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군주 이성계-13화 (13/33)

013. 공민왕의 결심 (1)

기우우웅-!

그오오오-!

우우우웅-!

수백 대의 기갑기들이 내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마력핵이 웅웅거리며 회전했다. 여덟 가지 색깔의 기운이 수백 대의 기갑기들을 휘감았다.

백련신장도 마찬가지였다. 마력핵을 대주천시켜서 거대한 몸에 기를 충전한 다음, 길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팔법연화인(八法蓮花印)을 맺었다. 팔법연화인은 두 손을 위로 벌리고 좌우 엄지와 검지끼리 맞대는 수인(手印)이었다.

하지만 카라 쥬르켄은 그때까지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 기갑기와 병사들이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 못했다.

‘확실해! 누군지 몰라도 카라 쥬르켄을 제대로 못 다루고 있어!’

주원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카라 쥬르켄은 내가 갖는다!’

“전군! 저 가짜 카라 쥬르켄에게……!”

주원장의 외침이 백련신장의 음성증폭기를 통해 울려 퍼지려는 순간,

후우웅-

기우웅-

스으응-

하는 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쿵! 쿠웅! 쿠우웅!

쿠궁! 쿵! 쿵! 쿠웅!

수백 대의 기갑기들이 공간을 가르며 출현했다.

“고려군을 구해라!”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카라 쥬르켄 만세! 칭기스칸 만세!”

“대원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고려군을 회안성에 박아 넣고 북쪽으로 도망치던 원나라군이 되돌아온 것이다.

수백 대의 원나라군 기갑기들이 한족 연합군 기갑기들을 넓게 포위했다. 허술한 포위망이었지만 심리적인 효과는 컸다.

앞에는 카라 쥬르켄과 소수정예 고려 기갑기들이 있었고, 뒤에는 수백 대의 원나라 기갑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군을 포위하고 있다가 갑자기 역포위를 당한 셈이었다. 한족 병사들과 기갑기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 겁쟁이 몽골 놈들이 어느새……?!”

“도망치던 놈들이 언제 되돌아왔단 말이냐?!”

진우량과 장사성이 탄식했다. 그러자 주원장이 소리쳤다.

“그래, 그런 거였군! 카라 쥬르켄 놈이 우리의 주의를 끈 거였어!”

“그래! 원나라 놈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끈 거였어!”

“그럼 저 원나라 놈들도 카라 쥬르켄이 불러모았겠구만!”

장사성과 진우량이 무릎을 쳤다.

그들의 예상대로였다.

패잔병처럼 우울하게 퇴각하던 원나라군 앞에 갑자기 등장한 카라 쥬르켄!

카라 쥬르켄은 당장 돌아가서 고려군을 구하라고 엄포를 놓았고,

전설의 영웅 칭기스칸의 기갑기를 보고 <사기충천>한 원나라군 기갑기사들이 말을 타고 급히 달려 내려온 다음, 적당한 위치에서 자신의 기갑기를 불러낸 것이다.

상황이 180도로 바뀌었다. 원나라-고려 연합군의 군세는 주원장-장사성-진우량 연합군에게 뒤지지 않았다.

상당수의 원나라군이 이미 퇴각했기 때문에 후방에 있던 기갑기사들만 내려왔지만, 그래서 기갑기의 숫자 자체는 한족 연합군보다 적었지만, 집단전에 특화된 카라 쥬르켄과 독기 오른 고려군이 회안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나라군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스러웠다.

기우우우웅-!

수백 대의 원나라 기갑기들이 마력핵을 가동시켰다. 예비 병력따윈 없었다. 모든 아군 기갑기가 모든 적군 기갑기를 상대로 한꺼번에 맞붙는 대난투극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카라 쥬르켄의 음성증폭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족들은 퇴각하라. 그러면 뒤쫓지 않을 것이다.]

높낮이가 없는 기계적인 원나라말이 울려 퍼졌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 중년 남자의 목소리,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나왔다. 기갑기사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싸운다면 너희 전부를 몰살시켜 버리겠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기 바란다.]

“아, 아니 잠깐만요! 그냥 보내 준다는 겁니까?”

최영이 원나라말로 외쳤다.

“충분히 해볼 만한 상황입니다! 이번 기회에 저 반역자 놈들을……!” “그만하게, 최 장군!”

유탁이 최영의 말을 잘랐다.

“그대의 마음은 잘 아네. 하지만 싸움이 능사는 아닐세.”

다른 고려 장수들도 최영을 진정시켰다. 최영도 더 이상은 고집부리지 않았다. 제발 무사히만 돌아오라던 공민왕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족 연합군과 원나라군도 굳이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을 게 뻔했으니까.

