잘 어울리는 한쌍이란 말이지.’

공민왕은 빼어난 미청년이었고, 노국대장공주도 절세미인이었다.

노국대장공주는 평소에는 조용하고 온화하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대장군들도 쩔쩔맬 정도로 강단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군. 이렇게 매력적인 그녀가 불과 몇 년 뒤에 죽는다는 사실이…….’

이성계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하느라 노고가 많았소, 이 만호.”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부인이 둘째 아이를 가졌다고 들었어요. 임신한 상태로 먼 길 오느라 많이 힘들었겠어요.”

노국대장공주가 아름다운 눈썹을 찡그리며 걱정해 주었다.

“중전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덕으로 다행히 무탈하옵니다.”

아이를 낳다가 죽는 여성이 많은 시대였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도 출산 때문이었을 정도였다.

“소첩이 부덕해서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선왕들께 죄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노국대장공주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런 소리 마시오 중전.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요.”

“두 분의 금슬이 너무 좋으셔서 그런 듯하옵니다.”

이성계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하하 다들 그리 말하더군. 그건 그렇고, 기갑학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있사옵니다 전하. 국자감, 아니 성균관의 기갑무관 양성기관이 아니옵니까?”

“잘 아는구먼. 자네, 기갑학교의 박사(교수)로 일해 주게.”

이성계가 눈을 크게 뜨고 공민왕을 올려다보았다.

“왜, 싫은가?”

“아니옵니다 전하! 다만 왜구들이 각처에서 준동하고 있는지라…….”

“옳은 말이야. 하지만 아직은 우리 장수들이 충분히 막을 수 있네.”

공민왕이 웃으며 말했다.

“못 막을 정도가 되면 바로 전쟁터로 차출일세. 기갑학교 학생들까지 전부 다.”

고려의 군사력은 형편없었다. 강대국인 원나라, 오랜 내전으로 전쟁 경험이 풍부한 일본, 신흥세력 홍건적과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괜찮겠지? 나름대로 개경 귀족들과 인맥도 쌓을 수 있고…….’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전하!”

이성계가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공민왕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0대 초반에 기갑학교 교수가 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일세. 그만큼 파격적이란 말이지. 하지만 자네의 실력을 알기 때문에 과감히 결정했다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성계가 외쳤다.

“송구하오나 전하! 천신 이성계, 그 전에 제주도에 잠시 다녀오고 싶사옵니다.”

“제주도? 탐라국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개경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주도라니! 자네는 참으로 부지런하구먼. 헌데, 제주도엔 무슨 일로?”

“좋은 기갑기 장인을 찾으러 가옵니다.”

“기갑기 장인이라고? 기갑기 제작자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원나라 장인 중에 뛰어난 자가 있다 하옵니다.”

“흐음~ 기갑기 장인이라면 우리 고려 땅에도 있지 않은가? 굳이 거기까지 가서, 그것도 원나라 장인을 만나겠다니…….”

공민왕이 잘생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 장인의 이름이 무엇인가?”

“테무게(Temuge)라 하옵니다.”

“기갑기 장인 테무게라……?”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마주보았다. 노국대장공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구나.”

“그래서 직접 만나서 확인하려는 것이옵니다.”

“만나봐서 괜찮으면, 자네 사람으로 만들려고?”

“그러하옵니다 전하. 홍건적과 왜구에 맞서려면 더 많은 기갑기가 필요하옵니다.”

“흐음…… 뭐, 나쁠 건 없겠지. 자네와 자네의 아비가 강해지는 것이 곧 고려가 강해지는 것이니까.”

공민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을 애써 지우며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옵니다 전하.”

이성계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 제주도에 가는 건 위험하네. 가능하면 말리고 싶지만…… 가는 김에 제주도의 상황을 파악해서 보고해 주게. 고려 국왕 명의로 교서(敎書)를 써 주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이성계가 30여 명의 가베치 기갑기사들과 함께 제주도에 도착했다.

고려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어딜 가나 적대적인 분위기였다.

