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군주 이성계-23화 (23/33)

023. 괴수와 기갑기 (1)

“고려 놈들이 쌍성총관부를 약탈했사옵니다! 이래도 참으실 것이옵니까?”

기황후가 악을 썼다. 그러자 순제가 기나긴 한숨을 내쉰 뒤에 말했다.

“기철의 아들 기사인테무르를 요양행성의 책임자로 임명하겠소.”

요양행성은 한반도 북부와 요동 일대를 관할하는 원나라 행정기구였다. 쌍성총관부도 요양행성 소속이었다.

“듣자 하니 조소생과 탁도경도 요양행성으로 도주했다지? 그들에게 이르시오! 요양행성에서 몇 년 동안 힘을 모아 고려를 치라고 말이오.”

순제가 말했다. 기황후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순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강남의 한족 반란군이 기승을 부리고 있소. 심지어 천완국이니, 송나라니 하는 나라를 세워서 천자를 참칭하고 있지. 이런 상황에서 고려까지 적으로 돌릴 수는 없소.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오.”

“최악의 상황이라니요? 지금보다 더 최악도 있답니까?”

기황후가 쌍심지를 켰다. 그러자 순제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족 놈들과 고려 놈들이 손을 잡는 것! 그것이 바로 최악의 상황 아니오?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오.”

기황후와 대신들이 신음했다. 순제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바얀테무르(공민왕)는 그걸 알기 때문에 황후의 가족들을 죽이고 쌍성총관부를 강탈한 거요. 참으로 비열하고 영리한 놈이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순제가 물었다.

“혹시 바얀테무르 대신 고려의 왕으로 세울 만한 자가 있소?”

기황후가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에게 눈짓했다.

“덕흥군이라 불리는 고려 왕족, 왕타스티무르가 있사옵니다.”

고용보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아뢰었다.

“좋소. 덕흥군도 요양행성으로 보내시오. 그리고 기사인테무르, 조소생, 탁도경과 힘을 합쳐 군사를 모으고 기갑기를 확충하라고 전하시오. 지원 여부는 그때 결정하겠소.”

순제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이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황후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남아 있던 대신들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토크토아 승상이 살아 있었다면…….”

‘고려 왕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진 않았을 텐데…….’

‘당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응징할 수 있었을 테고…….’

대신들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기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똑똑한 젊은 군주 공민왕은 순제의 생각을 훤히 읽고 있었다. 그래서 동북면병마사 유인우, 최영, 이성계 등을 동북면으로 보내는 동시에, 서북면병마사 인당(印璫)과 신순(辛珣) 등을 서북면으로 보냈다.

인당과 신순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격한 다음, 요양행성 바로 밑에 있는 원나라 역참들을 박살 내 버렸다. 동북면으로 간 군사들이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이럴 수가!’

‘참으로 재빠르고 과감하구나!’

원나라 황실이 또 한 번 놀랐다.

그러나 이성계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울 뿐.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 왕이 아내의 죽음으로 망가져 버릴 테니까.’

이성계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다. 공민왕이 건재할수록 조선 건국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동북면-서북면 공격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논공행상이 실시되었다. 이성계는 1등공신으로서 많은 상을 받았다. 직위는 오르지 않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나는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하니까. 지위가 너무 높아도 문제야.’

이자춘은 약속대로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었다. 1천 가구, 약 5천여 명을 다스리던 일개 천호가 하루아침에 함경남북도 전체를 통치하게 된 것이다.

사실 함흥, 경흥 북쪽은 여진족의 영토에 가까웠다. 그러나 여진족이야말로 이자춘의 우군이었다. 증조부인 이안사, 조부인 이행리, 부친인 이춘 등이 오랫동안 기틀을 다져왔기 때문이다.

이자춘의 가족들과 가베치들이 쌍성총관부로 들어갔다. 총관부의 병력과 기갑기도 접수했다. 1천 명 수준이던 가베치가 2천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일반 보병은 그보다 더 많았다. 기갑기도 세 배 가까이 늘어났고.