회안성 주위가 고요해졌다. 수십만 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기갑기들이 있었지만 기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주원장이었다.

“우리는 남쪽으로, 너희는 북쪽으로. 각성자들과 병사들, 선박들부터 퇴각하겠다.”

[좋다.]

카라 쥬르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노파의 목소리였다.

“모두들 들었겠지? 병사들과 각성자들부터 퇴각하라! 기갑기들은 보병들을 엄호하며 퇴각한다!”

주원장이 이를 갈며 외쳤다.

***

몇 달 뒤, 고려 개경 연경궁(延慶宮) 회경전(會慶殿).

<장사성 토벌전>에 참전했던 유탁, 최영, 정세운, 이방실, 안우 등의 장수들이 크고 아름다운 식탁에 마주앉아 있었다.

“토크토아 테무르의 실각도 충격적이지만, 카라 쥬르켄의 재림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소.”

상석에 앉은 공민왕이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녕 사실이오? 칭기스칸의 용갑기가 나타났다는 것이? 경들이 직접 보았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사옵니다.”

“하아…….”

20대 중반의 공민왕이 복잡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분명 다행한 일이야. 카라 쥬르켄 덕분에 고려의 간성지장(干城之將)들이 상당수 귀환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씁쓸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구상하던 개혁들을 추진하기 힘들어졌으니…….”

공민왕은 10대 초반부터 20대 초반까지 10년 넘게 원나라 황실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원나라가 망해 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능한 재상 토크토아 테무르가 실각했다는 사실, 장사성을 비롯한 한족 군벌들 때문에 원나라 황실 재정의 80%를 차지하던 소금 전매 수입이 끊겼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사성 토벌전에 실패했다는 사실 등등…….

원나라가 망해 간다는 증거는 차고 넘쳤다.

그래서 전생의 공민왕은 외왕내제, 정동행성 혁파, 쌍성총관부 수복, 원나라 연호 폐지 등의 개혁을 과감히 실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작도 하기 전에 꼬여 버린 것이다. 원나라의 태조 칭기스칸의 기갑기가 150여년 만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수였다.

카라 쥬르켄은 원나라 부활의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칭기스칸이라는 이름에는 엄청난 무게와 상징성이 있으니까.’

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이루려던 젊은 국왕이 고민에 빠졌다.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오판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어!’

공민왕의 고민은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던 광해군의 고민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카라 쥬르켄의 기갑기사가 누구인지는 모르는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한족 연합군이 퇴각한 뒤, 용의 형상으로 변신하여 강물로 뛰어들어 사라졌나이다. 그래서 도저히 쫓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최영을 비롯한 장수들이 말없이 그때를 회상했다.

전설의 용갑기 카라 쥬르켄의 <용갑변신(龍甲變身)>!

공중으로 뛰어오른 카라 쥬르켄이 철컥철컥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용의 형상으로 변한 뒤, 첨벙!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빠르게 잠수해 들어가던 그 모습!

남자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참으로 답답하구려. 그가 누구인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터인데…….”

섬세한 예술가 타입의 미청년, 공민왕이 미간을 접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온데 전하,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사옵니다.”

유탁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만약 카라 쥬르켄이 궁극기를 썼다면 전세가 충분히 유리했을 것이옵니다. 헌데 카라 쥬르켄은 끝까지 궁극기를 쓰지 않았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소신도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사옵니다. 소신이 보기에는 한족들을 그냥 보내 준 것처럼 느껴졌사옵니다.”

최영이 거들었다. 그는 끝까지 싸우고 싶었기 때문에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카라 쥬르켄의 궁극기는 집단전에 특화되어 있사옵니다. 수백 대 1은 몰라도 수십 대 1은 능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온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적을 그냥 보내 주었다는 것은…….”

“흐음~ 확실히 이상하구려. 헌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시오?”

“그, 그것은 소인들도 잘…….”

최영과 유탁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아마 궁극기를 쓸 수 없는 상태였을 것이옵니다.”

20대 초반의 고려 왕비, <보르지긴 보타슈리>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카라 쥬르켄은 목숨을 걸고 타야 하는 기갑기옵니다. 궁극기 같은 큰 기술은 더더욱 위험하고 까다로울 테지요.”

보르지긴 보타슈리, 즉 노국대장공주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니면 카라 쥬르켄의 기갑기사가 원나라 편이 아닐 가능성도 있고요.”

“원나라 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공민왕이 잘생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 눈을 바라보던 노국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원나라도 한족 편도 아닌 자, 중원 대륙이 계속 혼란에 빠져 있기를 원하는 자라고 생각되옵니다.”

