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용의 눈물 (1)
서기 1408년(태종 8년) 여름, 한양 창덕궁.
검붉은 저녁노을이 진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한양 도성이 시나브로 깜깜해졌다.
그러자 최고급 마정석(魔精石) 램프가 조선의 궁궐을 환히 밝혔다.
그 불빛에 이끌려 날벌레들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타 죽어 갔다.
마정석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경면주사로 그려진 마법회로, 즉 <부적>의 붉은 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날벌레가 그 선에 닿자마자 스파크가 튀었다. 작은 스파크였지만 날벌레들을 태워 죽이기엔 충분했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가 싱그러웠다. 개 짖는 소리, 닭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당하관들은 마정석이 탑재된 1인용 마력거(魔力車)를 타고 퇴청했고, 당상관들은 덮개가 달린 중형 마력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삼삼오오 걸어가던 궁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마력창을 들고 순찰하던 젊은 금군(禁軍)들이 궁녀들을 힐끔거렸다.
평화로운 여름밤이었다.
괴물들은 자주 출몰했지만 왜구와 홍건적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지옥 같던 고려 말보다 훨씬 나았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적어도 창덕궁 안은 그랬다.
단 한 사람,
화려한 전각의 대청마루에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70대 노인만 빼고.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오늘날이 있을 줄 알았으랴?”
노인이 한탄했다.
타고난 기골이 장대했지만 세월을 피하진 못했다. 어깨는 굽어들고 등은 앙상했다. 괴물 사냥을 종종 하는데도 근육에 탄력이 없었다.
<괴물(怪物)>은 요물(妖物)과 마물(魔物)과 괴수(怪獸)를 합친 말이었다. 사람보다 작으면 요물, 사람과 비슷하면 마물, 사람보다 훨씬 크면 괴수라고 불렀다.
노인이 술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차가운 술과 뜨거운 눈물이 메마른 가슴을 적셨다.
“다만 오래 살기를 원하였더니, 70이 지났는데도 죽지도 않는구나!”
탁!
노인이 술잔을 내려놓고 날벌레들을 바라보았다.
‘타 죽는 줄도 모르고 덤벼드는구나. 나 또한 저랬었지…….’
노인의 이름은 이단(李旦).
그러나 후손들은 왕이 되기 전의 이름에 묘호를 붙여서 이렇게 불렀다.
태조 이성계.
한민족 역사상 최강의 무사이자 신궁(神弓), 노련한 지휘관이자 백전불패의 전술가.
그러나 70살이 넘은 지금, 경호를 빙자한 감시를 받으며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퇴물에 불과했다.
그것도 평생 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친아들에게 빼앗긴 채로.
그에게 남은 것은 허울 좋은 태상왕(太上王)이라는 지위와, 날이 갈수록 오히려 선명해지는 옛 기억뿐이었다.
“아아 삼봉! 방번아! 방석아! 중전!”
이성계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쳤다. 삼봉 정도전은 뜻이 통하는 동지였고, 방번과 방석은 귀여운 아들이었다. 중전은 40세에 요절한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뜻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술잔에 담긴 보름달이 가만히 출렁거릴 뿐.
멍하니 앉아 있던 이성계가 정교하게 만들어진 향나무 상자를 꺼냈다.
일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물(器物)이었다. 관세음보살과 극락정토, 연꽃과 수미산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었다.
이성계가 기물의 한복판에 박힌 옥구슬을 눌렀다. 그러자 상자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내부에 있는 황금 원반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딩~ 디리링 디링~
삘리리~ 삘리리리~
가야금 소리와 억새풀피리 소리가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원반의 약 반 자(15cm) 위에 소례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이 등장했다.
그녀는 이성계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내, 신덕왕후 강씨였다.
물론 실물은 아니었다. 정교하게 배치된 마정석 회로가 만들어 낸 3차원 입체영상이었다. 크기도 두 자(60cm) 정도에 불과했다.
화관에 족두리를 쓰고 당의(唐衣)에 대란치마를 받쳐 입은 신덕왕후 강씨가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보 중전! 어찌하여 나를 두고 그리 일찍 갔단 말이오? 나보다 스무 살이나 어리면서! 어찌하여 나를 이리 외롭게 남겨 둔단 말이오! 참으로 야속하오 중전!”
