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병신정변 (2)
다음 날 새벽,
이성계와 두 가베치가 연경궁에 들어갔다.
세 사람은 정전(正殿)인 건덕전(乾德殿) 앞마당 한쪽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정전은 국왕이 사신을 맞이하거나 행사를 치를 때 사용하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공민왕을 지지하는 관료들이 무기를 가지고 연경궁의 정전(正殿)에 포진했다.
대호군 목인걸, 밀직 강중경, 우다치(于達赤) 이몽대 등의 무장(武將)들이 궁궐에 매복했다.
투르가우드(turqa’ud), 케브테울(kebte’ul), 코르치(忽赤) 등의 호위병들도 주요 지점마다 자리를 잡았다.
이성계와 중년 가베치들은 <코르치>에 포함되어 있었다. 코르치는 <활을 가진 호위병>이라는 뜻의 몽골 말이었다.
궁중무사들이 거사 때 해야 할 일과 역할, 그리고 전투시의 작전을 전해 주었다.
‘드디어 시작이군.’
이성계가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을 만들기 위한 공민왕의 첫 번째 도전!
훗날 병신정변(丙申政變)이라 불리는 반원(反元) 개혁의 첫단계!
그것은 원나라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3대 부원배> - 기철, 권겸, 노책을 죽이는 것이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기철과 권겸이 각각 3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연경궁에 도착했다.
“아이고 나오셨습니까 형님!”
권겸이 비굴하게 웃으며 굽신거렸다.
같은 부원배였지만 엄연히 ‘급’의 차이가 존재했다. 기철은 친동생이 현직 황후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권겸과 노책의 딸은 겨우(?) 후궁에 불과했다.
“그런데 형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권겸이 투실투실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뜬금없이 연회라니요? 혹시 우리 계획을 눈치채고…….”
“그 입 다물라 권겸!”
“죄, 죄송합니다!”
권겸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애송이가 무슨 잔꾀를 부리든 상관없네. 엊그제 ‘그것’이 도착했으니까.”
기철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러자 권겸의 얼굴도 환해졌다.
“드, 드디어! 역시 황제폐하께서는 형님을 각별히 아끼시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괜히 수상한 기색 보이지 말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란 말일세.”
“알겠습니다 형님!”
“노책이 늦는군. 우리끼리 먼저 들어가세.”
“예!”
기철과 권겸이 연경궁의 정문인 광화문(廣化門)을 통과했다. 60여 명의 무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가해 두 마리가 도살장 대문을 통과 중.]
정문에서 망을 보던 법사가 벽돌만한 전음기(傳音機)에 대고 말했다. 가해는 몽골말로 돼지를 뜻했다.
[너허이 60마리가 뒤따르고 있음. 격리가 필요하다.]
너허이는 몽골말로 개(犬), 즉 기철과 권겸의 부하들을 의미했다.
그 소리가 궁궐 전체에 흩어져 있던 무사들에게 전달되었다. 대부분의 무사들이 귓속에 수음기(受音機, 인이어)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음기에는 작은 마정석들이 박혀 있었다.
[가해 두 마리가 여물통을 통과 중.]
돼지 두 마리, 즉 기철과 권겸이 궁궐 내부로 들어올 때마다 법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해 두 마리가 여물통을 지나 도살장에 접근 중.]
여물통은 천성전(天成殿)을 뜻했고, 도살장은 건덕전 앞마당을 뜻했다.
기철과 권겸이 건덕전 정문 앞에 섰다. 그러자 우다치(수문장)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사히올(문지기)들이 도살장 문을 여는 중.]
기철과 권겸이 건덕전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가해 두 마리 도살장에 입장 완료.]
[도살자들은 움직이지 말고 신호를 기다려라.]
우다치들이 기철과 권겸의 부하들을 제지했다. 부하들이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우다치들이 육중한 정문을 닫아버렸다.
쿵!
[가해 포획 성공. 너허이 60마리 격리 성공.]
저벅 저벅
권겸이 아무 생각 없이 정전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기철이 나지막이 말했다.
“기다리게.”
“예?”
“죽기 싫으면 내 뒤에 숨으란 말일세.”
늘 웃던 기철의 얼굴이 야차처럼 무시무시했다. 눈치 빠른 권겸이 뚱뚱한 몸을 흔들며 기철의 등뒤로 숨어들었다.
[가해들이 도살장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뭐? 놈들이 눈치를 챈 건가?]
