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군주 이성계-25화 (25/33)

025. 왜구와 기갑기 (1)

“이대로 물러나실 겁니까?”

토호의 사병들이 아우성을 쳤다. 그들은 이성계로부터 1리(400m) 밖으로 멀어진 뒤에야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래선 나으리 체면이 깎입니다요!”

“무지렁이들이 입방아를 찧을 겝니다!”

“맞습니다! 그냥 해치우시죠!”

“우리한테도 기갑기가 있잖습니까요?”

“시끄럽다!”

토호가 짧고 굵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윽박질렀다.

“저놈도 문제지만 저놈의 아비는 더 문제다! 동북의 호랑이 이자춘 이야기도 못 들어봤느냐? 힘으로 맞부딪히면 반드시 진단 말이다!”

사병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그러자 토호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크 걱정 마라.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니라.”

“역시 주인마님!”

“무슨 좋은 방도라도 있으십니까?”

“있고 말고! 저놈은 개경의 귀족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여진족인지 고려인인지도 불확실한 촌뜨기 놈들이, 난다긴다하는 개경 귀족들의 텃세를 견딜 수 있을까보냐?”

토호가 볼품 없는 수염을 만지며 웃었다.

“애초에 개경에 집을 주고 끌어들이는 것도 이용해먹기 위해서일 뿐! 왜구들을 죽이기 위한 사냥개로 말이지. 저놈과 저놈의 애비는 철저하게 이용당한 다음 처절하게 버려질 것이다! 사냥이 끝난 다음에는 사냥개를 잡아먹듯이 말이다!”

토호가 열변을 토했다. 그러자 사병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긴 제아무리 가베치라도…….”

“수천 수만의 왜놈들을 상대하다 보면 반드시 전력이 약화되겠죠!”

“어디 그뿐인가? 원나라 대군이 쳐들어온다 하던데!”

“강남을 제패한 홍건족 놈들은 또 어떻고!”

“크흐흐 그래, 바로 그거다! 우리 임금은 아직 젊지만 무서운 사람이지. 잘생긴 얼굴로 한량처럼 그림이나 그리고 있지만, 사실은 속에 향랑각시가 열 마리, 스무 마리 들어앉은 분이란 말이다! 이성계 저놈은 아직 어려서 꿈에도 모르겠지만!”

“후후 과연 그렇겠군요!”

“덩치만 큰 애송이니까 말이죠.”

“아무 것도 모르고 좋아하고 있겠군요.”

사병들이 킬킬거렸다.

토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생의 공민왕은 장수들과 그들의 사병들을 이용해서 외적을 막은 다음, 교묘한 방법으로 장수들을 제거하고 사병들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공민왕이 죽이지 않은 것은 청렴하기로 유명한 최영 장군뿐이었다.

최영은 평생 동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했다. 그러다 보니 가베치 같은 강력한 사병집단을 가질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왕권을 위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세운, 이방실, 안우 같은 명장들은 나름의 사병집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최영과 다른 장수들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만약 노국대장공주가 몇 년 뒤에 급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공민왕이 정신줄을 놓고 정치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면, 공민왕이 죽든 이성계가 죽든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공민왕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들과 이순신을 경계하고 고문했던 선조보다 훨씬 더 의심 많고 잔혹한 왕이었으니까.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까지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었다. 왕이 되고 나서야, 옥좌에서 신하들을 내려다본 뒤에야 공민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

“나으리 큰일 났습니다!”

헉헉거리며 달려온 가노(家奴. 집안 노비)가 땅딸보 토호에게 외쳤다.

“옆마을에 왜구들이…… 왜구들이 쳐들어왔습니다요!”

그 노비는 발이 빨라서 장거리 심부름을 하던 자였다. 고려와 조선의 귀족들은 오래달리기를 잘 하는 노비를 한두 명씩은 꼭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루에 300리(120km)를 주파하기도 했다.

“제길! 하필이면 이럴 때……!”

“날이 갈수록 왜구들이 기승입니다요!”

“어찌합니까요? 이번에도 적당히 안겨 줘서 보냅니까요?”