이자춘의 둘째 부인이자 이성계의 친모인 최씨 부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아내인 한씨 부인의 얼굴도 봄볕처럼 화사했다. 이성계가 이번에도 크게 활약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얼굴이 밝은 만큼 이씨 부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녀는 이자춘의 첫째 부인이자 이원계, 이천계 형제의 어머니였다.

이성계가 이원계를 구해 주었다는 점, 이천계가 아무 것도 못했다는 점이 그녀의 표정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씨 천호부, 아니 동북면의 주인 자리는 우리 원계에게 상속되어야 해! 저 건방진 성계 놈이 아니라!’

세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이성계는 이씨 부인의 생각을 손금 보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무 조바심 내지 마시오, 큰어머니. 전생에서도 어차피 후계자는 나였으니까.’

원만한 성격의 이원계는 이성계에게 고마워할 뿐 특별한 감정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천계는 이성계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치와 평판은 이천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이천계가 감히 헐뜯거나 끌어내릴 위치가 아니었다. 불과 2, 3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한편,

이자춘의 회유와 설득에 넘어가서 고려를 선택한 조소생의 숙부, 조돈도 종3품 예빈경에 임명되었다.

쌍성총관부에 설치되어 있던 방어용 무기들과 대(對) 기갑기용 병기들을 무력화해 준 데 대한 보상이었다. 안 그랬으면 고려군과 가베치들이 큰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그의 아들 조인벽과 조인옥도 고려에 귀순했다. 그들도 훗날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된다.

***

이자춘과 이성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안으로는 쌍성총관부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원나라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반드시 공격해 올 겁니다. 하지만 왜구와 홍건적이 더 문제입니다.”

총관 집무실에서 이성계가 말했다. 조소생과 탁도경, 조씨 부인이 앉아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끄으응…….”

상석에 앉은 이자춘과 마니응개, 무칼리, 가베치 백인장들, 그리고 총관부 출신 장수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제까지 공자님 말씀대로 안 된 적이 없었지요. 그러니 이번에도 그리 될 거라 믿습니다.”

늙은 여진족 장수 마니응개가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믿음직한 손자를 보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군요. 황하 남쪽에 있는 홍건적이 이곳 고려까지 쳐들어온다니…….”

“혹시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온다는 것이냐?”

이원계가 물었다. 이성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육로로 옵니다. 요서와 요동을 통과한 다음, 압록강을 건너서 내려올 겁니다.”

“저어 공자님…… 그 말씀은 대도(북경) 근처를 지나온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총관부 장수였다가 항복한 장수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다면 홍건적이 대원제국, 아니 원나라의 수도 근처를 제멋대로 돌아다닌다는 말씀이신데…….”

이성계가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이미 겪어 봤으니까 알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성계는 적당히 얼버무린 다음 화제를 돌렸다.

“홍건적도 문제지만 왜구가 더 문제입니다. 그걸 잊어선 안 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건적과 달리 왜구는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1350년부터 1392년까지, 수백에서 수만 명의 왜구들이 수백 차례나 침략해 왔다. 이 기간 동안 왜구가 침입하지 않은 해가 단 1년도 없을 정도였다.

고려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해안가로부터 수십 리, 아니 수백 리 안까지 사람의 흔적이 없을 정도였다.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투 형태 때문에 더욱 골칫거리였다.

“왜구들을 도둑떼로 보면 안 됩니다. 그들은 정규군입니다.”

이성계가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가 반신반의했다. 말도 안 된다며 피식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왜구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마도 왜구고, 다른 하나는 구주(큐슈) 왜구입니다. 문제가 되는 건 주로 후자인 구주(九州) 왜구들이죠.”

“하지만 공자님, 이곳은 동북면입니다. 설마 왜구들이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가베치 장수가 물었다. 이성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옵니다. 이곳 함주(함흥)는 물론이고 길주까지 올라갈 겁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길주는 이곳에서 500리(200km)나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몇 배나 더 많이 쳐들어올 겁니다.”

