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시간을 되돌려 다시 불타르와 뮈미르가 만난 그 순간, 불타르는 결국 뮈미르를 안내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뮈미르의 말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다만, 적어도 뮈미르가 자신을 쯔르레이의 ‘누나’라고 표현한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언니라고 했다면 그만큼의 신뢰는 얻을 수 없었겠지. 뮈미르는 쯔르레이가 원래 남자라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비밀을 알고 있을 뿐인 쯔르레이의 적이라는 가능성도 없진 않았지만, 무뚝뚝한 그녀의 말투에서 숨길 수 없는 감정들이 드러났기 때문에 불타르는 결국 마음을 굳힌 것이었다. 불타르에게 그 감정은 적어도 나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쪽입니다.”
뮈미르를 데리고 자신이 빠져나온 창고로 데려갔다.
무언가 조심하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위치를 알린 순간 뮈미르는 뚜벅뚜벅 지하를 향해 걸어내려갔다. 그리고 그 밑에서 노예상인의 부하들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돌아왔… 뭐, 뭐냐, 너는?!”
“거, 거인?”
뮈미르의 거대한 모습이 복도를 밝힌 불에드러나자 적들은 기겁을 했다. 뮈미르의 모습 자체는 그다지 위압적인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그 거대함만으로도 그들을 위압시키기는 충분했다.
아니, 그 모습 뿐만이 아니었다. 뮈미르는 시간 낭비가 싫었고 그렇기에 그들을 본 순간 곧바로 위압감을 뿌렸다. 그것은 거인의 것이 아닌, 용의 것이었다.
그 위압감은 불타르를 제외한 그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려앉았고 정신력이 강한 몇 몇은 도망쳤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지를 적신 이 까지 있을 정도였다.
뮈미르는 그 모습을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불타르는 속으로 뮈미르에게 반항하지 않을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자신도 저런 추한 꼴이 됐을거라는 상상을 하면….
“아가씨, 저기 이쪽 방향으로 따라오면 됩니다.”
불타르는 뮈미르를 이끌며 방의 위치를 가리켰다. 그러나 뮈미르는 곧 불타르를 따라가지 않고 멈춰버렸다.
“아니,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길은 알 수 있습니다. 그대는 먼저 이 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겁니다.”
“어째서죠?”
“누군가 이곳에 강력한 주술진을 펼치고 있습니다. 곧 이곳과 바깥은 단절될 것이니 그 전에 나가지 않으면 그대의 안위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뮈미르의 표정은 변함없이 무표정했으나 어쩐지 시급해보였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그 아이는 제가 구해서 나가겠습니다.”
불타르는 망설였지만 그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는 초월자였고 자신이 간다고 해서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뮈미르가 그 초월자를 상대할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역시 알 수 없었으나, 아까의 장면을 본다면 확실히자신보다는 수 십, 수 백배는 강할 것이분명했다. 떠나야한다면 자신이 떠나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단건 무슨 뜻입니까?”
“이 싸움의 여파가 충분히 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타르는 명석하게도 그 말의 의미를 금방 알아들었다. 초월자의 싸움이 주변이 쉽사리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것에 불타르가 떠올린 것은 붙잡힌 노예들이었다.
“… 거주지의 끝자락에 아이들이 있습니다. 노예 상인 새끼들이야 제 알 바가 아닙니다만 아이들은 죄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구출할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 큰 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십시오.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오래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무운을 빕니다.”
불타르는 그 말을 남기고 달렸다. 통로에 있는 적들은 모두 뮈미르가 무찔렀기에 그를 막을 이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아이들을 구출해야 했다.
뮈미르는 눈을 감고 천천히 생하울라와 쯔르레이가 있는 방을 향해 움직였다.
쯔르레이의 냄새는 숨길 생각도 없이 노골적이었다.
~
불타르가 노예상인들의 거주지의 끝자락에서 아이들을 깨웠다. 다행히 아이들은 금방 일어났다.
“일어나라! 일어나! 빨리! 지금 당장!”
