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왜구와 기갑기 (3)
“크흐흐 그 건방진 놈의 새끼, 지금쯤 개고생하고 있겠지?”
땅딸막한 토호가 비단 이불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홑적삼만 입은 처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떨고 있었다.
“큼큼! 이리오너라~!”
토호가 음탕한 눈을 번들거리며 손을 뻗었다. 보리쌀 한 가마니에 팔려온 소녀가 가녀린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였다.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진동했다.
“무슨 일이냐?!”
토호가 벌떡 일어나서 마루로 뛰쳐나갔다.
“큰일났습니다 나으리!”
겸인(집사)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외쳤다.
“왜구들이! 왜구들이 몰려왔습니다요!”
“무어라?!”
꽈앙! 꽈과광! 쿠르르릉-!
사방에서 굉음이 터져나왔다. 땅딸보 토호가 짧은 발을 동동 굴렀다.
“왜구들이 왜 여기 있단 말이냐? 그리고 이 소리는 또 뭐고?”
토호가 고함쳤다. 그러자 그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왜갑기들이 쿵쿵 걸어왔다. 사무라이들과 아시가루(보병), 잡졸들도 우루루 몰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토호가 짧은 목에 힘을 주고 외쳤다. 그동안 왜구들과 몇 번 ‘쇼부’를 쳤기 때문에 낯이 익었다. 식량을 넘겨주면 공격하지 않겠다는 비겁한 ‘쇼부’ 말이다.
“그 덩치 큰 애송이랑 싸워야지, 왜 내 집에 와서 지랄이냔 말이다!”
“지,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시므니까?”
대마도 출신 병사가 외쳤다. 이성계 앞에서 통역 노릇을 했던 바로 그자였다.
“나으리였스므니까? 그 거인 사무라이들을 우리에게 보낸 것이?”
‘아차!’
토호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왜구 치고는(?)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통역은 모든 것을 눈치챈 뒤였다.
“우리에게 주는 쌀이 아까웠스므니까? 그래서 그 괴물, 아니 거물 사무라이를 보낸 것이므니까? 똑바로 설명하십시오!”
“에잇! 그렇다면 어쩔 거냐 왜구 새끼들아!”
땅딸보 토호가 고함쳤다. 백 명이 넘는 사병들과 노비들이 달려와서 그를 에워쌌다. 모두가 창과 칼,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다.
대마도 통역이 10여 명의 사무라이들에게 재빨리 상황을 설명했다.
“카마왕! 도오세 코이츠오 코로세바 슈쿤가 타스카루!”
(상관없다! 어차피 이놈을 죽여야 주군을 구할 수 있다!)
10여 명의 사무라이들이 외쳤다. ‘주군’이란 이성계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귀공자 사무라이>를 뜻했다. 가장 크고 화려한 기갑기를 타고 있다가 집중 공격을 받았던 바로 그 청년 말이다.
“데테코이! 000!”
(나와라 000!)
기우웅-! 기우우웅-!
10여 대의 왜갑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10미터가 넘는 기갑기들이 한꺼번에 등장하자 담벼락이 무너지고, 기둥이 우지끈 부서졌으며, 청기와 지붕이 와장창 내려앉았다.
“으아아 미친 새끼들아! 여기서 기갑기를 꺼내면 어쩌자는 게냐!”
토호가 울부짖었다. 그러자 기갑기를 꺼내려던 토호의 사병들이 움찔했다. 왜갑기 중 하나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장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큰일이다!”
“주인마님을 보호하라!”
토호를 에워싸고 있던 도사들과 술사들이 무형의 방어막을 펼쳤다.
콰아앙-!
“커어억!!”
도사들과 술사들, 승려들이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몸집은 인간의 10여 배, 마력은 수십~수백 배나 되는 기갑기의 위력이었다.
“뭣들 하느냐 머저리들아! 기갑기를 꺼내서 나를 보호하란 말이다!!”
토호가 악을 썼다. 그러자 부하들이 투덜거리며 기갑기를 꺼냈다.
기우웅-!
10여 대의 중형, 준중형, 소형 기갑기들이 등장했다. 이번에도 담장이 무너지고 기와집이 내려앉았다. 20여 대나 되는 기갑기가 한곳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야이 개새끼들아! 지금 뭐하는 짓이냐! 내 집을 다 부술 셈이냐!”
