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용사의 자격 (2)
화령성 외성(外城) 연병장.
쿵 쿵 쿵
3장(9m) 크기의 기갑기가 공간을 가르고 나왔다.
‘원나라 제식 훈련기 오르타크!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성계가 아련한 눈으로 오르타크를 올려보았다.
오르타크(Ortaq)는 원나라(몽골) 말로 <이슬람 상인>이라는 뜻이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몽골제국 육군에 대량으로 납품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디자인 컨셉은 북방식 두정갑이었고 대초원을 상징하는 황토색과 초록색으로 도장되어 있었다.
크기는 소형이었지만 밸런스가 잘 잡혀 있었다. 훈련기지만 실전에서도 쓸 만했다.
‘특히 기갑기가 없는 소규모 왜구들이나, 중소형 괴수들에게 효과가 좋았지.’
하지만 오르타크에게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5행8괘 중에서 어떤 속성도 갖지 않는 무(無)속성이라는 점!
아라비아 지역에 흔하게 출몰하는 하급 괴수인 블레미야스(Blemmyae)의 마정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블레미야스는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인간형 마물인 형천(形天)을 뜻했다. 형천은 머리가 없고 눈코입이 몸통에 있으며, 도끼와 방패를 들고 다니며 인간을 도륙하는 8척(2.4m) 크기의 마물이었다.
형천은 흔치 않은 무(無) 속성 몬스터였다. 그래서 그 마정석으로 만든 마력핵도 속성이 없었고, 그 마력핵으로 만든 기갑기 오르타크도 속성이 없었던 것이다.
속성이 없으니 속성스킬을 쓸 수 없었다. 뇌전의 화살도, 화염의 폭풍도, 얼음의 지옥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원나라의 세계 제패 후, 대부분의 오르타크들이 농업용이나 공업용 기갑기로 개조되었다. 살아남은(?) 기체들은 훈련병들을 위한 연습기로 배속되었고.
“공자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건 말 그대로 훈련용 기갑기인데…….”
무칼리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키가 작고 몸이 두툼한 근육중년이었다.
“게다가 마니응개 장군님이라니…! 그분은 속정이 깊고 인자하시지만 기갑기에 타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왜구들이 괜히 ‘백발의 오니(괴물)’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예요. 게다가 훈련을 실전처럼 생각하시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무칼리 교관님.”
이성계가 무칼리의 말을 끊었다.
“마니응개 님과는 같이 싸워 봤으니까요. 그것도 수없이 많이.”
“네? 그게 무슨……?”
무칼리가 작은 눈을 크게 떴다.
***
뚜벅 뚜벅 뚜벅…….
여진족 출신의 가베치 노장(老將) 마니응개가 드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평시에는 운동장으로, 유사시에는 연병장으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그는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이성계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갑기 째로 온몸이 뭉개지고 산채로 불태워지며, 뇌전에 지져지는 그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들어본 적 있냔 말입니다!]
[예, 있습니다. 아주 많이요.]
‘많을 리가 없지 않은가? 놀고 먹기만 하던 스무 살 애송이 주제에!’
마니응개로서는 이성계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차라리 잘 되었어.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 주리라!”
이성계의 할아버지 대부터 충성을 바쳐온 노익장이 다짐했다.
“충!”
“장군님을 뵙습니다!”
도술과 무술을 수련하던 가베치들이 마니응개에게 군례를 올렸다. 마니응개가 가볍게 답례하며 지나갔다.
마니응개가 연병장 끝쪽에 멈춰 섰다.
“나와라 타스하!”
그오오옹-!
공간이 세로로 열리며 4장(12m) 정도 길이의 기갑기가 네 발로 걸어 나왔다. 마니응개의 기갑기 <타스하>였다.
타스하(Tasha)는 여진말로 호랑이라는 뜻이었다. 칭기스칸이 몽골 대초원을 공포에 떨게 했던 거대 호랑이 괴수를 손수 잡아죽인 뒤, 그 괴수의 마력핵과 뼈를 베이스로 해서 만든 기갑기였다.
크아아아!!
기갑호랑이 타스하가 포효했다. 그러자 대기가 요동쳤다.
“뭐야? 무슨 일이야?”
“타스하가 왜 밖에 나와 있어?”
“카이샨 장군님, 마니응개 장군님에 천호님까지?! 대체 무슨 일이야?”
수십 명의 가베치(家別抄)들이 몰려들었다.
“시작해라.”
이자춘이 말했다. 마니응개 장군이 군례를 올렸다.
