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군주 이성계-2화 (2/33)

002. 용의 눈물 (2)

전장(戰場)의 푸른 악마, 유린청.

지난 50여 년간 동아시아를 주름잡았던 최강의 기갑기가 아공간에서 걸어 나왔다.

쿵! 쿵! 쿠우웅!

높이 5장(15m), 무게 6만 근(36톤)의 철갑거인이 쪼그려 앉으면서 이성계를 감싸 안았다. 그와 동시에 세 겹의 흉갑이 상하좌우 네 방향으로 열리며 조종석이 드러났다. 이성계가 가볍게 몸을 날려 착석하자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 장갑이 닫혔다.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이 모든 과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젠장……!”

대호군 박자청이 이를 갈았다.

‘기갑기 탑승만은 막았어야 했는데……!’

이성계가 아니었다면 30여 명의 내금위가 즉시 공격했을 것이다. 기갑기사들은 기갑기에 탑승하는 순간이 가장 취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상왕 전하를 해할 순 없지 않은가?’

박자청도, 내금위 무사들도 차마 공격하지 못했다. 태종의 언질이 있었다 해도 상대는 이성계였다. 구국의 용사, 태종과 정종의 아버지, 건국의 영웅을 누가 감히 공격한단 말인가?

“어찌하오리까 전하!”

박자청이 선정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 즉 임금의 집무실이었다.

“……방법이 없지 않소?”

왕의 옥음이 들려왔다. 박자청의 왼쪽 귀에 장착된 마력통신기가 깜빡거렸다.

“한밤중에 창덕궁을 침노한 거대 괴수를 퇴치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시다니…… 이 얼마나 애통한 일이오?”

태종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섬뜩했다.

왕의 의중을 알아챈 박자청이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쇠맛이 입안을 적셨다.

“신 박자청,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박자청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태종 이방원이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경의 뜻대로 하시오.”

***

[오랜만입니다 태상왕 전하.]

조종석에 앉은 이성계의 머릿속에 유린청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높낮이가 없는 기계적이고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지금부터 상태 확인을 시작하겠습니다. 기감(氣感) 양호. 자세제어 양호. 마력회로 양…….]

“그만! 곧바로 기동을 시작한다!”

이성계가 조종간을 잡으며 외쳤다.

[알겠습니다. 안정화 절차 강제 종료.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그우우우웅~

유린청의 마력핵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에너지가 정교한 마력회로를 타고 이성계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성계가 그 기운을 대주천시켰다. 거대한 기운이 하단전과 중단전을 뚫고 올라와서 상단전을 가득 채웠다. 쾌감과 고통이 동시에 몰려왔다. 늙은 육신이 덜덜 떨렸다. 이성계가 얼마 남지 않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슈우우웅-

[동기화 완료. 출격 준비 완료. 구동을 시작하십시오.]

이성계가 눈을 떴다. 창덕궁의 지붕들이 내려다 보였다. 종묘는 물론이고 남산과 경복궁, 북악산과 동대문까지 훤히 보였다. 고개를 숙여 발치를 보았다. 박자청을 비롯한 내금위 무사들과 금군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인간 이성계가 아니라 타이탄(打夷彈) 유린청이었다.

기우우웅-!

유린청의 두 눈이 도깨비불처럼 불타올랐다. 왼쪽 가슴에 새겨진 거대한 <李>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거대한 몸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력이 충전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철컹 소리와 함께 허리에 감겨 있던 거대한 활이 살짝 튀어나왔다. 유린청이 왼손으로 잡고 뽑아내자 동앗줄 같은 활줄이 휘리릭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결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활몸이 위아래로 쭉 펴졌다. 길이가 2장(6m)이나 되는 활이 순식간에 완성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유린청의 오른쪽 손목이 위로 꺾였다. 그러자 오른 팔뚝 안에서 거대한 화살이 튀어나왔다. 최고급 마정석으로 만든 화살촉이 횃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공기중의 마기(魔氣)가 일정 수준 이상 응집되면 나타나는 도깨비불이었다.

유린청이 대궐의 서까래보다 굵은 화살을 활줄에 걸고 뒤로 당겼다. 뿌드드득 하는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금위 군관들이 소리쳤다.

