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2화 〉늑대의 기사와 빙해의 소녀 (162/162)


  • 〈 162화 〉늑대의 기사와 빙해의 소녀


    급속도로 갑자기 상태가 안좋아졌다던 휘리엘 울펜슈타인의 몸은 다행히 엘핀이 도착할 즈음에는 괜찮아졌다. 엘핀에게 있어서는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는 어쩐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휘리엘의 몸상태는 여행을 버틸 수 있을만큼 충분히 회복되었으니 엘핀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그녀를 데리고 간티아 제국으로 돌아갔다. 여행길은 이전과는 달리 싱거울 정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끝났다.

    엘핀이 제국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일은 휘리엘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휘리엘은 물론 말렸으나 그의 쇠심줄 같은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휘리엘의 아버지, 울펜슈타인 공작과 제국의 황제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3개월 간의 정직이라는 것은 꽤나 가벼운 처사로군요.”

    휘리엘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그녀가 말하고 있는 상대는 물론 젊은 초월자 엘핀 세이피어였다. 엘핀 세이피어스는 한결 가벼워진 차림과 태도를 갖고 휘리엘과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륙의 공적인 휘리오비치를 퇴치한 것을 무시할 수 없었겠죠. 공작 각하께서는 꽤나 불만족스러워 하는 느낌이었지만요.”

    “어쩌면 일종의 휴가인   수 있겠네요. 근신 처분을 받은 것도 아니니까.”

    “그런거 같습니다. 저도 이렇게 가볍게 끝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웅님께서는 3개월  무슨 일을 할 생각이죠?”

    엘핀이 잠깐 눈을 찌푸리며 휘리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그의 눈을 스치기라도 한 걸까?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연 것은 휘리엘이 두 모금은 더 차를 마신 후에야 였다.

    “저도 지금까지 꽤나 오래 달려온 모양입니다. 당분간은 주변국을 둘러보면서 여행이라도 다녀볼 생각입니다. 제국은 제가 없다고 위험할만큼 만만한 나라가 아니니까요.”

    “그 말은 혹시….”

    “네, 쯔르레이… 그 녀석을 다시 찾으러 가볼 생각입니다.”

    엘핀 세이피어스는 다시금 무대 위에 오를 것을 선언했다. 엘핀의 어깨는 한결 가벼워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 떨쳐내지 못한 짐이 하나 있는 것이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만남.

    그리고 그가 버리고  소녀.

     전에는 엘핀을 버렸던 소녀.

    아름다운 금발을 나부끼던 작고 여린, 그렇지만 강한, 이상한 검을 들고다니던 소녀.

    붉은 눈의 보석을 지닌,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던 그 이상한 알 수 없는 소녀를 다시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차가 다 식어버렸네요.”

    엘핀은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잠시 이별입니다. 돌아올 때는, 아마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네, 꼭 데려오도록 하세요. 데려오면 제가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줄테니까요.”

    휘리엘이 꺄르르 웃었다. 엘핀은 그 대사에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멍때렸지만 이내 자그마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떠났다.

    이렇게 하나의 초월자가 자리를 떠났다. 목적지는 듄벨의 영지, 도시 벨루나였다.

    ~

    “아가씨!!”

    백발, 그리고 아름다운 청색 눈을 가진 소녀였다. 소녀의 이름은 미카엘 베르헬트, 애칭은 마이카. 백발의 소녀는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도망가고 있었다.

    그녀의 등에는 한 자루의 검과 거대한 크기의 배낭이 달려있었고 그녀의 옷차림새는 귀족 영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험가의 복장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지금 가출을 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뒤에서 기사들이 그녀를 쫓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기사들은 이 가녀린 소녀  명을 전혀 따라잡지 못했다.. 마이카는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후…  정도면 따라오지 못하겠지.”

    기사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거리를벌린 그녀는 지도를 꺼내들었다. 잠시 지도를 훑어보던 그녀는 곧 길을 파악하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편하게 풀리지만은 않는  곧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이 나타났다.

    “베르헬트 영애, 지금이라도 얌전히 자택으로 돌아가신다면 죄는 묻지 않겠습니다.”

    왕국 기사단이었다. 소식을 전해듣고 그녀의 속도를 따라잡았을 리는 없었으니 아마도 자신이 빠져나갈 것을 생각하고 미리 배치해둔 이들일 것이다.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이가 나서 마이카에게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누구 맘대로요?  누구도 내 행동을 강제할 순 없어요.”