토호의 부하들이 속으로 욕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도 어이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왜갑기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덤벼라!!”
“도츠게키-!!”
(돌격-!)
쿵쿵쿵쿵쿵
콰아아앙-!
숨막히는 격전이 시작되었다.
***
그로부터 반나절 뒤,
“고레오 고란 구다사이.”
(이걸 봐주십시오.)
옷과 얼굴에 피가 묻은 중년 사무라이가 이성계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다음, 두 손으로 쟁반을 들어올렸다.
땅딸보 토호의 목이 피와 분노와 저녁노을에 젖어 있었다.
“그놈이 맞군.”
이성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목을 잘라올 필요까진 없었는데…….’
왜구들이 옮겨 온 수백 가마의 쌀가마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왜구들이 토호와 제대로 싸웠다는 것을.
‘그놈밖에 없을 테니까. 이 근방에서 저렇게 많은 식량을 쟁여 놓고 있는 놈은.’
“이제 약속을 지키시오!”
“주군을 풀어 주시오!”
상처투성이가 된 사무라이들이 외쳤다. 그들이 토호와 싸우는 동안 인질로 잡혀 있던 <귀공자 사무라이>가 불타는 눈으로 이성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알았다.”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이성계가 몸을 일으켰다. 왜구들이 고개를 들어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이성계는 고려 사람들 중에서도 거구였다. 왜소한 왜구들의 눈에는 진짜 거인으로 보일 정도였다.
저벅 저벅 저벅
이성계가 귀공자 사무라이에게 다가갔다. 이성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사무라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순간,
촤아악!
이성계가 번개같이 환도를 휘둘렀다.
스르륵-
털썩!
귀공자의 목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잘린 경동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잘생긴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가서 토호의 머리 근처에서 멈췄다.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 눈알이 희번덕거렸다.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던 사무라이들이 경악했다. 충샨과 판챠도 입을 떡 벌렸다.
무덤덤한 건 오직 이성계뿐이었다.
“내가 왜 침략자 새끼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지?”
이성계가 환도의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충샨, 판챠! 나머지를 처리해라!”
“예, 공자님!”
“나와라 수허!”
“나와라 보뇨!”
기우웅-!
“칙쇼!”
“젯따이니 유루사나이!”
(절대로 용서 못해!)
사무라이들이 고함쳤다. 그들의 표정은 악귀야차처럼 변해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자,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서 피가 나는 자들도 있었다.
“데테코이! 00…….”
스걱!
이성계가 휘두른 환도가 맨 앞에 있던 사무라이의 턱을 갈랐다. 칼에는 이골이 난 왜구들조차 놀랄 정도의 쾌검이었다.
“느려.”
이성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 아리에나이!”
(말도 안돼!)
사무라이들이 황급히 물러나면서 기갑기를 꺼냈다. 하지만 보뇨와 수허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토호의 기갑기 부대와 격투를 벌인 직후였기 때문이다.
토호의 기갑기들도 만만치 않았다. 숫자도 왜구들과 비슷했다. 간신히 이기긴 했지만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기갑기의 숫자도 7~8대로 줄었고, 대부분이 크고 작은 타격을 입고 말았다. 주군의 죽음으로 인해 멘탈이 붕괴된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왜갑기들은 결국 한식경(30분)도 못 되어 제압되고 말았다.
이성계도 놀고 있진 않았다.
“으아아아아!!”
“키사마마아!!”
200여 명의 왜구들이 칼과 창을 치켜들고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공포에 질려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의 살기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무덤덤함을 넘어서 심드렁했다.
“나와라 발전자!”
기우웅-!
“튀겨 버려!”
파지지지직-!
고압 전류가 왜구들을 덮쳤다. 왜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살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기갑기용 공격을 인간에게 퍼부었으니…….’
이것이 바로 기갑기의 위엄이었다. 전투 현장에서 무조건 기갑기사부터 죽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나를 원망 마라. 이게 다 인과응보니까.’
왜구들은 어린 소녀의 배를 갈라 제물로 바칠 정도로 잔혹했다. 그것조차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성계가 굳이(?) 왜구들을 몰살시킨 이유는 또 있었다.