“예? 지금보다 더 심해진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이성계가 좌중을 둘러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할 정도로요.”

“허어…….”

모두가 탄식을 내뱉았다. 이성계의 말이 맞다면 고려는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자춘이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

그로부터 한 달 뒤,

이성계가 아내 한씨와 큰아들 방우를 데리고 개경으로 출발했다.

이자춘은 동북면을 안정시킨 뒤에 천천히 이사하기로 했다.

다그닥 다그닥…….

말에 탄 이성계가 들판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200여 명의 가베치들과 하인들, 시녀들, 식솔들이 따르고 있었다.

큰아들 방우를 안은 한씨는 대열의 중간에 있는 크고 화려한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녀의 뱃속에는 훗날 조선의 2대 왕, 정종이 될 이방과가 들어 있었다.

느릿느릿 이동하던 행렬이 들판 위에 멈춰 섰다.

“정지! 오늘은 이곳에서 묵는다!”

이성계가 외쳤다. 이미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하인들과 가베치들이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몇몇 가베치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괴물이나 산적떼, 왜구들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사실 큰 의미는 없었다. 이성계를 제외하고도 기갑기사가 20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홍건적 본대나 왜구 본대가 습격하지 않는 한 위험할 것이 없었다.

이성계가 말에서 내렸다. 종자가 다가와서 말고삐를 잡았다.

그때였다.

“사…… 살려 주셔요 나으리……!”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몇 달 전에 개경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성계를 수행하던 여진족 가베치, 충샨과 판챠가 이성계의 앞을 막아섰다.

“웬놈이냐?”

충샨이 소리쳤다. 이성계가 충샨을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이 아이에게 꿀물과 주먹밥을 주어라.”

이성계가 말했다. 소녀는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천천히 먹고 이야기해 보거라.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한손에 물병을, 한손에 주먹밥을 든 천민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으리…… 저희 마을에 괴수가 쳐들어왔습니다요…… 마을 어른들은 반 이상 죽고…… 제 부모님도 그 괴수에게…… 흐흑……!”

“근처에는 권세가가 없었느냐? 웬만한 권세가에는 도사들과 법사들, 그리고 기갑기가 있을 터인데…….”

이성계가 측은한 눈빛으로 물었다.

고려는 조선과 달리 사병(私兵)을 가질 수 있었다. 국가 방위를 권세가들과 장수들의 사병에 의지할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후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저희 마을은 외진 곳에 있는데다…… 괴수가 너무 크고 강하다고 하시면서……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흐흐흑…….”

소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대충 알겠다.”

이성계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보시오 부인. 이 아이를 잘 씻기고 먹인 후에 재우도록 하시오.”

“여보! 그 괴수를 잡으러 가시렵니까?”

한씨 부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이성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지 않소? 마정석과 고기도 얻고, 마을 사람들도 구하고.”

“하, 하지만 가베치들을 데리고 가시면 이곳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날이 밝은 뒤에 가시는 게…….”

한씨 부인이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맏아들 방우를 안고 뒤에 서 있던 유모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이성계가 젊은 아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거친 손으로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전생에는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던, 그래서 늘 미안했던 아내의 뺨이었다.

“걱정 마시오.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묘령의 새댁이 두 뺨을 붉혔다.

***

소녀의 마을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멀리서도 푸르스름한 요기가 보였기 때문이다.

두두두두두

이성계와 충샨, 판챠가 말을 타고 달려갔다. 이성계는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충샨과 판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캬오오오오!!!

10장(30m)나 되는 거대한 지네 괴수가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철갑보다 단단한 몸통을 휘두를 때마다 초가집들이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었다.

“향랑(香娘)이군.”

이성계가 말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충샨과 판챠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커도 너무 큰뎁쇼?”

“근처 권세가에서 거절할 만한데요?”

“무슨 소리. 저 정도는 되어야지.”

이성계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기갑기로 만드는 보람이 있지 않느냐?”

이랴!

이성계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충샨과 판챠가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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