[알 수 없다. 나란의 지시를 바란다!]
투명화 술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법사들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나란>은 몽골말로 태양, 즉 공민왕을 뜻했다.
건덕전 앞마당에 있던 호위무사들이 기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시가 떨어지는 즉시 기철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무사들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들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숨막히는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큰일이군.’
이성계가 눈쌀을 찌푸렸다.
‘무사들이 살기를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어. 아무래도 기철이 눈치챈 것 같은데?’
이성계의 생각이 맞았다. 등급이 높은 각성자이자 기갑기사인 기철은 수십 명의 무사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살기를 곧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기철이 앞마당 너머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건덕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 앉아있던 대소신료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꽤 먼 거리였지만 서로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왕은 없군.”
기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잘 되었어. 오늘 바얀테무르왕을 죽이고 내가 왕이 된다!”
“네에에에?!”
기철의 등뒤에 숨어 있던 권겸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다.
***
같은 시각, 연경궁 내전(內殿).
내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건물이었다. 지금 그곳이 시장통처럼 분주했다.
“전하! 기철과 권겸부터 먼저 처단해야 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노책을 비롯한 나머지를 기다리지 말고 바로 참(斬)하소서!”
“지체하다가 비밀이 새어나갈 우려가 있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경천흥과 황석기, 신청 등의 신하들이 아우성을 쳤다. 공민왕이 외쳤다.
“경들의 말이 옳소. 기철과 권겸부터 즉시 처단하시오!”
“예, 전하!”
내전에 있던 법사들이 전음기에 대고 외쳤다.
[나란의 지시가 떨어졌다. 쳐라!!]
와아아아!!
매복하고 있던 우달치 이몽대, 대호군 목인길 등이 기철과 권겸에게 달려들었다. 권겸이 비명을 지르며 기철의 등에 매달렸다. 그러자 기철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어설퍼. 모든 게 어설퍼.”
기철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와라 바가투르!”
기우웅-!
5장(15m) 크기의 기갑기가 걸어 나와서 기철을 감싸안았다. 각성자들의 공격이 헛수고로 돌아갔다. 기철이 재빨리 바가투르에 탑승했다.
그와 동시에 정전의 대문이 쾅 하고 부서졌다.
“괜찮으십니까 주인어른!”
기철과 권겸의 부하들이 건덕전 앞마당으로 뛰어들어왔다. 우다치(문지기)들이 문 옆에 쓰러져 있었다.
“지금이 안부인사나 할 때냐? 뭣들 하느냐? 당장 기갑기부터 꺼내지 않고!”
대형 기갑기 바가루트에서 기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옛!”
키우우-!
기우웅-!
기철의 부하들이 기갑기를 꺼냈다. 여섯 대의 중형 기갑기들이 한꺼번에 등장했다. 권겸의 부하들도 세 대의 기갑기를 소환했다.
[가해가 기갑기를 꺼냈습니다!]
[뭐? 기철과 권겸이 기갑기사였단 말인가?]
[기철은 맞고 권겸은 아닌 듯합니다!]
[도살자들도 기갑기를 소환하라!]
기우웅-!
후우웅-!
왕궁무사들도 기갑기를 소환했다. 총 여덟 대였다.
쿵쿵쿵쿵쿵
양측 기갑기들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지축이 울리고 기왓장들이 떨어져 내렸다.
쿠웅! 콰앙! 콰아앙!
18대의 기갑기들이 정면충돌했다. 건덕전 앞마당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쿵! 콰직! 터엉!
쿠웅! 퍽! 퍼버벅!
끄아아아아!
기갑기들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철의 바가투르는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각성자들로 구성된 <기갑지원병>들이 기갑기들을 보조했다. 기갑지원병은 적 기갑기를 방해하고 아군 기갑기를 보조하는 부대였다. 기갑기 1대 당 최소 3명, 많게는 10명 이상이 배치되었으며, 기갑정비사, 법사, 술사, 의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적 기갑기사가 기갑기에 내리고 탈 때, 기갑기가 변신하거나 합체할 때와 같이 취약한 순간을 노렸다. 물론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 기갑기사를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그런데 이번 전투의 양상은 정반대였다. 기갑지원병들이 오히려 자기편 기갑기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실력으로 마력화살을 날려 대는 단 한 명의 무사,
이성계 때문이었다.
쐑-! 쐐액-! 쐐애애액!