이성계가 울부짖었다. 검버섯이 피어난 쭈글쭈글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허연 수염이 비를 맞은 것처럼 축축해졌다.
‘방원이 그놈은 이 마법영상기도 빼앗으려고 발광했었지!’
이성계가 이를 갈았다.
‘조선의 기틀을 세운 삼봉과 금쪽같은 내 아들들을 쳐죽인 방원이 이놈! 내 결단코 용서치 않으리라!’
지워 버린 줄 알았던 증오가 새삼스레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쩌겠는가? 대세가 기운지 이미 오래인 것을! 그리고 그놈 또한 내 아들인 것을……!’
“후우우우우…….”
이성계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괴로운가?”
마당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계가 고개를 들었다.
“……?!!”
황금색 곤룡포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중년의 나이였지만 빼어나게 잘 생겼다. 얼굴선과 손, 그리고 눈빛이 날카로웠다. 곤룡포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예인(藝人)이나 선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입체영상인가? 아니야! 저건 그딴 게 아니야!’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음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성계는 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이성계의 오른손이 조용히 움직였다. 마루 구석에 던져 뒀던 마정석 화살들을 슬쩍 집어들었다. 두 눈은 눈앞의 사내에 고정한 채였다.
마정석 화살은 말 그대로 마정석 화살촉이 달린 화살이다. 표적에 맞으면 폭발하거나 불이 붙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활은 방 안에 있지만 상관없다. 이 정도 거리면 투창처럼 집어던져도 되니까.’
백전노장 이성계가 왼손으로 침침한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눈에 힘을 주었다. 곤룡포를 입은 남자의 얼굴이 그제야 선명해졌다.
‘이…… 이럴 수가!!’
이성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대는 바얀테무르 왕, 아니, 공민왕이 아니시오?!”
이성계가 대경실색했다.
“전하를 붙이거라 이 건방진 놈아!!”
공민왕이 윽박질렀다.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친히 중용하고 키워 주었거늘! 반역을 일으켜서 수천 수만의 생령들을 학살해?? 그러고도 네 말년이 평안할 줄 알았더냐, 배은망덕한 버러지 놈아!”
“아니오! 권력욕 때문이 아니었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함이었소!”
이성계가 황급히 외쳤다.
“권문세족들은 산과 강을 경계로 고려의 땅을 나눠 가졌소! 그래서 왜적조차 막지 못하는 인세의 지옥이 되었었지! 대왕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끌끌 가소롭구나 성계야……!”
공민왕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내 일가붙이들과 왕씨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죽여 놓고, 겨우 그걸 변명이라고 내어놓느냐?”
“새 왕조를 개창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소! 홍무제도 10만 명이나 숙청하지 않았소이까?”
홍무제는 명 태조 주원장을 뜻했다. 이성계와 주원장은 비슷한 시기에 역성혁명을 성공시켰다.
“시끄럽다! 끝까지 반성도 사죄도 아니하는구나!”
공민왕이 고함쳤다.
“차라리 잘 되었다! 이 자리에서 네 목숨으로 속죄하거라!!”
공민왕의 영체에서 섬뜩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가 뚝 그쳤다.
그 순간, 이성계가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마정석 화살이 날아갔다. 공민왕을 통과한 화살이 담장에 박혀 폭발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이성계가 방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벽에 걸린 동개일습을 꺼내들었다. 동개일습은 활과 화살 세트를 뜻했다.
쐑! 쐐액! 쐐애액!
이성계가 공민왕을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이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수십 년 동안 전장을 누빈 백전노장다웠다.
퓻! 퓨퓻! 퓨우웃!
늙은 신궁 이성계의 화살이 공민왕을 여러 차례 꿰뚫었다. 공민왕의 반투명한 몸이 출렁거렸다. 잘생긴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마정석 화살이 효과가 있다는 뜻이었다.
“네 이노오옴!”
공민왕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이성계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예상대로군. 마석은 몰라도 마정석은 괴(怪)력(力)난(亂)신(神) 모두에게 효과가 있으니까.’