불타르는 아이들을 깨우는데 다소 폭력적인 방법도 거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소리를 치고 약하게 걷어차면서 빨리 아이들을 깨웠다. 아이들은 금방 일어났다. 그들 모두 겁에 질린 상태였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 빨리! 나를 따라와라. 여기 있으면 위험해!”
아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불타르를 따라나섰다. 불타르의 말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따라올 폭력이 무서워서겠지.
지금 당장 있는 노예들이 아이들 밖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다른 노예들까지 모조리 구해야했다면 결코 시간을 맞출 수 없었겠지.
그 와중에 아까 잠에서 깨어나 그와 함께 쯔르레이가 떠났음을 알고 있는 루비는 의문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조용히 불타르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기… 쯔르레이랑 같이 갔었죠. 쯔르레이는 어디 있나요?”
불타르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지금 안전한 곳에 있단다. 우리도 어서 빨리 도망쳐야 해.”
루비는 의심하지 않았다. 안심한 채로 그대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불타르의 인솔에 따라 지하의 바깥으로 향한 것이다. 다행히도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다른 이들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노예상인의 부하들 대부분을 쯔르레이와 뮈미르가 해치워놨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이 빠져나가자 불타르는 큰 소리로 뮈미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 소리가 화근이었을까. 문제는 바깥에 도달하고 나서야 발생했다.
“응? 뭐냐 이게 대체.”
“뭔가 시끄러워서 와봤더니….”
“신참? 이게 뭔 일인지 설명을 해야겠는데?”
“…하하. 재수가 없네, 오늘은 정말.”
불타르가 아이들을 다 내보내고 한숨 돌릴 즈음, 소리를 듣고 거처로 돌아오는 노예상인과 마주한 것이다. 그들은 빠져나와있는 아이들과 불타르를 보고 무기를 꺼내들었다.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거야? 안에 애들이 산더미처럼 있을 텐데.”
“뭐 어쨌든간에 이 새끼가 배신자라는 거잖아. 이야기는 간단하지.”
“저기,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눈감아줄 생각은 없으시겠죠? 헤헤….”
불타르가 싸게 웃어보이며 자비를 구걸했지만 상대가 그걸 받아들일리는 당연히 없었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무기를 들어올렸다..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울기 시작했다.
불타르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손에 들었다. 자신에게 그들을 상대할 충분한 무력이 없음은 알고 있지만 지금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아이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친구, 적어도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칠 위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적들이 불타르에게 달려드려 한 그 순간.
한 오크의 거대한 망치가 그들을 후려쳤다.
기습인 것을 감안해도 충분히 훌륭한 솜씨였다. 오크는 거대한 망치를 연신 휘둘러 상대방을 말 그대로 아작내버렸다. 첫 기습에서 이미 한 사람의 머리가 그대로 박살나버렸고 그 다음 합에 다른 노예 상인이 반항할 틈도 없이 오크의 발차기를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 다음은 그대로 망치에 깔려 죽을 뿐이었다.
마지막 다른 한 사람은 율라티에가 처음 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금 더 오래 살았으나 잠시 뿐이었다. 칼을 뽑고 오크에게 달려들었으나 오크는 그의 칼을 맨손으로 잡아버렸고 그대로 칼을 뺏어 던져버렸다. 다음 얘기는 굳이 서술하지않아도 알 수 있겠지.
세 사람의 노예 상인은 그대로 명줄을 달리했다. 아이들은 그 잔인한 장면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딸꾹질을 해댔다. 몇몇 아이는 도망가려고 뒷걸음질까지 치고 있었다.
피가 잔뜩묻은 망치를 그대로 들고 천천히 걸어오는 오크를 보고 불타르는 침을 꿀꺾 삼켰다. 자신도 모르게 단검을 앞으로 들었다. 그러나 오크는 그 단검을 순식간에 잡아채고는 땅으로 치워버렸다.
“자네가 불타르 세너맨인가?”
“…당신이 율라티에?”
“그렇소.”
