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용사의 자격 (1)
함흥에 위치한 이씨 천호부(李氏千戶府)의 본성(本城), 화령성(和寧城).
그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건물 안에 음식이 가득 차려진 웅장한 식탁이 놓여 있었다.
6척 2치(186cm)의 큰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중년 장수가 괴물 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터질 듯한 근육이 담비 가죽과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원나라 귀족 복장에 가려져 있었고, 곰처럼 굵은 목덜미 위에 자리잡은 강인한 턱이 거친 수염에 덮여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울루스부카(吾魯思不花). 고려명 이자춘(李子春).
원나라의 밍간(천호) 겸 다루가치(행정관)이자 화령성 성주(城主).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이 그 식탁에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이자춘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이씨 집안의 사병으로 유명한 가베치(가별초) 장수들이었다.
“호호호 괴물들을 토벌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서방님~”
이씨 부인이 이자춘의 잔에 술을 따르며 아양을 떨었다. 그녀가 몸에 지닌 사향 냄새와 서역의 향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값비싼 옷을 입고 진하게 화장을 했지만 눈가의 주름은 숨길 수 없었다.
“원계 너도 수고 많았어! 아버지 뒤를 이으려면 항상 건강해야지~”
이씨 부인이 25세의 큰아들 이원계의 접시에 고기를 담아 주며 말했다.
“다음 번 토벌 때는 저도 갈게요! 저도 각성한 지 6개월이 넘었잖아요!”
이원계의 동복동생 이천계가 아버지를 졸랐다. 하지만 이자춘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래요 여보! 우리 천계도 이제 어엿한 기갑기사잖아요~”
“음.”
이자춘이 애매하게 대답하고 술을 마셨다.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21살의 이천계가 고개를 숙였다. 친형 이원계는 18살 때부터 이자춘과 함께 다녔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애가 탄 이씨 부인이 다시 한 번 보채려는 순간,
저벅 저벅 저벅
마니응개와 이성계가 등장했다.
이성계는 자다 깨서 바로 온 것 같았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꾀죄죄한 몰골에 얼이 빠진 표정. 평소의 이성계 그대로였다.
이성계의 생모인 최씨 부인과 이성계의 아내, 한씨 부인이 이성계를 보고 안절부절 못했다. 불안하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저분한 건 둘째치고 술냄새까지 풀풀 풍겼기 때문이다.
털썩!
마니응개가 이자춘의 오른쪽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이성계는 식탁 옆에 서서 아버지와 어머니, 이복형제들, 그리고 아직 어린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식사를 하던 사람들도 이성계를 쳐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하는 거냐? 앉거라.”
이자춘이 한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성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시 주춤거리다가 아내의 옆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50대가 아니라 10대의 아내를 보니 기분이 이상하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한씨는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아내는 10대 후반인데다 임신 중이었다. 그래서 조강지처가 아니라 손녀딸을 보는 느낌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최씨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이성계도 어머니를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머니…….’
살아 계신 어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나이든 남자들에게 돌아가신 어머니란 그런 존재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우는 건 그다지 현명한 처신이 아니었다. 이성계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성계가 아직 술이 덜 깼나 봅니다.”
이성계보다 두 살 많은 이천계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러자 이씨 부인도 거들었다.
“우리 성계는 차암~ 좋겠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술이나 마시고, 사냥이나 다니고! 안 그래 동생~?”
둘째 부인이자 이성계의 생모인 최씨 부인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자춘마저도 이성계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똑같았다. 심지어 어머니인 최씨 부인과 아내인 한씨 부인까지도.
“저…… 부인,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성계가 옆에 앉은 아내에게 속삭였다. 음식을 깨작거리던 한씨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지금 정확히 몇 살이오?”
“예?”
“아니 그러니까…… 올해가 몇 년이오?”
“하아아~”
열여덟 살의 임산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술이 덜 깨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방님은 스무 살입니다. 지금은 지정 14년이고요.”
“아아 그렇군! 고맙소 부인!”
이성계가 해맑게 웃었다.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왜 저렇게 기뻐하시지……?’
한씨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서방님의 눈빛이랑 분위기가 달라졌어. 콕 찍어서 말할 순 없지만…….’
한씨 부인이 이성계의 옆모습을 흘끔거렸다. 이성계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무렵의 나는 사냥과 술에 빠진 철부지였지. 미래에 대한 계획도, 현재에 대한 책임감도 없는…….’
오래된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지정(至正)은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의 연호다. 지정 14년이면 공민왕 3년이고, 서력으로는 1354년이지. 그렇다면 지금 중국의 정세는 분명…….’
“혼란 그 자체입니다. 홍건적도 문제지만 장사성이 더 큰 문제예요.”
이자춘의 책사 역할을 겸하는 장수 카이샨이 원나라 말로 말했다. 그러자 이원계가 물었다.
“장사성보다 홍건적이 더 문제 아닌가요? 특히 곽자흥과 주원장의 무리는…….”
카이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규모로 보나 기세로 보나 홍건적이 가장 위협적이죠. 하지만 문제는 장사성입니다.”
원나라 황실 재정의 80%는 소금에서 나왔다. 그런데 소금장수 출신의 한족(漢族) 장사성이 바로 그 소금을 실어 나르는 대운하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었다.
