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군주 이성계-3화 (3/33)

003. 인생 2회차

꽈아앙-!

길달의 거대 망치가 유린청의 가슴을 정통으로 때렸다. 일반 공격도 아니고 박자청의 궁극기 <대지붕괴>였다. 광역기로 쓰면 반경 30장(90m) 안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기술이었다.

‘그걸 정통으로 맞아 버렸으니…… 아무리 유린청이라 해도 버틸 수가 없었겠지.’

유린청은 원래 기동형, 저격형 기갑기였다. 이성계의 계급이 오르면서 지휘형 기갑기로 진화(업그레이드)되었다. 통신 성능과 방호력을 대폭 강화한 것이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이성계는 몸의 일곱 구멍(七孔)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 갔다.

‘무식한 놈! 아군일 땐 든든하더니 적이 되니 참으로 무섭구나.’

이성계가 씁쓸하게 웃었다.

‘바로 그 점 덕분에 노비나 다름없던 놈이 공조판서까지 된 거였지만.’

이성계가 숨을 거두기 직전, 공민왕(의 혼령)이 조종석 안에 등장했다.

“어떠냐? 믿었던 자들에게 살해당하는 기분이?”

공민왕이 조소했다. 피투성이가 된 이성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공민왕이 으르렁거렸다.

“무어냐 그 웃음은? ……그래, 짐(朕)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게냐! 참으로 시건방진 놈이 아닌가?!”

공민왕이 복잡한 눈으로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증오와 회한과 동정심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공민왕도 친자식처럼 귀여워했던 자제위에게 살해당했으니까.

“만약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민왕이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겠느냐?”

죽어 가던 이성계가 공민왕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개경의 모든 여인들을 애닯게 만들었던 강윤충보다 더 잘생겨 보였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검푸르게 굳어 가던 이성계의 입술이 마지막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좋다. 내 믿어 보겠노라.”

공민왕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믿어……? 그게 무슨…… 말……?’

툭.

태조 이성계의 머리가 모로 꺾였다.

쉬우우웅-!

유린청의 눈에서 광채가 사라졌다.

쿠웅!

유린청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X자로 교차해서 양쪽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흐흑…… 죄송합니다 태상왕 전하…… 으흐흐흑…….”

박자청이 흐느꼈다.

***

며칠 뒤,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회회아비(이슬람 상인)들에게서 구한 바실리스크의 시체를 광화문 밖에 효수하였나이다. 한양 백성들이 돌을 던지며 분노하고 있사옵니다.”

상복을 입은 하륜이 말했다.

“태상왕 전하께서는 거대 괴수를 막기 위해 악전고투하시다 장렬히 전사하시었다…… 그렇게 공표했기 때문이옵니다. 실록에도 그리 지록될 것이옵니다.”

태종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 역시도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번 거래를 중개한 송상(松商)들은 물론이옵고 아랫것들 입단속에도 만전을 기하였사옵니다. 심려하실 것은 없사옵니다.”

“만사 불여튼튼이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륜이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태종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온데…… 유린청이 두 팔을 가슴에 붙이는 바람에 태상왕 전하의 시신을 빼낼, 아니 모실 수가 없사옵니다. 기갑기와 중장비를 동원해서 뜯어내면 되긴 합니다만…… 어찌하오리까?”

태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륜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흠! 하오면 공민왕의 전례에 따라 기갑기 째로 매장코저 하옵니다.”

“그리 하시오.”

태종이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린청은 환조(이방원의 할아버지, 즉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께서 물려주신 귀한 기갑기요. 아깝지만 하는 수 없지.”

말로는 아깝다고 했지만 사실 별로 아깝지는 않았다. 요즘 기갑기들은 총통이나 대포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마도공학자 최무선과 그의 아들 최해산 덕분에 ‘배우기 힘들고 화력도 낮은’ 활 대신에 마력(魔力) 화포와 총통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유린청 같은 궁술 전용 기갑기는 퇴물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이성계 같은 ‘고인물’이 파일럿이라면 이야기가 달랐지만…….

‘하지만 군관들에게 아바마마와 같은 능력을 기대할 순 없지. 아바마마와 견줄 만한 장수는 반만년 역사를 통틀어 봐도 한손에 꼽을 정도니까.’

이방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괴물 같은(?) 아버지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자신이 새삼스레 대단하게 느껴졌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국장도감에 그리 이르겠나이다.”

하륜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자 태종 이방원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말이오…….”

“하문(下問)하시옵소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구려.”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아버지, 아니 태상왕 전하께서 폭주하신 이유 말이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하륜이 조심스레 말했다.

“연세가 연세인지라…… 혹여 치매(癡呆)가 아니셨을지…….”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태종이 하륜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하륜이 재빨리 엎드리며 외쳤다.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태종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그렇게 어설프게 하지는 않았을 터.’

이성계가 누구인가? 동아시아, 아니 세계 최고 수준의 군인이자 무사가 아닌가?