그제서야 불타르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상대는 아군이다. 비록 아이들은 무서워서 울고 있었지만, 심지어 도망을 치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아군이었다. 불타르가 아이들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도망친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아, 도망친 아이들이!”
“걱정하지 말게나. 이쪽 주변에 우리 정보원들이 전부 모였으니, 아이들은 그들이 찾아올거야. 그것보다 문서는?”
“여기 있소.”
율라티에는 불타르에게서문서를 받고는 곧바로 열어서 살펴보았다. 진품임은 확실했다. 율라티에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수고했네. 헌데 쯔르레이님은?”
불타르는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했다. 쯔르레이와 생하울라, 그리고 뮈미르에 대한 것 까지모두. 율라티에는 어안이 벙벙한 듯 하였다.
“생하울라님이라고? 대체 그게 무슨….”
“거짓이 아니오. 내가 들은 한 그의 이름은 분명 생하울라였고 쯔르레이가 알고 있는 이였소. 별개로 둘의 사이가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다만 문서는 그대로 넘겨줬으니… 어쩌면 적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대로 도망쳤소.”
“내가직접 들어가서 확인해봐야겠소.”
“하지만 곧 결계가 펼쳐진다고…!”
“…확실히 그 말이 맞군.”
“설마?”
율라티에가 입구에 손을 대었으나 거기까지였다. 율라티에의 손은 입구를 향했지만, 입구는 결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처럼 그것을 튕겨냈다.
“이미 강력한 주술로 이루어진 결계가 이 곳을 막고 있소. 적어도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있는 방도가 없군.”
율라티에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로써는 대체 생하울라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쯔르레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려운 얘기였다.
“이봐, 아이들은 전부 본부로 데려갔다.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둘의 대화를 뚫고 횃불을 든 벤클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으로의 진입은 힘들거 같다. 문서는 입수했다. 라로슈님을 불러올 수 있겠나?”
“안에 있다던 초월자의 얘기가 사실인가?”
“그런 듯하다.”
율라티에는 벤클 몰래 불타르에게 눈짓했다. 아마도 생하울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불타르 역시 그만한 실력자에게 밉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입을 닫았다.
“이 녀석이 그 불타르라는 놈인가? 쯔르레이는? 어떻게 되었지?”
“안에 갇힌 모양이다. 지금 결계가 펼쳐져서 라로슈님이 오기 전까지는 손 쓸 방도가 없다. 그가 오기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지?”
“…빨라도 하루는 걸려. 지금 옆 영지에 체류하고 계신다니.이미 연락은 갔다. 그나저나 결계라는 건 무슨 소리야?”
“안쪽에서 곧 싸움이 일어날 것 같다. 위험해.”
“…기다려봐, 쯔르레이와 한번 연락해보지.”
“소용없을거요. 결계에 막혀서 연락이 되지 않을 거야.”
“정말이군, 쳇. 일이 좀 풀리나 했더니, 다시 꼬이는 군. 그나저나… 어? 잠깐 너.”
벤클이 횃불을 불타르에게 갖다대었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벤클이 곧 놀라움에 가득 찬 얼굴로그를 쭉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의문에 가득 차 입을 열었다.
“너….”
“하하,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하셨는지.”
“살람 후작과는 무슨 관계지?”
“….”
벤클은 살람 후작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이 청년의 얼굴은 그의 얼굴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이 일에 관여했다는 것은 중대 문제였다.
“무슨 목적이지? 정체가 뭐냐?!”
“…나는….”
벤클이 의심에 차서 불타르에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땅한 의심이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까지 흐른 거 어쩔 수 없나. 불타르가 숨을 잠시 들이마쉬고 입을 열었다.
“나는… 불타르 세너맨, 아니 불타르 살람…. 살람 후작의 사생아요.”
“그의 사생아라고?”
“무슨 이유로 나를 추궁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불쾌한 추측이란것을알아줬으면 좋겠군요. 그는 나의원수이며 나는 그와는 한 곳에서 같이 숨쉴 수 없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