“태상왕 전하의 궁극기, <대초명적(大哨鳴鏑)>이다!”

“화살이 선정전 쪽을 겨누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조치를……!!”

바로 그 순간,

퉁!

하고 유린청이 화살을 발사했다.

“끼에에에에-!”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화살이 날아갔다.

콰과과과광-!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모두가 충격과 경악 속에서 선정전 쪽을 바라보았다.

“……!!”

“다행입니다! 도사들과 법사들이 막았습니다!”

내금위 군관들이 소리쳤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푸른 눈, 갈색 눈의 색목인들이었다. 그들은 마귀 마(魔)자를 빼고 <법사>라고 불리고 싶어했다.

선정전을 둘러싸고 있던 수십 명의 도사들과 법사들이 부들부들 떨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눈과 귀, 코에서 피를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도력(道力)과 마력(魔力)을 끌어올려 결계를 쳤지만, 대초명적의 충격이 너무 커서 몸이 상한 것이다.

“쿨럭! 태상왕의 궁극기 대초명적!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쿨럭 쿨럭!”

의원들이 도사들과 법사들의 등에 두 손을 대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금위 군관들이 아우성쳤다.

“대호군 영감!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옛 정 때문에 힘드신 거라면…….”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닥쳐라 애송이들아!”

박자청이 돌덩이 같은 두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태상왕 전하와 나는! 네놈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온갖 인외마경을 헤쳐 왔느니라!”

박자청이 눈물을 흘리며 고함쳤다.

“그러므로! 태상왕 전하는 본좌가 직접 상대할 것이다! 너희는 조용히 대기하다가 필요할 때만 나를 도와라! 이는 어명이기도 하다!”

“예, 영감!”

군관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박자청이 허공을 향해 외쳤다.

“나와라 길달(吉達)!”

구우웅-!

공간이 열리며 육중한 기갑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룻밤에 신라 도성에 다리를 놓은 도깨비, 길달의 이름을 딴 박자청의 전용기였다.

쿵-! 쿠웅-! 쿠우웅!

공간의 틈새에서 걸어 나온 길달이 박자청의 머리 위로 몸을 숙였다. 50대 초반의 박자청이 가슴 부분의 조종석에 올라탔다. 길달이 몸을 일으키며 유린청을 막아섰다.

“태상왕 전하!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기(氣)가 실린 박자청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이상은 반역이옵니다!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길달이 허리에 꽂혀 있던 몽둥이를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길달의 아랫배에 장착된 마력핵이 무겁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기기잉-!

황토색 기운이 몽둥이로 전해졌다. 그러자 몽둥이 끝이 텅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망치로 변형되었다. 목공용 망치가 아니라 전투용 망치, 즉 배틀 해머(Battle Hammer)였다.

경복궁과 창덕궁, 시전거리, 종묘, 한양 도성, 성균관 건설을 지휘한 조선 최강의 공병 지휘관 기갑기, 길달!

그런 길달이 거대한 해머를 꼬나쥐자 태산 같은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자청아…….”

유린청 조종석에 앉은 이성계가 한탄했다.

“내가 세운 나라에서 역적이 되다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세상에 나 같은 군주가 어디 있단 말이냐?”

“전하! 제 말씀은 그것이 아니오라…….”

“시끄럽다! 자청이 너도 내가 자식처럼 귀애하지 않았느냐? 안 그랬으면 너는 아직도 희석이네 집 마름이나 하고 있을 터! 그런데도 너는 나를 배신하고 방원이 놈에게 붙었더랬지! 이제 와서 말이지만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더냐!”

“죄송합니다 전하!”

“됐다! 나는 이미 너희들 모두를 용서했느니라! 너희들도 자식이 있으니 내 마음을 미루어 알 것이다!”

“으흐흑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허! 뚝 그치지 못할까? 자청이 너는 산적 같은 놈이 눈물이 많아서 탈이라고 몇 번을 말하였느냐?”

이성계가 허연 수염을 떨며 외쳤다. 그러자 박자청이 커다란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정신 차려라 자청아! 저놈부터 해치우자꾸나!”

