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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60/162)


  • 〈 160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뮈미르의 목이 속절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같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뮈미르의 목은 여전히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니, 물론 그곳에는 이전과는  차이가 있었다. 뮈미르의 목에는 검은 비늘들이 올라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뮈미르의 작은 양뿔 같던 뿔이 더욱 크고 기괴한 모양으로 자라고 있었고 눈에서는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흘러내리며 세로 동공이 더욱 길게 확장되었다.

    그리고는  세상이 잠시 멈췄다.

    아주 극한으로 짧은 그런 시간이었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짧은 그런 시간이 잠시 숨을 죽였다. 그리고 시간이 돌아가면서  노예 상인의 거처 안에 있는 모든 이들, 생하울라와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노예 상인과 그들의 부하들이 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짓누르는 가압적인 중력을.

    채 비명을 지를 시간도 없이 아직 살아남아서 결계의 끝자락에서 목숨을 부지하던 인간들은 전부 순식간에 가해지는 중력에  몸이 찌부러져 죽었다. 그들에게는 그나마 행복한 죽음이었다. 적어도 고통은 한 순간이었으니.

    그 압력이 가해지는  생하울라에게도 똑같이 마찬가지인 듯 그 역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지푸라기들과는 달리정면으로  압력에 대항해 버텨내고 있었다. 상태가 영 괜찮은 것은 아닌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력을 버티고 있는 것이 그가괜히 초월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쯔르레이와 뮈미르,  둘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흑룡의 권능이 그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만물을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모든 힘을 권능으로 다스리는 흑룡의 피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낯익은 경험이었다.

    쯔르레이는 이와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이미 있었다. 과거 빙룡의 둥지에서 탈출할 때, 솜뭉치가 일으켰던 것과 같았다. 자신은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 역시 똑같았다. 다른 점은 이곳에는 그런 이가 하나 더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 뮈미르와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둘 모두 흑룡의 피를 갖고 있다는 것.

    뮈미르는 피눈물을 흘리며 한쪽의 잘린 팔을 감싸 안으며 일어섰다. 이미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정신은 혼미했고 체력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있는 것은 뮈미르였다.

    생하울라가 아니라 뮈미르가 서있었다.

    [무릎, 꿇었구나.]

    뮈미르가 한   점 고통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소리는 작았으나 또렷했다.

    [어떠한가, 비천한 자여. 결국 그대가 지고 내가 이겼노라.]

    뮈미르는 그대로 쯔르레이의 손에서 떨어진 랜슬롯을 주웠다. 생하울라는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으나 한계가 왔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못하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힘이었다. 중력이 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뮈미르는 그대로 랜슬롯을 거대한, 원래 그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크기는 쯔르레이가 임시로 늘려서 사용하던 것보다 더욱 크고 장엄하였다. 자신의 진정한 주인의 손 아래에 그 본래의 모습을 내보인 것이다. 그 크기는 생하울라의 도끼보다도 훨씬 장대한 것이었다.

    한 손으로 랜슬롯을  뮈미르가 그대로 그 손을 들어올렸다. 생하울라가 휘둘렀을 때 처럼 생기를 끌어내지는않았다. 이미 그녀에게는 남은 생기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러나 일은

    아까와는 정반대의 광경이었다. 생하울라가 무릎을 꿇었고 그 위에 뮈미르의 망치가 자리를 잡았으니.

    [그대는 비천한 것이 아니라 비참하구나.]

    패자를 조롱하는 뮈미르의 말이 생하울라의 귀에 꽂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하울라는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힘이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 패자를 위한 잠깐의 예의를 바라는 시간이 지난후였다.

    그대로 뮈미르의 망치가 내리쳤다.

    쯔르레이의 눈에 생하울라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나가는 광경이 아른거렸다.

    “그만!”

    쯔르레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생하울라를 향해 몸을 던졌다. 어째서? 이미 배신당한 이였는데? 그는 이미 자신의 친구 같은 것이 아니었는데? 어떤 미련이 남아서 그 몸을 던진걸까. 쯔르레이는 자기 자신도 자신의 행동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거리는 지독하게 멀었고 쯔르레이의 몸이 생하울라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뮈미르의 랜슬롯이 생하울라의 머리에 닿는 일도 없었다.