‘삼별초가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싸웠던 곳이 바로 이곳, 제주도였지. 하지만 지금은 반대야. 완전히 원나라 땅이 되어 버렸어.’

그래서 대놓고 반원정책을 펼치는 고려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몽골인들의 푸대접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알고 온 것이고, 목적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가베치들은 우여곡절 끝에 테무게가 일하는 기갑기 제조시설에 도착했다. 제주도 북서쪽의 해안 지역이었다.

구우우우웅~

쿵- 쿵- 쿠쿵!

위이이잉~

대도(북경), 남경, 요양행성, 카라코룸 등에 뒤지지 않는 기갑기 제조 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규모로군요.’

기갑기 제작자 겸 교관인 무칼리가 감탄했다.

“원나라 놈들은 고려를 비롯한 속국들의 기갑기 제조를 철저히 억제해 왔죠. 하지만 제주도의 기갑기 제조는 장려했어요. 제주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직접 와서 보니까 실감이 확 나네요.”

충샨과 판챠도 감탄했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더니…….”

“원나라의 저력은 무시무시하군요.”

그때였다.

“누구냐?”

“멈추어라!”

기갑기 공장을 지키던 몽골 무사들이 외쳤다.

“고려 국왕의 사신으로 온 만호 이성계 님이시다!”

충샨이 외쳤다. 그러자 몽골 무사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제까지는 대원제국과 고려가 한가족이었지! 하지만 고려 왕이 황제를 배신하는 바람에 원수보다 못한 관계가 되고 말았소이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물러가시오!”

그러자 이성계가 공민왕의 교서를 내밀며 외쳤다.

“이것은 고려 국왕의 친필 교서다! 지난 일들은 황제께서 이미 불문에 부치셨거늘! 감히 너희들 따위가 국가 대사를 논한단 말이냐?”

몽골 무사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성계의 말대로 원나라 황제 순제는 고려의 반항(?)을 유야무야 덮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나라와 고려의 외교관계 자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도 부마국인 고려의 국서를 무시하다니! 아니면 너희들 중에 고려 국왕보다 높은 자가 있느냐?”

“아, 아무리 그래도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몽골 무사들의 말투가 공손하게 변했다. 그러나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들어갈 필요 없다. 사람만 찾으면 된다.”

“누굴 찾으십니까?”

“기갑기 장인 테무게.”

몽골 무사들이 한참 동안이나 소곤거리며 이야기한 다음 말했다.

“테무게는 일급 장인입니다. 고려 국왕의 명이라 해도 그를 데려갈 순 없습니다. 단 바로 이곳에서, 일다경(약 15분) 동안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좋으시다면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좋다.”

이성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협상(?)이 통했다고 생각한 몽골 무사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두 명 중에 한 명이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몽골 무사가 50대의 몽골인 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근육질의 구릿빛 피부를 가진 거한이었다. 소가죽 작업복에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배신자 고려 놈들이 나를 왜 찾아? 바빠 죽겠구만!”

테무게가 들으라는 듯이 투덜거렸다. 충샨과 판챠를 비롯한 가베치들이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이성계는 평온했다.

“반갑네 테무게! 나는 고려의 만호 이성계라 하네.”

이성계가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테무게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그…… 오른손은 뭡니까?”

“아, 이건 서양식 예법일세. 악수라고 하지.”

이성계가 사람 좋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테무게가 주춤거리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네, 테무게.”

이성계가 테무게의 오른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와라 바가투르!”

기우웅-!

“저, 저것은 바가투르?!”

테무게가 소리쳤다. 그러자 이성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바가투르를 아는가?”

“당연하지! 왜냐하면 바가투르는…….”

“그럼 바가투르의 궁극기도 알겠군.”

“알다마다! 근데 그게 뭐 어쨌는데?”

“바가투르 궁극기! 무릉도원!

슈우웅-!

바가투르와 이성계, 테무게의 발치에 마법진이 생겨났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테무게가 외쳤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슈웃!

하는 소리와 함께 바가투르와 이성계, 테무게가 동시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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