사병들이 물었다. 짜리몽땅한 토호가 수염을 꼬면서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왜구들이 올 때마다 적당히 식량을 줘서 보냈었지…….’

토호에게도 기갑기들이 있었다. 그래서 정면으로 맞붙으면 손해가 컸다. 왜구들은 그래서 토호들의 대저택을 공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왜구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식량 약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의 백성들이 죽든 말든, 저택 문을 걸어 잠그고 지켜보다가 쌀가마니를 주고 넘겨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크흐흐 그래 바로 그거야! 이이제이(以夷制夷)!”

똥똥한 토호가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로 환히 웃었다.

“이이제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사병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무식한 놈들 같으니라고! 오랑캐는 오랑캐로 잡는다! 그게 바로 이이제이가 아니더냐?”

토호가 으르렁거렸다.

“북쪽의 여진족을 이용해서 남쪽의 왜구를 친다! 이게 이이제이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아하~!”

사병들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

같은 시각,

이성계와 판챠, 충샨이 땅바닥에 놓여 있던 향랑각시의 마정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공자님, 이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판챠가 이성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3척(90cm) 크기의 새빨간 마정석을 바라보던 이성계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기갑기로 만들 거라고 했잖아. 향랑각시는 흔한 괴수가 아니니까.”

괴수의 고기나 특수부위처럼 마정석도 거래가 가능했다. 크고 좋은 마정석은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었다. 미래의 돈가치로 치면 최소한 수십억 원 이상이었다.

“이제까지 원나라의 압박 때문에 기갑기를 많이 만들지 못했어. 이제부터라도 부지런히 만들어야지.”

이성계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원나라는 속국들의 기갑기 제작을 엄격히 금지했다. 기갑기의 숫자가 곧 군사력이었기 때문이다. 법사, 도사, 기병, 보병 등도 중요했지만 기갑기에 비할 순 없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부터 온 힘을 다해 기갑기를 늘려야 한다. 전통의 기갑기 강국 원나라는 고사하고, 신흥세력인 홍건적이나 왜구들보다도 적으니까.’

카라 쥬르켄이 아무리 강해도 30대 1, 50대 1로 싸워서 이길 순 없었다. 각각의 기갑기들이 가진 <궁극기> 때문이었다.

‘출력이 약한 기갑기도 궁극기를 잘 쓰면 이길 수 있다. 상성이 유리할 경우엔 더더욱.’

게다가 기갑기들의 궁극기를 연속으로 사용하는 <연계기>도 있었다. 서양에서는 이를 <콤비네이션 어택(Combination Attack)>, 줄여서 <콤보(COMBO)>라고 불렀다.

연계기는 평범한 기갑기들이 강력한 기갑기를 상대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적게는 3~4대, 많게는 수십 대의 중형 기갑기들이 대형이나 초대형 기갑기를 둘러싸고 연속으로 궁극기를 사용했다.

‘카라 쥬르켄조차도 안심할 수 없어.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당할 수 있으니까.’

칭기스칸의 선물이 그래서 고마웠다.

‘여러 대의 기갑기를 거느리게 해 줬으니까.’

다수 대 다수의 기갑기 전투에서는 연계기를 잘 쓰지 않았다. 한 대의 기갑기에 궁극기를 퍼붓다가 나머지 기갑기들에게 ‘순삭’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갑기로 만드시면 누구에게 주실런지……?”

이번에는 충샨이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험악한 인상과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웃음이었다.

“내가 가질 것이다.”

이성계가 말했다.

“독 속성 기갑기가 없었는데, 마침 잘 됐군.”

기갑기는 괴수의 마정석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기갑기의 속성과 일반기, 궁극기 역시 그 괴수의 속성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거대 지네인 <향랑각시>는 물론 독 속성이었다.

“그, 그러시군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판챠와 충샨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번 생에는 <나>를 최우선으로 할 것이다.’

전생에는 달랐다. 기갑기나 마정석이 생기면 부하들에게 챙겨 주기 바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아들과 동지들의 배신이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줘도 되는 것, 등급이 낮은 것, 나에게 필요 없는 것들만 나눠 줄 것이다.’