묘령의 여인답지 않은 과감한 추리였다. 모두가 노국대장공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과연 누가 그걸 원하겠사옵니까? 우리 고려와 토번, 천축, 남월 등과 같이 원나라에 복속된 나라들이 아니겠사옵니까?”

“과연! 일리 있는 말이오. 그렇다면 그 기갑기사가 고려인일 가능성도 있겠구려!”

“그러하옵니다. 위기에 빠진 고려 기갑기사들을 구해 주었다는 점, 퇴각하던 원나라군을 굳이 남하시켜가면서까지 구해 주었다는 점, 그 두 가지만 봐도 그렇지 않사옵니까?”

“오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공민왕과 고려 장수들이 감탄했다.

보르지긴 보타슈리. 노국대장공주.

그녀는 황족에게만 지급되는 최고급 기갑기를 보유한 어엿한 기갑기사였다. 대도(북경)에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황립기갑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실력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최영이나 정세운, 이방실 같은 맹장들조차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공민왕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기갑기사가 고려인이기를 부처님께 기도합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고려를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경들은 그 기갑기사가 고려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찾아보도록 하시오.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는 이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아참, 이번에 쌍성총관부에 속한 천호 한 명이 참전했다 하지 않았소?”

“천호가 아니라 그 천호의 아들이 참전했사옵니다.”

“그래요? 그자의 이름이 무엇이오?”

“이 아미르바투르, 고려식 이름은 이성계라 하옵니다.”

***

<칭기스칸의 기갑기 카라 쥬르켄이 출현했다!>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유럽의 지중해에서 동북아시아의 만주까지, 북쪽의 몽골에서부터 남쪽의 열대지방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들썩거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4대 칸국(國)>의 몽골족들이 흥분했다.

4대 칸국은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페르시아 칸국(일 칸국)을 뜻했다. 이들은 칭기스칸이 세운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제국들이었다.

칭기스칸의 기갑기에 열광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가장 크게 환호한 것은 역시 원나라의 몽골족들이었다.

기황후와 토곤 테무르 황제(순제), 원나라 황족들과 번왕들, 관료들이 기뻐 날뛰었다.

“카라 쥬르켄은 우리 대원제국 황실의 것이오!”

기황후가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정원(資政院)에서 확보하시오! 최고의 케식들과 추적용 기갑기들을 동원하시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소! 무조건 찾아내야 하오!”

자정원은 기황후의 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카라 쥬르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한 셈이었다.

몽골족들과는 반대로 한족들, 특히 장강 이남의 한족들은 크게 동요했다.

회안성 전투에 직접 참여했던 원나라군과 한족 군벌들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없었던 방국진, 진우정, 유복통 등의 한족 군벌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칭기스칸은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재앙’ 그 자체였으니까.

“반드시 알아내라! 카라 쥬르켄의 기갑기사가 누구인지!!”

한족 군벌들이 카라 쥬르켄의 기갑기사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특히 주원장이 가장 집요했다.

“카라 쥬르켄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알려 주는 자에게는 만금(萬金)을 주겠노라!”

주원장이 선포했다. 홍건적들과 백성들이 미친 듯이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온갖 소문과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법사들과 도사들이 온갖 마법과 술법을 동원했다. 자기가 안다고 사기를 치는 놈, 그놈을 납치해서 고문하는 놈 등등……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

같은 시각, 함흥 화령성.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 내가 카라 쥬르켄의 주인이라는 것을.’

침대에 누워서 이성계가 생각했다.

‘나는 아직 보잘 것 없는 천호(千戶)의 자식일 뿐이니까.’

1천 명이 넘는 가베치를 거느리고 있는 이자춘이 보잘 것 없다니, 분명히 지나친 겸양이었다.

‘하지만 우리 이씨 천호부는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는 여러 개의 천호부 중 하나일 뿐이고, 쌍성총관부는 원나라 개원로가 관할하는 여러 구역 중 하나일 뿐이며, 개원로는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는 옷치긴 울루스(왕가)의 일부일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카라 쥬르켄의 주인이라는 걸 들킨다면?

‘거대한 세력들의 먹잇감이 될 뿐!’

기갑기사는 기갑기를 타지 않으면 평범한(?) 각성자에 불과하니까.

이성계가 두 손바닥을 펴서 바라보았다. 이크호리크에서 칭기스칸에게 받은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계는 알고 있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일 뿐임을. 때가 되면, 즉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다시 나타날 것임을.

그렇다.

칭기스칸이 준 것은 카라 쥬르켄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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