날씬하고 훤칠한 기갑기 유린청이 왼손으로 선정전 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괴력형 중(重)기갑기 길달이 무거운 몸을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전하! 아까부터 무엇을 보고 계시옵니까?”

박자청이 울먹이며 외쳤다. 그러자 이성계가 고함쳤다.

“무어라? 네놈 눈에는 저것이 안 보인다는 말이냐?”

“무엇이 말씀이옵니까? 선정전과 궐내각사들밖에 없지 않사옵니까?”

“허어 이럴 수가……!”

이성계가 혀를 찼다.

“저 큰 놈이 안 보인단 말이냐? 공민왕의 기갑기, 보타슈리(寶塔失里)가!”

“예? 보타슈리 말이옵니까?”

박자청이 깜짝 놀랐다. 공민왕이 사랑하는 아내 노국대장공주를 기리며 만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갑기’ <보르지긴 보타슈리>! 그 전설의 기갑기가 등장했다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길달의 마력탐색기가 전방을 빠르게 탐색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전하! 부디 옥체를 보중하소서! 성심(聖心)을 다잡으셔야 하옵니다!”

박자청이 또다시 눈물을 쏟으며 외쳤다.

“보타슈리는 전조의 군주 왕전(고려의 군주 공민왕)의 관이 되어 땅에 묻히지 않았사옵니까? 헌데 30년이나 지난 지금 어찌 등장할 수 있겠사옵니까?”

“나도 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있지 않느냐?”

이성계가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실제로 이성계의 눈에는 ‘걸어다니는 예술품’ ‘황금의 기갑기’ 보타슈리의 아름다운 자태가 뚜렷이 보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게 확실했다. 박자청의 목소리와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자청이 녀석은 거짓말을 전혀 못하니까.’

“네놈이 귀신이든 괴물이든 상관없다! 내가 지금 퇴치해 버릴 것인즉!”

이성계가 고함쳤다.

키우우웅-!

유린청이 또다시 활쏘기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도 목표는 선정전 쪽이었다. 오른손목이 위로 꺾이자 철컥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화살이 튀어나왔다. 유린청이 그 화살을 활에 매겼다.

선정전에 있던 도사들이 황급히 마정석들을 땅에 박았다. 그러자 굉음과 함께 작은 산들이 솟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전하!”

박자청이 고함치며 전투망치를 치켜들었다.

쿠오오오오-!

황토색 마력핵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량의 기운이 전투망치를 감쌌다.

“길달의 궁극기인 <대지붕괴(大地崩壞)>가 아니냐? 자청이 녀석, 진심이로구만.”

이성계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말 그대로 대지를 무너뜨리는 파괴력! 한 방만 맞아도 기동불능이다!’

유린청의 거대한 몸이 보법(步法)을 밟으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푹! 푸우욱-!

유린청의 두 발이 거대한 늪에 박혔다. 몸부림을 칠수록 더욱 빠져들었다.

“마정석으로 지반을 액화시켰구나! 허나 소용없다!”

유린청이 훌쩍 뛰어오르려고 했다. 그러자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 이놈들이 어느새?!”

10여 명의 내금위 군관들이 기갑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좁은 궁궐 안이 아니었다면 30명 전원이 기갑기에 탑승했을 것이다.

검은색 전립과 뀡 깃털을 형상화한 머리에, 남색 철릭과 오방색 옷소매를 형상화한 몸통을 가진 멋진 기갑기들이었다.

그러나 열 대 모두 양산형 기갑기였다. 게다가 전투용이 아닌 의장용이었다. 일대일이었다면 유린청에게 손쉽게 제압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훈련과 실전을 거친 기갑기사들이었다. 그래서 숫자의 이점을 노련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유린청이 강하다 해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놔라! 이거 놓으란 말이다!”

이성계와 유린청이 발악했다. 그러나 열 대의 기갑기가 팔과 허리, 목을 붙잡고 있어서 뿌리칠 수 없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옵소서 전하!”

박자청이 울부짖으며 전투망치를 휘둘렀다. 토(土) 기운이 충분히 응축된 거대한 망치가 밤하늘을 갈랐다.

콰아앙-!!

유린청이 길달의 망치에 직격당했다. 거대한 스파크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날벌레들이 순식간에 불타죽었다.

이성계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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