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군주 이성계-15화 (15/33)

015. 병신정변 (1)

이자춘과 이성계가 연경궁을 나왔다. 동화문(東華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50명의 가베치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그러나 이자춘은 군례도 받지 않고 이성계를 담장 밑으로 데려갔다.

“어째서 시키지 않은 짓을 하는 거냐?”

이자춘이 역정을 냈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핀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씨 일가를 공격하는 것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대원제국의 황후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란 말이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죠.”

“<그 정도 위험>이라고?!”

이자춘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이성계가 차분히 대답했다.

“예. 멀리 있는 기황후보다 가까이 있는 고려 귀족들이 더 위험합니다. 바얀테무르왕(공민왕)은 우릴 믿을지 몰라도 권문세족들은 아니니까요. 그들에게 우리는 출신 성분도 불분명한 위험한 무장집단, 오랑캐와 다를 바 없는 변방의 촌놈들에 불과합니다.”

“으음……!”

“우리가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유능하고 쓸모가 있다는 것을, 고려와 한배를 탔다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사냥개 취급을 안 받을 테니까요. 자신이 죽인 사냥감을 주인에게 바쳐야 하는 사냥개, 주인이 선심쓰듯 던져 주는 뼈다귀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개 말입니다.”

전생의 이성계는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며 고려를 지켰다. 하지만 오랫동안 권력의 변방에 머물러야 했다. 고려의 ‘이너써클’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식들 모두를 권문세족들과 혼인시켰다. 그 아들과 사위들이 고려 조정에서 활약하고, 방원이가 과거에 합격한 뒤에야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다를 것이다.’

부패한 고려 귀족들에게 굽신거리지도 않고, 명문세가로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요즘 너를 보면 마치…… 뭐랄까, 노련한 관료나 책사 같구나. 갑자기 확 달라졌어. 마니응개와 기갑기 결투를 했던 그날부터.”

이자춘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철이 든 것뿐입니다 아버지. 어쨌든 저는 개경에 남아서 전하를 돕겠습니다.”

이성계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30명의 가베치를 떼어 주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괜찮아요. 오히려 눈에 띄고 운신의 폭만 좁아지니까요.”

“그렇군. 기철 일파가 바로 의심하겠지.”

이자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명만 남겨 두마. 그 정도는 괜찮을 게다.”

“감사합니다.”

이자춘이 48명의 가베치들을 데리고 함흥으로 떠났다.

***

이성계와 두 명의 여진족 가베치, <충샨>과 <판챠>가 개경 시내를 돌아보았다.

‘개경을 다시 보니 감개무량하구나.’

개경은 이성계에게 고향과도 같았다. 전생에서는 함흥보다, 한양보다 개경에서 지낸 세월이 훨씬 더 길었기 때문이다.

맏아들 방우와 둘째 방과를 제외한 아들딸들도 거의 개경에서 태어났다. 즉위식도 개경 수창궁에서 했고, 조선 건국 후에도 개경에서 머무르곤 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이상하군. 셋째 공자님은 이곳 지리를 잘 아시는 것 같아.’

‘개경에는 처음 오신 거 아니었나?’

이성계의 뒤를 따르던 충샨과 판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꺄아아~”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성계와 가베치들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꽤 먼 거리였지만 똑똑히 보였다. 초원의 전사들은 시력과 청력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 손 놓지 못하겠느냐?!”

아리따운 귀족 여인이 소리쳤다. 그러자 험상궂게 생긴 불한당들이 비웃었다.

“낄낄낄 못 놓겠다면? 어쩌시려나~?”

“거 더럽게 앙탈부리시네~!”

“같이 좀 놀자고! 우리 나쁜 사람 아니라고~!”

불한당들이 귀족 여인을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인의 남편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네놈들이 미쳤구나!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옷으로 보나 태도로 보나 권세가의 집 자제가 분명했다.

그러나 불한당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옷으로 보나 모자로 보나, 기껏해야 어느 귀족집 가노(家奴)들에 불과한데도 그랬다.

그때였다.

“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중년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황후의 친오빠 기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미녀가 있으면 나한테 먼저 바쳐야지! 왜 네놈들이 먼저 재미를 보고 있느냔 말이다!”

기철이 소리쳤다. 그러자 불한당들이 실실 웃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 당연히 주인님께 데려가려고 했습죠~!”