원나라가 홍건적보다 장사성을 먼저 토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장사성은 곧 무너질 겁니다. 차간 테무르를 비롯한 지주(地主)들도 의병을 일으키고 있고, 하남 지방의 지주 이사제처럼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한족(漢族)들도 많으니까요.”
카이샨이 열변을 토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도 우리 원나라를 도울 겁니다. 토크토아(脫脫) 승상이 황제의 칙명을 빌어 파병을 요청했으니까요. 고려 장수 40명의 명단이 토크토아 승상에게 넘어갔으니, 고려의 파병은 시간 문제에 불과합니다.”
이자춘이 허공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였다.
“장사성을 토벌해서는 안 됩니다.”
이성계가 말했다.
“무어라? 어째서 그렇소이까, 셋째 공자?!”
원나라 황금씨족의 후예를 자처하는 카이샨이 외쳤다. 이성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곽자흥과 주원장, 장사성, 진우량, 서수휘, 유복통이 서로 싸우게 해서 힘을 빼 놓아야 합니다. 그전까지는 병력을 보전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꺼번에 몰아치는 거지요.”
“하지만 이대로는 국가 재정이…….”
“황실의 사치가 도를 넘었습니다. 황제 폐하를 미혹하는 라마교(티벳불교)를 승려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뭐, 뭐라고요?”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대원제국의 황제를 대놓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특히 카이샨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나라와 한족들의 나라, 그리고 고려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처럼요.”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소?”
카이샨이 고함쳤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이자춘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복형 이원계가 웃으며 말했다.
“성계야, 제발 정신 좀 차리거라. 홍건적이라면 몰라도 썩어빠진 고려가 어찌 천하를 삼분한단 말이냐?”
이원계의 말대로 고려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백성들은 집과 땅을 잃고 권세가의 노비가 되었고, 왜구들은 전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고려는 새롭게 태어날 겁니다. 아니, 완전히 새로운 국가가 될 겁니다.”
이성계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설마 바얀테무르 왕의 개혁 나부랭이가 성공할 거라고 믿는 겁니까?”
카이샨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이천계와 이씨 부인의 얼굴에도 비웃음이 가득했다.
“아니오, 결국엔 실패할 겁니다.”
이성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로……?”
“내가 고려를 바꿀 겁니다.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요.”
넓은 전각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입을 반쯤 벌리고 이성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오호호호호!!
30여 명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는 사람은 이자춘과 마니응개, 최씨 부인, 그리고 한씨뿐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배를 잡고 웃던 카이샨이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뭐, 누구나 꿈을 꿀 수는 있지요. 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어린아이의 헛소리, 술주정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도.련.님!”
카이샨이 이성계를 도발했다. 하지만 74세의 이성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증명하고자 합니다.”
“예? 무엇을 말입니까?”
“제 실력 말입니다. 격구 시합도 좋고 활쏘기도 자신 있지만, 기왕이면 기갑기 대결이 어떻겠습니까?”
“기, 기갑기 대결이요?”
“그렇습니다.”
“잠깐! 애초에 넌 기갑기도 없잖아? 도대체 뭘로 대결하겠다는 거야? 설마 유린청만 있으면 제가 이길 수 있어요~! 뭐 그딴 개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이천계가 시비를 걸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기갑기라면 오르타크가 있지 않습니까?”
“오르타크? 오르타크는 훈련기잖아?”
“훈련기로 결투를 하겠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훈련기는 크기가 작고, 출력이 낮고, 속도가 느렸다. 필살기나 궁극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기갑기에 처음 타는 신병을 위한 연습용 기갑기였다.
그런 훈련기를 타고 싸우겠다는 자체가 기갑기에 대한 무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기갑기와 기갑기의 싸움도 사람과 사람의 싸움처럼 등급, 즉 체급이 깡패였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내가 상대해 주지! 이 형님이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마!”
이천계가 호기롭게 외쳤다. 아버지 이자춘에게 잘 보일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천계의 기갑기는 성명기갑(成名機甲), 즉 네임드 기갑기는 아니었지만 원나라의 일급 장인들이 만든 고급품이었다. 훈련기는 물론이고 웬만한 양산형 기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하지만 이성계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거절한다.”
“뭐, 뭐야?”
“싸움도 수준이 맞아야 하지! 안 그래?”
이천계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이 자식,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지?’
이성계가 마니응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니응개 장군님, 한 수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예? 제가요?”
마니응개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지금 저한테…… 가베치 장군에게 기갑기 결투를 신청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십니까?”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오! 공자님은 전혀 모릅니다!”
환갑을 넘긴 노장 마니응개가 소리쳤다.
“기갑기와 기갑기사가 동조화되면 감각이 공유됩니다. 전쟁터에서 적 기갑기의 팔다리를 뽑아낼 때 기갑기사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기갑기 째로 온몸이 뭉개지고 산채로 불태워지며, 뇌전에 지져지는 그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들어본 적 있냔 말입니다!”
“예, 있습니다.”
이성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주 많이요.”
***
약 반 시진(1시간) 후, 화령성 외성(外城)에 위치한 연병장.
“부름에 응하라, 오르타크여.”
가베치 장수 겸 기갑기 훈련교관 무칼리가 말했다.
기우우웅-!
3장(9m) 크기의 기갑기가 공간을 가르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