    뮈미르가 망치를 휘두르기 전에 생하울라의 도끼의 끝에 달린 창날이 뮈미르의 심장을 꿰뚫었으니까.

    “…어?”

    그리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생하울라가 일어섰다. 중력이 마치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 없다는 듯이. 처음부터 모든 것이 연기였다는 것마냥.

    “뮈…미르?”

    거대한, 뮈미르의 신형이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떨어져버렸다. 아름다운 그녀의 그림자는 뭉개져버렸다.

    생하울라는 천천히 넘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쭉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뮈미르에 다가갔다. 보기만 해도 불길한 검은 피가 흘러나오는 그녀의 가슴을 후벼파듯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생하울라의 손에서 그녀의 거대한 검은 심장,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심장이 그대로 끄집어내졌다.

    심장을 잃은 뮈미르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 그대로 계속해서 피를 흘릴 뿐이었다.

    “…뮈미르.”

    쯔르레이는  장면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하기에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 낯설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뮈미르가 무너졌다.

    불가항력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렇게

    바닥에서

    싸늘하게

    누워있는거지?

    천천히 쯔르레이는 뮈미르의 몸 앞으로 다가갔다. 쓰러진 그녀의,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신형을 끌어안았다.

    어째서 이렇게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걸까 그렇지만 뮈미르는 말했는데 불가항력적인 존재라고 말했는데 스스로가 약속했는데.

    거짓된 관계, 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그의 유일한 핏줄이었는데.

    약속 같은 것은 지켜지지 않는 것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핏줄에, 그녀와의 관계에 뭐라도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일어나.”

    일어나라, 뮈미르.

    말하지 않았는가, 스스로가 불가항력적인 존재라고. 그것은 즉 불멸함을 의미하는 것을.

    지금까지 쯔르레이로 인해 일어났던  모든 죽음들이, 거듭된 실패를 반복한 어린 사냥꾼을 괴롭혀 결국 아린 가슴을 쥐어잡고 말았다. 아레히, 류나벨트, 그리고 이제는 아아, 뮈미르마저.

    그때보다도 더욱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때보다도 더욱 괴로운 것은 아니었다.

    아픔이란 것은 그렇게 순위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도 가슴이 쓰라린 것은

    지금 어린 육신을 입은 탓인 걸까.

    뮈미르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로 피범벅이 된 쯔르레이가 생하울라를 보았다. 찢어질  무너져내리는 그 눈빛이, 생하울라를 덮쳤다.

    “…내놔라.”

    “무엇을?”

    “돌려달라고, 했다!!”


    쯔르레이가 생하울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심장이 사라진 이를 되살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죽어버렸다. 끝나버린 게 분명했다.

    그러니 무언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불어 상대는 생하울라였으니.

    뮈미르와의 싸움으로 인해 엄청나게 지쳤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쯔르레이를 멱살을 한 손으로 붙잡아버렸다. 쯔르레이는 발버둥쳤지만 전혀 풀려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뭔지 아나?”

    그리고 생하울라는 자신의 품에서 하나의 작은 병을 꺼냈다.  안에는 검붉은 색의 피가 들어있었다. 작게 흔들자 찰랑거리는 물결을 내보이는 병을 생하울라가 쯔르레이에게 보여주었다.

    “자네의 피일세.”

    “내… 피?”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덕분에 거인 왕녀의 중력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대체… 언제?”

    “자네가 그 애송이에게 당해서 쓰러졌을 때.”

    자네는 설마 이 모든 것을  때부터 계획하고 있었던건가?

    그러나 쯔르레이의 입에서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거대한 농담인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가 모든 것이 장난이었다고 얘기할 것만 같았다.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적이 있었다.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것 역시 농담이었다.

    “먹어라.”

    생하울라가 쯔르레이의 입에 억지로 뮈미르의 심장을 넣으려 했다. 물론 쯔르레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흘리기 시작한 눈물만이 쯔르레이의 입가를적실 뿐이었다. 뮈미르의 심장같은 것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하울라는 쯔르레이에게  강요를 하지 않았다. 먹지 않기 위해 입을 막은 쯔르레이를 그저 천천히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생하울라가 이것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생하울라는 더는 강요하지 않고 그대로 쯔르레이를 놓아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뮈미르를 향해 걸어갔다. 쯔르레이는 대경실색해 생하울라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생하울라는 되려 그런 쯔르레이를 장애물 치우듯 손으로 후려쳐 옆으로 치워버렸다. 쯔르레이는 꼴사납게 넘어져버렸다.

