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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군주 이성계-11화 (11/33)
  • 011. 전설의 기갑기 (2)

    15살의 칭기스칸이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이성계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쳤다.

    ‘어째서 눈이 마주친 거지? 이곳은 칭기스칸의 기억 속이 아니었나?’

    칭기스칸의 영원한 안식. 칭기스칸의 인생이 영원히 반복되는 공간. 슬픔과 좌절, 고통과 분노까지도 무한히 반복되는 영면(永眠)의 공간.

    그게 맞다면 이성계는 불청객, 잡음(noise), 오류(bug)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성계가 칭기스칸의 세계 안에 구체적인 실체로 ‘개입’한 것이다.

    혼란에 빠진 이성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이게 만약 칭기스칸의 ‘시험’이라면?’

    카라 쥬르켄의 주인 자격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결과를 보여 줘야 했다.

    이성계가 심호흡을 하면서 가슴을 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대의 보르테 치노(푸른 늑대)가 되고 싶소. 나를 그대의 제베(화살촉)로 삼아 주시오.”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을 ‘푸른 늑대의 칸’이라고 불렀고, 몽골 군대를 ‘늑대 군단’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의 어머니 호엘룬이 반색했다.

    “참으로 잘 되었구나 테무진! 우리는 지금 모든 걸 잃고 헤매고 있다. 사방에는 온통 사나운 적들뿐이지. 그러니 죽은 네 아비처럼 팔뚝이 두껍고 등이 넓은 이 무사와 함께 하자꾸나!”

    그러자 칭기스칸, 아니 15살 소년 테무진이 경계심을 조금 풀고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이성계, 아니 이(李) 아미르바투르요.”

    “아미르바투르여, 나의 <안다>가 되어 주겠소?”

    안다(anda)는 의형제를 뜻했다.

    “영광이오 테무진. 미래의 칭기스칸이여!”

    이성계가 맹세했다.

    “나, 아미르바투르는 보르지긴 테무진의 안다로서 영원히 변치 않겠소이다!”

    그날부터 이성계는 칭기스칸과 함께 싸웠다.

    칭기스칸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한 메르키트 부족을 함께 격파했고, 자무카와 함께 싸웠으며, 나이만, 케레이트, 타이치우트 등의 주변 부족을 차례차례 복속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칭기스칸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나는 고려인이 맞냐는 의심과 모함을 받았었지. 여진족이나 몽골인이 전주 이씨인 척하는 거 아니냐고.’

    칭기스칸도 비슷했다.

    ‘칭기스칸의 어머니 호엘룬이 아버지인 예수게이에게 납치되었을 때, 이미 메르키트족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말이 있었지. 그래서 칭기스칸의 혈통에 대한 의혹이 늘 따라다녔고.’

    공교롭게도 칭기스칸의 큰아들 주치도 같은 의혹에 휩싸였다.

    ‘칭기스칸의 아내 보르테가 납치되었다가 돌아왔을 때 임신한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칭기스칸은 큰아들의 이름을 ‘나그네(주치)’라고 지었다.

    ‘모두가 슬픔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불세출의 영웅 칭기스칸도 예외는 아니었어…….’

    칭기스칸은 자신과 큰아들의 출생의 의혹 때문에 평생 동안 괴로워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수십 년간 안다로 지내온 이성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공민왕의 아들 모니노, 즉 우왕(禑王)에게 같은 짓(?)을 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 신우(辛禑)라고 주장한 것이다.

    ‘먼 훗날 그런 상황이 다시 반복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성계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중년이 된 칭기스칸과 이성계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지배하던 괴수 <카라 쥬르켄>을 잡아 죽였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특히 칭기스칸과 이성계 모두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카라 쥬르켄은 동양의 용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응룡(應龍)>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어떤 괴수도 갖지 못한 특별한 속성을 갖고 있었다.

    전 세계를 휩쓸던 <칭기스칸의 10대 장군> 전원이 기갑기를 타고 협공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북반구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카라 쥬르켄이 ‘토벌’된 후,

    칭기스칸의 충성스런 부하인 젤메의 아버지이자 천재 기갑기 제작자로 유명했던 <차르치오다이>가 카라 쥬르켄의 마정석으로 기갑기를 만들었다.

    최강의 용갑기(龍甲機) <카라 쥬르켄>이 탄생한 것이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노쇠한 정복자 칭기스칸의 두 눈이 영원히 감겼다.

    그와 동시에 이성계가 눈을 떴다.