이성계의 활에서 바람소리가 날 때마다 한 명의 기갑지원병이 쓰러졌다. 연사 속도, 명중률, 관통력과 파괴력 모두 초일류였다.
그러다보니 <기갑지원병>들이 기갑기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기갑기들이 거대한 팔다리로 지원병들을 지켜 줘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안 되겠다! 저 새끼부터 죽여!”
기철과 권겸 쪽 기갑기들이 이성계를 가리키며 외쳤다.
기이잉-!
기갑기들이 이성계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이성계의 좌우에 있던 두 명의 거한이 급히 기갑기를 꺼내서 탑승했다.
기갑기 <보뇨>가 원숭이처럼 긴 팔로 곤봉을 붕붕 돌렸고, <수허>가 양손에 손도끼를 들고 이성계를 막아섰다.
“이, 이것들은 또 뭐야?!”
기갑기사들이 소리쳤다. 여진족 계열 기갑기들은 고려나 몽골 계통 기갑기와는 느낌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목인길, 이몽대, 강중경 등의 궁중기갑기사들이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겁도 없이 등을 보여?”
“우리가 만만해 보이느냐?!”
쾅! 꽈지직!
“크윽 제기랄!!”
결국 기갑기 전투에서도 궁중무사들이 유리해졌다. 10대 10으로 호각인데도 그랬다.
“쯧쯧 쓸모 없는 놈들!”
바가투르에 탄 기철이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대호군 목인길이 막아섰다.
“잘 나왔다 역적놈아! 내 너의 목을…….”
기철이 목인길의 말을 자르며 외쳤다.
“바가투르 궁극기! 무릉도원!”
키이이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바가투르와 목인길의 기갑기 아래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복잡한 술식이 조합된 거대 마법진이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후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가투르와 목인길의 기갑기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저…… 저럴 수가!”
모두가 경악했다. 이성계조차도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동시에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두 대의 거인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으로 주변 공기가 쏟아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불과 몇 초 후,
슈웃!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바가투르와 목인길의 기갑기가 마법진 위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목인길의 기갑기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기갑기의 내부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목 대호군!”
“인길 형님!”
궁중기갑기들이 달려가서 목인길의 기갑기를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가슴의 장갑을 억지로 뜯어냈다.
뿌드드득-! 콰직!
조종석에 있던 목인길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 그러나 바가투르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뭐냐? 무슨 비겁한 수를 쓴 거냐?”
궁중기갑기사들과 기갑지원병들, 우달치, 코르치, 케브테울 등의 무사들이 경악했다. 그때였다.
키이이이잉-!
또 다른 궁중기갑기의 발밑에 마법진이 등장했다.
“으아아 하지 마-!!”
궁중기갑기가 뒷걸음질을 쳤다. 마법진이 그림자처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가투르와 궁중기갑기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슈웃!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대 모두 마법진 위에 등장했다. 이번에도 바가투르는 멀쩡했고, 궁중기갑기는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으…… 으아아!!”
궁중기갑기사들과 기갑지원병들이 패닉에 빠졌다. 보뇨와 수허는 패닉에 빠지지 않았지만 움직이지도 않았다.
“보았느냐? 이것이 대원제국 황후폐하께 받은 최신형 기갑기, 바가투르의 위력이니라!”
기철이 껄껄 웃으며 외쳤다.
기이잉-!
바가투르가 내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 없다! 바얀테무르를 죽이고 옥새를 확보하라!!”
“존명!”
기철과 권겸의 기갑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멈춰라!”
이성계가 외쳤다. 마력이 실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내전으로 가려던 기갑기들과 기갑지원병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저 새끼……!”
“저놈 때문에 우리 애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저놈만큼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조종석에 앉은 기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순간,
“나와라 현표!”
이성계가 외쳤다.
캬우우웅-!
검은색의 가변형 기갑표범, 현표(玄豹)가 공간의 틈새에서 뛰쳐나왔다. 훗날 <태조 이성계의 8준마>로 불리는 네임드 기갑기 중 하나였다.
아직까지는 부친인 이자춘의 소유였지만.
“오오, 기갑기가 있었느냐?”
기철이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가변형 기갑기가 필요했는데.”
키이이이잉-!
“그건 이제 내 것이다.”
바가투르의 거대한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현표와 바가투르의 발밑에 거대 마법진이 생겨났다.
슈웃!
현표와 바가투르가 동시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