    그러나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분이 어떠시오.”

    […치워라, 비참한… 것.]

    심장을 빼앗긴, 죽은 게 틀림 없을 뮈미르가 대답을 한 것이었다. 뮈미르의 말투는 힘이 빠져있었고 여전히 죽어가는 것이 명확히 느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었다.

    쯔르레이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대로 뮈미르를 향해 달려갔다.

    “뮈미르…! 뮈미르! 살아있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따. 그러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미약하지만 분명히 숨을 쉬고 있는 뮈미르를 향해 쯔르레이는 그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살아있었다, 뮈미르는.

    “거인은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지. 거인 왕녀는 용의 심장과 거인의 심장을 동시에 가졌다. 심장 하나를 빼앗긴다고 곧바로 죽진 않는다.”

    생하울라가 설명해주었다. 그는 아직도 힘차게 맥동하고 있는 뮈미르의 심장을 손에 쥔 채 작은 단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그럼…! 뮈미르를 살릴 수…!”

    “허나, 곧 죽겠지.”

    생하울라의 말은 싸늘했다. 쯔르레이에게 작은 희망을 줄 것처럼 행동하더니 결코 돌이키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그 말에 생하울라의 손에 있는 심장을 바라보았다. 되돌려놓으면, 그것이 마땅히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려놓으면 모든 것이 원상복귀  것이다. 쯔르레이에게 남은 희망은 그것 뿐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대체 어떡해야 쯔르레이가 생하울라에게서 저 것을 탈취할 수 있는가?불가능한 일이었다. 아까, 그것은 분명 아무런 희망도 없이 덤벼든 힘없는 몸부림이었고 닿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덤벼들었다.

    뮈미르의  손에서 랜슬롯을 꺼내 들어 생하울라에게 덤벼들었다. 생하울라는 지금 도끼를 들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어쩌면…!

    그러나 그런 쯔르레이의 맹습을 생하울라는 가볍게 피해냈다. 다시 계속해서 쯔르레이가 달려들었으나 단  번의 공격도 생하울라에게는 닿지 않았다.

    정면으로 다가가는 쯔르레이의 공격 정도가 생하울라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쯔르레이는 그에게 계속해서 미친 듯이 망치를 휘둘렀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 생하울라에게서는여유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까도 분명 격전을 치뤘을텐데도. 지쳐서 헉헉대는 쯔르레이를 보고 생하울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다네. 자네.”

    “늦지… 않았다!”

    생하울라는 되려 그런 쯔르레이를 비웃듯이 뮈미르의몸 위에 섰다. 어느 순간인가 쯔르레이의 공격을피하던 그가 자연스럽게 뮈미르의 주변으로 간 것이었다. 그리고 생하울라가 아까 꺼낸 작은 단검을 들었다. 쯔르레이가 아연실색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개자식!”

    “말이 험하군.”

    “크으윽!”

    “그녀를 살려주도록 하지.”

    “뭐?!”

    “이 단검은 영원의 검이다. 늙은이의 친구, 사람 먹는 현자, 은룡 캐러웨이의 이빨로 만들어진 것이다.  검을 심장에 꽂으면 그 자는 곧 굳어져 검을 뽑기 전까지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은색의 작은 단검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쯔르레이에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 단검이 가져올 효능만이 눈에 보였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것으로 뮈미르를 살릴  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 거인 왕녀를 살릴 수 있다. 네가 이 심장을 먹는다면 이 검을 그녀의 심장에 꽂아주겠다.”

    하지만 그건 결국 뮈미르를 영원히 잠자는 공주로 만들어버리란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결국엔 쯔르레이를 놀리는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심장이 없다면.

    그래, 심장이 없다면 말이었다.

    “심장이 없다면, 그녀는 평생 죽은 상태나 다름 없는 거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자네라면 얻을  있지 않는가. 새로운 심장을.”

    “뭐…?”

    생하울라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쯔르레이를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울푸레를 죽여라.”

     모든 것은  짜인 농담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엉성한

    “그리고 그 심장을 취해라.”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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