    ***

    차가운 마석 바닥에 누워 있던 이성계가 눈을 떴다.

    “크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현실 감각을 되찾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끄응~!”

    이성계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이곳은……?’

    높이가 일곱 장(21m)이 넘는 장엄한 돔(dome)형 건축물 안이었다. 최고급 마정석을 수천 개나 사용한 호화로운 장식과 조명이 인상적이었다.

    칠흑같이 새까만 칭기스칸의 기갑기, 카라 쥬르켄이 거대한 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관이 놓여 있었고, 유리관 안에는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칭기스칸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투명 유리관에 박힌 수십 개의 마정석들이 여덟 가지 색깔로 은은하게 빛났다.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하게 빛나는 마법진과 마력회로도 정교하고 복잡했다. 게다가 수십 장의 부적들이 붙어 있었다.

    “이곳은 설마…… 이크호리크?!”

    이성계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이크호리크.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대금역(大禁域).

    칭기스칸과 카라 쥬르켄이 잠들어 있는 곳.

    이크호리크는 히말라야 산맥도, 부르한 칼둔 산도, 바이칼 호수도 아닌 바로 이곳, 흑룡도 앞바다의 해저 동굴로 정해졌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곳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곳은 이크호리크라네. 자네가 찾던 바로 그곳이지.]

    칭기스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계가 뒤를 돌아보았다.

    칭기스칸의 혼령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반투명하게 빛나는 모습이 공민왕의 혼령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성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옳게 찾아온 거였구나.’

    칭기스칸의 안다로 살면서 매일 밤마다 고민했다. 칭기스칸의 함정에 빠진 게 아닐까? 환각과 환청에 빠진 상태가 아닐까?

    그런 고민이 5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역시 폐하의 기억으로 재구축된 세계였군요.”

    [그렇다네 나의 안다여. 하지만 꿈과 현실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깝다네.]

    60대의 칭기스칸이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첫 번째 시험은 봉인을 풀고 두 마리의 괴수와 싸워서 이곳에 도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시험은 평생 동안 자네의 모든 시험하는 것이었네. 인성, 능력, 인내, 용기, 열정…… 자네는 모두 통과했지.]

    말 그대로 인생 전체가 테스트였던 셈이다. 세상의 어떤 시험도 이보다 어렵지는 않으리라.

    이성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 번째 시험은 뭡니까?”

    [카라 쥬르켄에 탑승하는 것일세.]

    칭기스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대는 죽거나 폐인이 될 수도 있어. 주화입마는 오히려 자비로울 정도지. 왜 그런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카라 쥬르켄의 검은 심장이 조종사의 심장을 검게 물들이니까요.”

    [그런데도 할 텐가? 극악의 확률을 뚫고 동기화에 성공해도 문제일세. 그대가 가려는 길은 죽음과 고통의 길이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칸이시여. 하지만 잘못된 인생을 되돌릴 수 없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없더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이곳 이크호리크에서 영원회귀를 계속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일 테니까.]

    칭기스칸이 카라 쥬르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구우웅-!하는 중후한 소리와 함께 카라 쥬르켄이 진동했다.

    6장(18m)이나 되는 칠흑의 용갑기 카라 쥬르켄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안식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나의 오랜 친구여.]

    칭기스칸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한 번, 그대의 힘을 빌려주게. 나의 안다 아미르바투르, 아니 이성계를 위해서.]

    [알겠습니다.]

    기이잉-!

    카라 쥬르켄의 가슴 장갑이 열렸다. 이성계의 몸이 둥실 떠올라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스으웅-!

    가슴 장갑이 부드럽게 닫혔다. 조종석도 깨끗했다. 100년 가까이 잠들어 있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상태 확인과 안정화 작업에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마정석 상태 확인 개시]

    [마정석-마력핵 연동회로…… 양호]

    [마력핵 출력…… 양호]

    [……]

    수십 가지 항목들이 체크되었다. 오르타크는 물론이고 유린청보다도 훨씬 많았다.

    [……]

    [마정합금장갑 및 관절부…… 양호]

    [조종 및 제어장치…… 양호]

    [기체 확인 완료. 기동 준비 완료.]

    [동기화를 시도합니다.]

    ‘<시작>이 아니라 <시도>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성계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시도와 시작의 차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끄으으아아아아!!!”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

    같은 시각, 중국 강소성(江蘇省) 회안성(淮安城).

    2만의 고려군이 수십만의 주원장-장사성-진우량 연합군에게 공격받고 있었다.