    “베르헬트 가문은 왕국 아라곤의의 가신입니다! 그런 말은 반역죄로 다스려 질 수 있습니다. 말을 함부러…!”

    “그만.”

    마이카는 더 듣기 싫다는 듯 칼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다리는 비뚤어져 있었고 팔은 각도가 어긋나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검술로 따지면 완전 엉망인 자세였다. 그런데도 왕국의 기사들은 긴장을 놓지 못한 채 그녀와 대치하고 있었다.

    “대화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기사들이 오진 않았겠죠?”

    “…후회하실겁니다.”

    “누가?”

    그녀는 비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이깟 기사들 따위,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기사단을 전부 끌고 왔어도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왜? 어째서? 이런 가녀린 소녀가? 어떻게?

    잠시 후, 몇 명의 기사들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너무 느렸고 너무 약했다. 그리고 그들은 반쯤 얼어붙어 있었다. 마이카의 몸에서는 강렬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아직 서있는 이들 역시 몸을 떨어야 했다.

    “더할거에요?”

    남은 기사들은 각오를 다잡고 검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엄청난 추위 때문에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이미 전의는 꺾인 지 오래였다. 얘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이런 어린 소녀한테 이렇게 까지 당할 줄이야…!

    그래도 그들은 기사였고 물러설 수 없었다.

    남은 기사들이 다시 마이카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미 끝이 나있었다.

    마이카가 검을 휘두르자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남은 모든 기사들의 다리를 속박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다리는 더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녀는 유유히 기사들 사이를 넘어 빠져나왔다.

    마이카 베르헬트.

    새로운 초월자였다.

    어느 밤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아팠고 기침 하나 내뱉기 힘들어 고통스러워 하던 날이었다. 그  창문이 열렸고  수 없는 아이가 찾아왔다. 그 아이는 뜬금없이 아버지의 얘기를 하고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었다.

    병이 고쳐진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머리가 하얗게 새고는 몸에서 한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체할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몸은 가벼웠고 정신은 말끔해졌다. 아팠을 때가 언제였는지 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건강해졌다.

    그때는 마냥 좋았다. 머리가  이상하게 변하긴 했지만, 건강해졌고 강해졌다. 그녀가 곧 초월자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라의 경사였다. 이거면 명령을 어기고 나라를 떠난 아버지도 사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지만 불길했다. 그 아이가 말했었다.

    ‘이 것이 네 아비의 마지막이다.’

    불길한 말이었다. 분명 그 아이는 아버지가 보낸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용을 찾으러 간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해낸 것이다. 용을 찾아, 자신을 고쳐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것이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점점 초조해졌다.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정말로 그때는 아버지라고, 제대로 불러 주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인장 뿐이었다.

    어느 한 도둑 길드에서 은밀히 접선을 해왔다. 베르헬트 가문의 인장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매입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도둑 길드 따위에게 인장을 빼앗길 리 없었다. 그러나 인장은 진짜였고 그들에게서는 인장과 정보를 살 수밖에 없었다.

    인장을 판 이는 과거의 자신 같은 금발 머리를  적색 눈의 소녀였다고 한다.

    어째서인지 마이카는 그 소리에 방향 모를 질투심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어째서 그런 소녀에게 인장을 맡긴 걸까.

     소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이카 베르헬트는 인장을 찾고 나서 마음 먹었다.

    그 소녀를 찾아가기로.

    그 소녀만이 유일한, 아버지에 대한 단서였다.

    아버지가 죽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초월자였다. 자신 같은 것보다 더욱 강하고 대단한. 설사 상대가 용이라 하더라도. 마이카는 믿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찾아서 다시,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었다.

    아팠고 아버지는 없었고.

    그러니 이제 돌려받아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왕국에서는 물론 아버지를 찾는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나  년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그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 나설 것이다.

    집에서도, 나라에서도 초월자로 각성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말렸다. 그러나 이미 초월자로 각성한 그녀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날을 잡아 빠져나와서 여행길에 몸을 올렸다.

    따라오는 기사들이 없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구속을 풀고 그녀를 쫓을만한 수준의 기사들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시 지도를 꺼내 길을 확인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도를 거꾸로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는 여행의 초보자였으니까.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용을 찾으러 갔다. 자신도 아버지를 찾기 위해 그만한 고행을 치러야겠지. 다시 제대로 든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았다.

    목적지는 듄벨 영지의 도시 벨루나, 그 소녀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었다. 두 번째 초월자가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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