“찬물에도 순서가 있는 법 아닙니까요?”

불한당들이 킬킬거렸다.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기철이 튀어나온 똥배를 흔들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이리 오거라! 내가 누군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기철이 여인의 섬섬옥수를 붙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소근거리며 기철을 욕할 뿐.

심지어 여인의 남편조차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기철은 왕조차 함부로 못하는 고려 최고의 권력자, 대륙을 지배하는 대원제국 제1황후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이성계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가 바로 기철이구나.’

전생에서는 기철을 본 적이 없었다.

공민왕을 알현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개경에 왔을 때는 기철과 마주치지 않았고, 기철이 공민왕에게 주살당했던 1356년 5월에는 함흥에서 쌍성총관부 탈환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유명한 자라서 어떻게 생겼는지 늘 궁금했었는데, 저렇게 생겼었군.’

이성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 여인을 구한다.”

두 명의 여진족 가베치 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계가 젊은 혈기와 의협심을 앞세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는 한, <성주님의 셋째 도련님 이성계>는 전투 경험이 별로 없었다. 얼마 전에 장사성 토벌전에 참가하긴 했지만, 같이 간 가베치들의 말을 들어보니 전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새 기갑기를 찾는답시고 혼자 돌아다니다가, 멋쩍게 웃으며 빈손으로 돌아왔다나?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이성계가 벌써 인생 3회차라는 사실을.

이성계는 두 가베치를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고려의 수호신인 동시에 사신(死神)이었고, 사상 최강의 정복자 칭기스칸의 의형제이자 제1무장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몰랐지만…….

“공명심 때문이 아니야. 저 여인이 불쌍해서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 있어서다.”

“예?”

“저 뚱뚱한 놈 말입니까?”

“아니. 다른 사람.”

이성계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

“이것 놓으시오! 놓으란 말이오!”

여인이 버티면서 외쳤다. 그러자 실실 웃던 기철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너 내가 누군지 진짜 모르느냐? 너희 친정이랑 시댁이 풍비박산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여인이 주춤거렸다. 아름다운 두 눈에서 원통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와당탕탕!

두 명의 거한들이 멱살잡이를 하며 굴러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여진족의 옷과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다.

6척(180cm)을 넘는 두 거한이 울퉁불퉁한 근육을 씰룩이며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댔다. 서로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몽골말도 고려말도 아닌 여진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머 알기샤라! 후둔 야부!”

(떠들지 마라! 빨리 꺼져라!)

“아르강아 자링아 싱어리!”

(교활하고 간사한 쥐새끼야!)

그때였다. 두 거한이 공중을 향해 동시에 소리쳤다.

“투침비 보뇨(나와라 원숭이)!”

“투침비 수허(나와라 도끼)!”

그러자 기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원숭이처럼 팔이 긴 중형 기갑기와, 양손에 도끼를 든 두툼한 기갑기가 공간을 가르고 등장했다.

“위험해!” “뒤로 물러나!”

구경꾼들이 깜짝 놀랐다. 기철과 불한당들도 깜짝 놀라서 물러섰다.

“뭐냐 이 미친 오랑캐 놈들은?”

기철이 소리쳤다.

“개경 한복판에서 기갑기를 꺼내다니! 이것들이 제정신이냐?!”

거한들은 들은 척도 안하고 기갑기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도끼와 곤봉을 붕붕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갑기들의 거대한 무기가 기철의 주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기철이 훌쩍 뛰어서 뒤로 피했다. 여인의 손 따위는 놓은 지 오래였다.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까!”

기철이 기갑기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알 수 없는 말(여진어)로 고함을 치며 난동을 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에잇 김 샜다! 너희들 운 좋은 줄 알거라!”

기철이 퉤!하고 침을 뱉고 나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아이고 주인마님 같이 가요~”

불한당들이 기철의 뒤를 쫓았다.

***

“정말 고맙소이다. 덕분에 살았소!”

젊은 남편이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두 명의 거한이 일부러 기갑기를 꺼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충샨과 판챠가 이성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편과 부인이 이성계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성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성계는 두 명의 가베치에게 여진족인 척, 못 알아듣는 척 연기를 하라고 지시했었다.

만약 저격을 했거나 정면으로 대항했다면, 이성계는 물론이고 여인과 남편까지 보복당했을 테니까.

“기철이 우릴 봐준 것이외다. 아니, 무익한 싸움을 피했다고 할까?”