‘고려를 침략하면 뒈진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지.’
군량미는 중요했다. 하지만 군사 그 자체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군대가 없는데 군량미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데 군량미를 구하기 위해 보낸 병력들이 계속 전멸한다면?’
제정신이라면 더 이상 고려에 병력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항복하는 자들에겐 의외로(?) 관대했지만 저항하는 자들에겐 한없이 잔혹했던 칭기스칸!
그의 오른팔이었던 이성계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
“충샨, 판챠! 왜갑기들과 임시로 계약을 맺도록!”
“존명!”
충샨과 판챠가 죽은 기갑기사들을 끄집어낸 다음 조종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약식으로 주종계약을 맺고 동기화를 완료했다.
‘내가 쓰기엔 너무 약해. 하지만 기갑기가 없는 하급 가베치들에게 나눠 주기엔 충분하지.’
이성계가 충샨과 판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식 계약이나 동기화 과정이 까다롭고 번거롭긴 하지만, 공짜로 기갑기를 얻는데 그 정도쯤이야. 정 안되면 분해해서 팔거나 재활용해도 되고.’
“어떠냐? 외부의 적으로 내부의 적을 친 것이! 꽤 훌륭한 이이제이가 아니더냐?”
“하하하…….”
충샨과 판챠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믄입쇼 공자님!”
“참으로 신묘한 계책이었습니다요!”
두 사람은 이성계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참으로 무서운 분이시다!’
‘토호의 어설픈 도발에 넘어간 척하던 그때…….’
‘이미 모든 계획이 세워져 있었던 거야!’
충샨과 판챠의 두꺼운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얼마든지 직접 죽일 수 있었는데도, 때마침 등장한 왜구를 이용하다니!’
‘토호는 왜구들에게 살해당한 거니까, 추궁받을 걱정이 없지!’
‘무슨 소리! 오히려 그 반대지!’
‘하긴 왜구들에게 살해당한 토호의 복수를 해 준 셈이니까…….’
‘오히려 큰 상을 받을 일이 아닌가?’
‘아암, 그렇고말고!’
“말에 타지 않고 뭣들 하느냐? 본대와 합류해야 할 것 아니냐?”
말에 탄 이성계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충샨과 판챠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예, 예 공자님!”
“지금 갑니다요~!”
충샨과 판챠가 말에 올랐다.
“아참, 그런데 이 쌀가마니들은 어찌할깝쇼?”
충샨이 물었다. 왜구들이 기갑기와 사람, 말을 이용해서 옮겨온 쌀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버리고 간다.”
이성계가 말했다. 충샨과 판챠가 미간을 찌푸렸다.
‘쌀을 버린다고?’
‘요즘 굶어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였다.
“이것 참! 쌀이 너무 많아서 버리고 가야겠구나!”
이성계가 건너편 풀숲을 향해 외쳤다.
“어차피 왜구들이 노략질한 쌀!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임자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충샨과 판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가자!”
“예? 예, 공자님!”
두두두두두…….
세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풀숲에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토호의 부하들도, 왜구들도 없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경계했다. 뼛속까지 물든 노예근성과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퉤!”
“잘 뒈졌다 개자식아!”
마을 사람들이 토호의 머리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쌀가마니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래도 괜찮을까요?”
아기를 업은 아낙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마을 어른 노릇을 하던 촌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도 듣지 않았나? 쌀이 많아서 버리고 간다는 말씀을.”
“하, 하지만…….”
“걱정 말게. 이씨 세가의 장군께서 우리를 배려해 주신 걸세.”
촌로가 이성계가 사라진 쪽을 향해 합장하며 말했다.
“번개의 힘으로 악을 멸하시니 참으로 제석천(帝釈天)의 화신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을 사람들이 쌀가마니를 옮기기 시작했다. 손수레를 가져온 자들은 손수레로, 지게를 가져온 자들은 지게로 옮겼다.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은 등에 짊어지거나 질질 끌어서 옮겼다.
그러는 중에도 이성계에게 감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젊은 장군님!”
“연전연승하시고 만수무강하소서!”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하시기를!”
쌀가마니를 옮기던 백성들이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장수 이성계>의 명성이 시나브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