‘박자청은 아버지의 정신이 말짱했었다고 보고했다. 뭔가 헛것을 보는 것 같긴 했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귀신의 짓인가?’

태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 아바마마의 시대는 끝났소.”

태종이 하륜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말은 정도전의 시대도 끝났다는 말이오.”

엎드려 있던 하륜이 태종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우리의 시대를 열어가 봅시다.”

상복을 입은 태종 이방원이 씨익 웃었다. 하륜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이성계의 그늘에 가려 있던 이방원! 정도전의 그늘에 가려 있던 하륜!

그들의 시대가 지금 막 시작되고 있었다.

‘……?’

이성계가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정성껏 장식된 천장이었다.

‘크윽……!’

이성계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숙취가 어찌 이리 심하단 말인가?’

이성계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 침상……?’

투박한 침상이었다.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담요가 깔려 있었고, 비단과 무명천을 이어 붙여 만든 이불이 덮여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군, 이런 거친 침구는…….’

이성계의 몸은 값비싼 비단 금침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존이 된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거칠게 먹고 험하게 잔 것은 중년까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산에서 야영하고 들에서 노숙했다. 한여름에 갑옷을 입은 채로 자거나, 한겨울에 불을 못 피우고 자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즉위한 뒤에는 그런 적이 거의 없었다. 고려의 병권을 장악하고 대마도를 짓밟아 버렸기 때문이다.

중원 대륙도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적어도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여긴 대체 어디지?‘

이성계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넓은 방 안이 원나라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허어~ 아직도 원나라 습속을 따르는 자가 있단 말인가? 원나라가 망한 지 수십 년이 지났거늘…….’

신기해하던 이성계가 습관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이게 뭐야? 왜 이렇게 허전해?!’

자신이 상투머리가 아니라 체두변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수리를 중심으로 머리 대부분을 밀어 버리고, 약간의 앞머리와 옆머리만 남긴 몽골식 변발이었다.

‘참으로 황망하구나! 대체 누가 내 상투를……? 가만! 옷도 몽골 옷이잖아!!’

이성계가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살폈다. 상하의 모두가 몽골식 비단옷이었다.

‘허어~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성계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왜 이래?!!”

이성계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내 몸이 젊어졌잖아?!”

깜짝 놀란 이성계가 온몸을 만져 보았다. 푸석하고 늘어진 70노인의 몸이 아니라 탱탱하고 단단한 젊은이, 그것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몸이었다.

‘이럴 수가…….’

이성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더 알 수 있었다.

‘이 방……! 함흥에 있을 때 쓰던 방이잖나?’

20대 초반에 개경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썼던 바로 그 방!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침상부터 이불까지, 벽 장식에서 창문 모양까지 똑같았다.

그때였다.

‘잠깐! 나는 분명히 죽었었는데……?’

그제서야 마지막 순간이 기억났다. 길달의 궁극기를 맞고 유린청의 조종석에서 죽었던, 바로 그 순간이.

‘그렇다면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나는 왜 젊은 시절 모습으로, 그것도 원나라 복식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곳은 꿈속인가? 아니면…… 저승인가?’

이성계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패닉에 빠져 있었다. 바로 그때,

“일어나셨습니까?”

몽골 말이 들려왔다. 이성계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았다.

뚜벅 뚜벅 뚜벅.

당당한 체구의 가베치(가별초) 장수가 걸어 들어왔다. 사람의 붉은 색 피와 괴물의 초록색 피가 잔뜩 튄 몽골식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성계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마니응개 장군! 아직 살아 계셨소이까?”

마니응개(亇尼應介)라 불린 장수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원나라 말로 말했다.

“예, 애석하게도 저 아직 안 죽었습니다. 그리고 왜 고려 말을 쓰십니까? 아직 술이 덜 깨셨습니까?”

이성계가 눈을 깜박이며 마니응개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원나라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어렸을 때는 원나라 말이 고려 말보다 더 편했었지…….’

화령(함흥)은 북쪽의 여진, 남쪽의 고려, 서쪽의 원나라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의 상당수가 고려 말, 여진 말, 몽골 말을 모두 할 수 있었다.

“밍간(천호:千戶)께서 원나라 말만 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얼마나 더 실망시키려는 겝니까?”

60대의 여진족 노(老) 장군 마니응개가 꾸짖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성계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엿보였다.

이성계는 어렵지 않게 그 마음을, 말썽쟁이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 같은 마니응개 장군의 마음을 알아챘다.

지금의 이성계는 산전수전 공중전에 정치경험까지 풍부한 70대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마니응개 장군의 마음을…….’

이성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시 뵙게 되어서 참으로…… 참으로 반갑습니다, 마니응개 장군!”

마니응개가 뜨악한 표정으로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 왜 이래? 또 무슨 속셈이야?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 이러지?’하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양미간을 접으며 이성계를 바라보던 마니응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흠! 의관을 정제하고 대원각으로 오십시오. 밍간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가……?’

이성계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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