크르렁~
기갑호랑이 타스하가 큰절을 하듯이 엎드렸다. 그러자 푸쉭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이 열렸다.
마니응개가 가볍게 뛰어올라 탑승했다. 그러자 등이 닫히고 여러 겹의 장갑이 뒤덮였다.
***
기이잉~
오르타크의 가슴 장갑이 열렸다. 청년 이성계가 3장(9m) 정도 훌쩍 뛰어오른 다음, 가슴 속에 있는 조종석에 착석했다.
[안녕하십니까 기사님. 제 이름은 오르타크. 제식번호는 갑술(甲戌)-692-73입니다.]
훈련용 기갑기였지만 인공지능은 제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물론 프로그래밍으로 만든 인공지능이 아니라, 마력핵에 내장된 혼백(魂魄)의 일종이었지만.
[지금부터 상태 확인을 시작하겠습니다. 기감(氣感) 양호. 자세제어 양호. 마력회로 양호.]
[안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속성이 없는 보급형 기체다 보니 금방 끝났다.
[조종석과 조종간, 계기판은 기사님의 신체에 맞게 자동으로 조정됩니다.]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위이이잉-!
오르타크의 마력핵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투명하고 무미건조한 기운이 이성계의 몸으로 밀려들어왔다. 유린청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양과 순도였다.
‘어쩔 수 없지. 유린청은 아직 아버지의 기갑기니까.’
그때였다.
“크윽……!”
이성계가 조종간을 꽉 쥐었다. 오른쪽 콧구멍에서 주륵, 하고 코피가 흘러내렸다.
‘단련이 안 된 몸으로는 이 정도도 버겁군.’
지금 이성계의 몸은 백전노장의 것이 아니었다. 전쟁을 모르는 스무 살 철부지의 몸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닮은 강인한 육체, 그리고 70년 동안 쌓인 경험이 없었다면 진작에 기절했을 것이다.
‘젠장! 신체단련부터 해야겠군!’
이성계가 눈을 감으며 다짐했다.
[동기화 완료. 출격 준비 완료. 구동을 시작하십시오.]
“휴우우우~”
이성계가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6척(180cm) 정도였던 시야가 30척(9m)짜리 거인의 시야로 바뀌어 있었다. 손가락과 팔꿈치, 어깨, 허리, 무릎,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각도 달랐다.
이성계는 말 그대로 6미터짜리 기갑기가 되어 있었다.
위잉. 위이잉. 위이이잉.
오르타크가 제자리걸음을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예상한 그대로의 움직임이야.’
유린청보다 훨씬 느리고 둔했다. 출력도 부실했다. 잠시 고민하던 이성계가 허리를 굽혀서 조종석 아래를 더듬었다.
‘역시 뒷문(백도어)이 있었군. 더러운 아라비아 놈들.’
이성계가 작은 판넬을 뜯어냈다. 그러자 마력회로 기판이 드러났다. IC나 트랜지스터 대신 마정석들이 박혀 있는 기판이었다.
[아, 아니 거긴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르타크가 당황했다. 이성계가 허리를 잔뜩 굽혀서 마력회로를 조작했다.
[안 됩니다! 이러시면 기사님의 생명이 위험…… 끄으윽!]
키이이이이잉-!
오르타크의 마력핵이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조종석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후우~
이성계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경혈이 따끔거렸다. 눈가의 모세혈관이 터져 나갔다.
“이제야 좀 움직일 만하군.”
피눈물을 흘리며 이성계가 말했다.
쿵
쿵 쿵
쿵쿵쿵쿵쿵
훈련용 소형 기갑기 오르타크가 놀라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몇 분 전,
“공자님이 기갑기를 움직일 수나 있을까요?”
카이샨이 야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력 감응도가 높은 상급 각성자가 뼈를 깎는 훈련을 해도 될까말까 아닙니까?”
이자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갑기사는 우리 애들(가베치들) 중에서도 3할밖에 안됩니다. 전원이 각성자인데도 그렇죠.”
그나마 오르타크 같은 소형 기체니까 그만큼 나오는 것이었다.
경형, 소형, 중형, 대형, 초대형 기갑기로 갈수록 탑승 가능한 기갑기사의 비율이 줄어든다.
“저는 각하가 허락하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카이샨이 연병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갑 호랑이 타스하가 진짜 호랑이처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기갑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유연했다.
하지만 오르타크는 멍하니 서 있을 뿐.
“성계 녀석, 큰소리친 주제에 움직이지도 못하는데요?”
이천계가 이죽거렸다.
“조종석 안에서 어쩔 줄 모르고 게지.”