이성계가 말했다.

“네? 그게 무슨…….”

“기철은 기갑기사요. 마음만 먹었다면 강력한 기갑기를 꺼냈을 거요.”

“그렇다면 운 좋은 줄 알라고 했던 것도…….”

“그렇소. 허언이 아니었다고 봐야겠지.”

“어쩐지 제대로된 호위병력도 없이 다니더라니…….”

젊은 남편이 미간을 접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이성계를 보며 말했다.

“아참! 나는 이정근(李鄭根)이라 하오. 대인의 존함을 알 수 있겠소이까?”

“하하 대인은 무슨…… 함주 천호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라 하오.”

이성계와 이정근은 전생에서 막역한 사이였다. 물론 이정근은 전혀 몰랐지만…….

‘잘 아는 사람에게 자기소개를 하니까 기분이 묘하군.’

이성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혹시 바쁘지 않으면 우리 집에 모시고 싶은데 어떠시오? 서역에서 구한 좋은 차(茶)가 있다오.”

“사양하지 않겠소.”

이성계가 이정근 부부와 함께 어느 대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랑채 마당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중년인이 반갑게 외쳤다.

“정근아! 며늘아가! 괜찮으냐?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이분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이정근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성계를 소개했다.

“오! 참으로 고맙소이다! 나는 전법총랑(典法摠郞) 이인임이라 하오.”

“함주 천호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입니다.”

이성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성계가 이정근을 도와준 이유, 그것은 이인임의 외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우왕을 옹립하고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이인임!

그러나 지금은 기철을 비롯한 부원배들의 눈치를 보는 신세였다.

이인임뿐이 아니었다. 국왕인 공민왕조차도 기철과 기황후의 어머니 집에 몸소 찾아가서 사죄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동북면에서 왔다고 했지?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머물게.”

이인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로부터 몇 달 뒤,

“궁궐에서 큰 잔치를 열고자 하니 문무백관은 모두 입조하기 바라오.”

공민왕이 말했다. 내시들과 환관들이 개경 시내를 뛰어다니며 왕의 초대장을 나눠 주었다.

특히 <3대 부원배>로 불리는 기철, 권겸, 노책에게는 신분이 높은 내시들을 보냈다.

“전하께서 친히 청하셨으니 반드시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늙은 내시들이 말했다. 기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수락했고, 권겸은 아무 생각없이 입맛을 다시며 기뻐했으며, 노책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시를 노려보았다.

기황후의 오빠 기철은 친원파의 거두였다. 왕을 능가하는 권력과 재산으로도 모자라, 조정 곳곳에 자기 심복을 심어놓고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지만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자그마치 대원제국 제1황후의 친오빠였으니까.

권겸은 자신의 딸을 기황후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아이유시리다라에게 바치고 태부감태감 벼슬을 얻었다.

노책도 딸을 공녀로 바쳤는데 그 딸이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재물을 싸들고 찾아와서 굽신거렸다. 노책의 노비들까지도 오만방자하게 굴었지만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을 죽이는 것은 원나라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과 같았다.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렬왕이 원나라에 의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그런데도 원나라 앞잡이들을 잡아죽일 생각을 하다니!’

이성계가 공민왕의 용기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오직 이성계만이 이번 거사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기철과 권겸, 노책, 그리고 그들의 일가붙이들이 학살당한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전생에서는 원나라 사신이 늦게 도착했었다. 사신이 왔을 땐 기철의 머리가 개경 시장바닥에서 뒹굴고 있었지. 그래서 기철은 <대사도(大司徒)>가 되지 못했고.’

대사도는 원나라의 고위 벼슬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듣자하니 원나라 사신이 이미 기철을 만났다더군. 임명장은 물론이고 최신형 기갑기도 줬다지?’

주원장을 따돌리고 카라 쥬르켄을 손에 넣었기 때문일까? 역사가 조금씩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깊이 생각말자. 어차피 역사를 바꾸려고 되돌아온 거니까.’

이성계가 이인임의 사랑방에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움직이지 말고 듣기만 하시오. 내일 연경궁에서 연회가 있을 거외다. 새벽에 무기와 기갑기를 갖추어 입궐하시오.”

방문 앞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모기소리처럼 작은 소리였다.

“어명을 받들겠나이다.”

이성계가 눈을 감고 누운 채로 속삭였다.

문앞에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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