칭기스칸의 선물 덕분에 여러 대의 기갑기를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자춘의 기갑기들을 포함해서 여러 대의 기갑기와 계약을 맺었다. 지휘형(카라 쥬르켄), 표준형(바가투르), 광역형(발전자), 저격형(유린청), 가변형(현표), 그리고 이번에 얻은 마정석으로 만들 독 속성 기갑기까지.

‘남은 건 포격형, 격투형, 방어형 등인가……?’

이성계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기갑기를 계속 늘려서 압도적인 힘을 갖출 것이다. 누구도 감히 나를 배신하지 못하도록! 이용해먹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최강의 기갑대군(機甲大軍)를 거느린 <기갑의 군주>가 될 것이다.

‘기갑기는 절대로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까.’

그때였다.

“이보게 이 만호! 지금 이럴 때가 아닐세!”

어느새 다가온 땅딸막한 토호가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왜구들이! 왜구들이 근처에 와 있단 말일세!”

이성계의 눈이 커졌다. 충샨과 판챠도 깜짝 놀랐다. 그러자 토호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 혹시 왜구들과 싸워 본 적 있나?”

이성계가 속으로 웃었다.

‘왜구와 싸운 적이 있냐고?’

그가 죽인 왜구들을 모으면 작은 산(山)을 만들고도 남을 것이다. 시체의 산 말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세계,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충샨과 판챠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왜구는 처음이다.”

“크흐흐 예상대로구먼. 그럼 안 되겠어. 제아무리 고명하신 이 만호라고 해도 말이지, 준비도 없이 무시무시한 왜구들과 싸울 순 없지 않겠나? 게다가 싸워 본 적도 없다면서? 요즘 왜구들은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야! 군대야, 군대! 그것도 정예부대란 말일세!”

토호가 수염을 배배 꼬면서 도발했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시게. 이 만호가 겁이 나서 그냥 내뺐다고, 내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음세.”

“뭐가 어째?”

충샨과 판챠가 발끈했다. 이성계가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좋다.”

이성계가 입꼬리를 밀어올리며 말했다.

“내가 처리하지.”

“하, 하지만 공자님!”

“이런 뻔한 수작에 넘어가시면…….”

“가자!”

두두두두두…….

이성계가 곧바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망설이던 판차와 충샨이 그의 뒤를 따랐다.

토호와 사병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인 나으리! 나으리 말씀대로 발끈해서 튀어갔습니다요!”

“왜구도 잡고 건방진 놈도 처리하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닙니까?”

“죽진 않더라도 개고생 좀 하게 생겼습니다요! 하하하하!”

사병들이 박장대소했다. 그러나 땅딸보 토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이상하군. 너무 순조로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토호가 찜찜한 표정으로 이성계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

두두두두두…….

산 하나를 건너가자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꺄아아아-!”

“사람 살려-!”

2~3백 명의 왜구들이 큰 칼을 휘두르며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이성계와 충샨, 판챠가 언덕 위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쪽 마을에는 거대 괴수가 날뛰고, 서쪽 마을에는 왜구들이 분탕을 치는 세상!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지옥보다 더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왜구의 침략과 괴수의 난동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진다. 홍건적과 원나라군도 나라를 초토화시킬 테고.

그 기간은 앞으로 약 30년! 향후 30여년 동안 진정한 지옥도가 펼쳐질 예정이었다.

“공자님, 마님이 계신 본대는 괜찮겠지요?”

충샨과 판챠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성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갑기가 여러 대 있으니 괜찮을 게다. 이곳을 빨리 정리하고 합류한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이번에야말로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충샨과 판챠가 동시에 외쳤다.

“저희들의 싸움을 잘 보시고…….”

“왜구들의 전투 방식을 파악하십시오!”

충샨과 판챠는 이성계가 왜구를 만난 게 처음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하긴, 이번 생에서는 처음 본 게 맞긴 하지.’

이성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고맙다. 부탁하마.”

“존명!”

“나와라 수허!”

“나와라 보뇨!”

기우웅-!

쿠웅 쿵 쿵

쿵 쿵 쿵 쿵

쿵쿵쿵쿵쿵

두 대의 중형 기갑기가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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