이씨 부인이 서역에서 수입한 부채를 부치며 비아냥거렸다. 최씨 부인과 한씨 부인이 울상을 지었다.
이자춘은 말없이 오르타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 모르는 철부지 아들을 따끔하게 혼내시려는 거죠? 세상의 무서움을 알려 주기 위해서요. 마니응개 장군도 그래서 ‘놀아 주고’ 있는 거 아닙니까?”
카이샨이 이자춘에게 말했다. 그러자 무칼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카이샨 님?”
“네?”
“저는 셋째 공자님에게 걸어 보고 싶군요.”
“하하, 그래요? 그럼 저는 마니응개 장군에게 걸지요.”
그 순간, 정지해 있던 오르타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이잉~
기이이이잉~
카이샨과 이씨 부인, 이천계가 비웃었다.
“저따위 실력으로 마니응개 님께 도전했다니……!”
“난 또 숨겨 논 실력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그때였다.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르타크의 몸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쿵쿵쿵쿵쿵
오르타크가 뛰기 시작했다. 훈련용 기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후-웅-!
오르타크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기갑호랑이 타스하의 등을 덮쳤다.
콰앙!
타스하가 재빨리 몸을 빼냈다.
“제 등을 잡겠다고요? 아직 30년은 이릅니다!”
마니응개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오르타크의 목표는 등이 아니었다.
꽈아악-!
“어, 어엇?!”
오르타크가 타스하의 꼬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좋은 작전이군요! 하지만 어림없지요!”
마니응개가 소리쳤다.
크아아아!!!
타스하가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자 꼬리를 잡은 오르타크가 오히려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졌다. 타스하의 크기와 출력이 훨씬 크기 때문이었다.
쾅! 콰앙! 콰아아앙!
오르타크가 쉴 새 없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나 끝까지 꼬리를 놓지 않았다. 그러자 기갑호랑이 타스하가 울부짖었다.
끄아아아앙!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이 총애했을 정도로 족보(?) 있는 야수형 기갑기, 타스하!
쿠빌라이 칸이 붕어(崩御)한지 50여년이 지난 지금,
황제의 위엄을 드높이며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타스하가,
어째서인지 원나라 황족이 아닌 여진족 장수 마니응개의 기갑기가 되어 있었고,
어째서인지 초보자(?)가 탄 훈련용 기갑기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었다.
“변신이다 타스하!”
여진족 장수 마니응개가 외쳤다.
키이이잉-!
가슴 한가운데에 위치한 타스하의 마력핵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철컹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인간형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꼬리가 튕겨 나왔다. 두 손으로 꼬리를 잡고 있던 오르타크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우당탕탕탕!
오르타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몸 전체가 과열되어 있었고, 관절과 갑옷 틈새에서는 검은 연기가 새어나왔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전기 스파크마저 튀고 있었다.
카이샨이 감탄했다.
“속박과 제약을 풀어 버리고 강제로 폭주시켰군요. 저러면 굉장히 괴로울 텐데요? 공자님도, 오르타크도.”
이자춘은 굳은 표정으로, 무칼리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투웅!
누워 있던 오르타크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타스하의 꼬리를 두 손으로 힘껏 휘둘렀다.
카캉! 빠지직!
타스하의 꼬리가 타스하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가베치 장수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적의 무기로 적을 친다! 현명한 작전이군요! 어차피 오르타크의 장갑으로는 타스하의 몸을 뚫을 수가…….”
“타스하를 친 게 아닙니다.”
무칼리가 웃으며 말했다.
“끼워 넣은 거지요.”
“끼워 넣다뇨?”
가베치 장수의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타스하가 인간형으로 변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모두가 경악했다.
“핵심 변신 부위에 꼬리를 끼워 넣었어!”
“맞아! 옆구리와 배가 맞물리는 부분이야!”
“그래서 변신을 못하는 거구만!”
“인간형도 야수형도 아닌 어정쩡한 꼴이야!”
꽈드득! 꽈드드득!
타스하의 기갑 꼬리가 찌그러졌다. 오르타크에 의해 손상되었던 꼬리가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손으로 뽑아낼 수도 없었다.
“그만! 변신 취소! 취소해라!”
마니응개가 외쳤다. 타스하가 다시 호랑이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구리와 배에 끼여 있던 꼬리가 쑥 빠졌다.
“휴우~ 소중한 꼬리가 부서질 뻔했잖아!”
마니응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성계를 바라본 순간,
“아, 아니 공자님!”
자기도 모르게 고함 소리가 튀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