    40대도 안 되는 고려군 기갑기들이 200여 대의 홍건군 기갑기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게다가 뒤쪽에는 아직 수백 대가 더 대기 중이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고려군에게 승산은 없었다.

    게다가 8천 척이나 되는 배들이 회안성을 에워싸고 포격과 지원을 해 주고 있었다. 회안성은 충주 탄금대처럼 두 개의 큰 강이 만나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중국해와도 가까웠다.

    고려군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러나 일반 기갑기와는 차원이 다른 세 대의 성명기갑기(네임드 타이탄)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마음이 꺾여 버렸다.

    진우량의 <악비붕거>, 장사성의 <손권대제>, 주원장의 <백련신장>이었다.

    그들은 고려군의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한족 병사들과 기갑기사들은 신이 났다. 그럴수록 고려군은 더더욱 수세에 몰렸고.

    그리고 마침내,

    푹! 푸욱! 푸우우욱!

    맨 앞에 있던 홍건적 기갑기들이 <장절대공>에 창을 찔러 넣었다. 네 개의 거대한 창이 맨 앞에서 싸우던 장절대공의 몸을 꿰뚫었다.

    수십 군데를 난자당하고 수십 발의 대(對) 기갑기 전용 화살과 탄환이 박힌 채로 아수라처럼 싸우던 장절대공이 마침내 침묵했다.

    “쿨럭! 커어억……!”

    조종석에 앉은 최영이 선지피를 쏟아 냈다.

    “대호군!”

    “최 장군!”

    고려 장수들이 절규했다. 그러나 아무도 최영을 도와주지 못했다.

    이미 여섯 대의 고려 기갑기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남아 있던 30여 대의 기갑기들도 전투불능 상태나 다름없었다.

    “적이지만 참으로 대단하군요.”

    백련신장에 탄 주원장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우리 명교(明敎) 연합군을 상대로 여기까지 버텨 내다니…….”

    “나는 백련교도가 아니오만?”

    장사성이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진우량, 주원장은 백련교=명교=홍건적 계열이었지만 장사성은 아니었다.

    ‘사사건건 짜증나는 새끼! 나중에 꼭 죽여 주마!’

    주원장이 속으로 다짐했다. 주원장과 장사성의 ‘구역’이 접해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결판을 내야 했다.

    [아무래도 마지막인 것 같군요.]

    장절대공의 목소리가 조종석에 울려 퍼졌다.

    [그동안 장군님과 함께 싸울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다음 생에도 함께 싸울…….]

    [웃기지 말거라!]

    최영이 핏발 선 눈을 흡뜨며 외쳤다.

    [고려의 장수는…… 쿨럭! 마음대로 죽어서도 아니돼! ……우리는 고려의 국방력…… 그 자체니까…… 쿨럭 쿨럭! 반드시 병력을 온존하여…… 전하를 보위하고…… 고려를…… 백성…… 들을…….]

    최영의 목이 툭 꺾였다. 그러자 여러 개의 창에 꿰뚫리고서도 꼿꼿이 서 있던 장절대공의 목이 스르륵 꺾어졌다.

    기우웅-!

    그러나 장절대공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땅바닥에 창을 박아 넣은 채로 꼿꼿이 서 있었다.

    두 눈도 빛을 잃지 않았다. 희미하게 깜빡이면서도 끝내 꺼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힘없는 조국을 두고서는 죽을 수조차 없는 고려의 수호신, 최영의 의지 그 자체였다.

    “장군!”

    “최 장군!”

    “끄흐흐흐흑!”

    고려 장수들이 흐느꼈다.

    “휴~ 보고 있기 힘들구만. 이젠 끝을 내자고!”

    진우량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가 힘이 없는 게 죄지, 저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장사성도 한숨을 내쉬며 동의했다. 그러나 주원장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세 대의 대형 기갑기가 고려군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기갑기들보다 최소한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아름다운 기갑기들이 최영과 고려군 앞에 섰다.

    “우리를 원망 마시오.”

    장사성이 말했다. 그의 기갑기 손권대제가 거대한 고정도(古錠刀)를 치켜들었다. 길이가 3장(9m), 폭이 7척(2.1m)이나 되는 은빛 도신(刀身)에 장절대공의 모습이 비쳤다.

    “극락왕생하시오, 고려의 장수여.”

    후우우웅-!

    손권대제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고정도를 휘둘렀다. 바로 그 순간,

    푸우욱!

    거대한 검은 화살이 손권대제의 오른쪽 허벅지에 쑤셔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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