그러나 창덕궁도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다.
쾅! 콰아앙! 꽈과과광!
아름드리 기둥들과 서까래가 박살이 나서 날아다녔다. 담장과 대문이 폭발했다. 이성계의 화살들은 거대 괴수도 잡을 수 있는 특제품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태상왕 전하!”
궁궐을 숙위하던 금군들이 달려왔다. 계급에 따라 청색과 적색의 융복을 입고 갓을 썼다. 갓과 융복에는 방탄 처리는 물론이고 마법 무효화 처리까지 되어 있었다.
허리에는 용골(龍骨)로 만든 환도와 화살통을 차고 있었다. 모든 화살은 다양한 마법을 담은 마정석 화살촉이 박혀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복장을 한 대호군(大護軍) 박자청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오늘 밤의 궁궐 경비 책임자였다.
박자청의 눈에 비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화살을 쏘는 옛 주군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천명이었소! 하늘이 원하고 백성들이 원하는!!”
이성계가 고함을 지르며 화살을 연사했다. 마정석 화살들이 허공을 갈랐다. 담장이 박살 나고 지붕이 무너졌다. 늙어 쇠락했지만 여전히 강맹한 위력이었다.
이성계의 공병대장(工兵隊將)으로 이름 높은 50살의 박자청이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궁궐의 방어마법진을 뚫고 들어오다니……! 정신계 마물이냐?”
박자청이 고함쳤다. 그러나 검은 조선인 도사들과 색목인 마법사들 모두 어리둥절했다.
“모르겠습니다!”
“아무 것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조선에서 보안등급이 제일 높은 창덕궁이 이렇게 쉽게 뚫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
‘기(氣), 즉 마나나 에테르가 아니라 순수하게 리(理), 즉 영(靈)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강림했다는 뜻이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실의에 빠진 이성계가 기어코 정신줄을 놓았다는 뜻!
박자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외쳤다.
“소격전(昭格殿)과 마탑은 무얼 하고 있나? 무학대사와 국무(國巫)도 불러라!”
소격전은 도사(道士)들을 육성하는 관청이었고, 마탑은 마법을 연구하는 탑이었다.
칭기스칸이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후, 서양의 마법(학)과 동양의 선도(仙道)학이 활발하게 교류되고 있었다. 극동의 고려에 마탑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호군 나으리! 송구하오나 왕사(王師)께서는 이미…….”
젊은 금군이 조심스레 말했다. 박자청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무학대사는 3년 전에 입적했었지!’
박자청이 아쉬워했다.
‘무학대사만 살아 있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 텐데…….’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30여 명의 내금위 군관들이 빠른 속도로 몰려와서 이성계를 둘러쌌다. 내금위는 작년에 신설된 국왕 직속 경호부대였다.
‘보다 못한 금상(今上)이 친위 병력을 보냈군…….’
박자청이 침음성을 흘렸다. 금상은 물론 태종 이방원을 뜻했다.
30명의 내금위 군관 중 대부분이 전투계열이었다. 그들은 광학안경과 마력총통, 마법그물을 소지하고 있었다. 마법사와 의원들도 몇 명 보였다.
“태상왕 전하!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옥체를 범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내금위 군관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눈빛과 태도는 정반대였다.
‘물리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아니 사용하라는 어명을 받았나 보군…….’
박자청이 착잡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방해하지 마라! 저자를 반드시 없애야 한다!”
이성계가 절규했다. 그는 수십 마리의 숫사자들에게 둘러싸인 늙은 호랑이 같았다.
‘태상왕 전하가 10년만 젊었어도,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음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박자청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전하! 전하는 너무 연로하십니다! 전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던 이성계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나와라-”
“아차!”
박자청이 급히 외쳤다.
“모두 물러나라!”
30여 명의 내금위 군관들이 일제히 뒤로 뛰어올랐다. 일류 무사들답게 다리와 발바닥에 기, 즉 마나를 실었다. 그래서 도움닫기도 없이 1장(3m) 넘게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 순간,
키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세로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5장(15m) 크기의 거대 기갑기(機甲騎)가 걸어 나왔다.
태상왕 이성계의 전용 기갑기, 유린청(游麟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