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불타르는 빠른 속도로 지하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뒤에 쯔르레이를 구하러 가야한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쯔르레이와 생하울라라고 불린 오크 초월자의 관계에 대해 생각이 빙빙 돌고 있었다.
둘은 대체 무슨 관계인거지? 확실히 그 둘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좋은 관계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쯔르레이는 분명 그를 적대하고 있었고, 반대로 그 오크에게서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쯔르레이가 그를 적대한다면 분명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니 안심하긴 힘들었다.
아무런 문제 없이 문서를 얻은 것은 분명 기뻐해야할 일이었지만 불타르의 속은 그저 찝찝하였다. 과연 쯔르레이를 그 자리에 두고 온 것이 옳은 일인가? 지금와서 그런 생각을 떠올려봐야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불타르는 그저 약속한 장소로 달려갈 뿐이었다.
그러나 아까 단장을 겁박했던 그의 방, 그 앞을 지나는 순간 가로막는 이들이있었으니, 아까 쯔르레이를 상대하다가 도망간 적들이었다. 그들은 쓰러진 단장을 부축하고 있었다. 불타르의 발이 그들의 앞에서 멈추며 흙이 튀었고 그 짧은 소음에 모두가 불타르를 바라보았다.
“너 이 새끼, 잘만났다.”
“아까, 그 꼬마는 없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들은 불타르를 보고 강렬한 살기를 드러내며 동시에 쯔르레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살폈다. 물론 쯔르레이는 없었고 그들의 분노를 막을 이도 없었다.
“신참 새끼… 감히 배신을 때려? 난 처음부터 이 새끼 얼굴이 맘에 안들었어!”
불타르 역시 이대로 돌아가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들이 이렇게 빠르게 다시 모여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불타르는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기에 곧바로 발을 돌려 자신이 온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적들은 자신들을 완전 개무시하고 도망가기 시작한 불타르에게 열이 오른 채 쫓기 시작했다.
“야! 멈춰, 이 개새끼야! 쫓아! 도망간다!”
다행히도 불타르는 발 하나는 빨랐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계속 쫓아오고 있었고 간간히 무기를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불타르는 어렵지 않게 피해냈지만 계속해서 그들이 쫓아오면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결국 불타르는 성으로 향하는 길을 향해 발을 돌렸다. 정신이 있다면 거기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불타르의 그 생각은 지나친 과대평가였다는 듯, 그들은 그저 불타르를 계속해서 쫓아올 뿐이었다. 아까 그 초월자와 만난 방쪽으로 도망갈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래도 너무 위험한 짓이었다. 결국 불타르는 성을 향하는 길을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불타르는 성의 뒤편에 있는 창고 쪽으로 튀어나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불타르의 승리였다. 불타르는 이 성의 지리에 빠삭했고 그들이 쫓아온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살람 후작이 아무리 연대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성에 무단침입하는 것까지는 봐주지 않을 거다.
“젠장! 성으로 들어가버렸잖아.”
“빌어먹을 새끼.”
“아니, 어차피 이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다. 성으로 들어간 이상 거기서 나오는 건 불가능해. 이쪽에서 몇 명 남아서 기다리고 있자고.”
뒤에서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불타르는 비웃음을 날릴 뿐이었다. 분명 다른 성이라면 그렇겠지만, 이곳은 살람의 성이었다. 적어도 불타르만큼은 이 성에서 나가지 못할 것을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의 자신감의 원천은 확실했다.
이곳이 그가 태어난 곳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은 다행히도 과거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듯 했다.
불타르는 능숙하게 기척을 숨긴 채 병사들이 있는 곳을 피해가면서 정원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기억대로라면 정원으로 가는 곳에 아직 남아있는 비밀통로가 있을 것이다. 그쪽을 통해 빠져나가서 약속한 곳으로 향하자. 조금 돌아가는 길이 되겠지만 그렇게까지 늦지는 않을 거다.
정원에 도착한 불타르에게는 아쉽게도 정원에는 선객이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인간이라고 보기는 힘든 여인이었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보이지 않았지만, 그 거대한 몸집에서 그녀가 일전에 소문으로 들었던 에레보스에 체류하고 있다던 거인임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그녀가 여기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는 것도 잠시.
“나오십시오.”
여인이 입을 열었다.
흠칫. 불타르의 어깨가 떨렸다. 설마 자신을 알아챈건가? 기척을 숨기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던 불타르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혹시나 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는 천천히 불타르가 숨어있는 곳으로 다가왔고 들켰다는 사실은 정확해졌다. 불타르는 도망칠까도 고민해봤지만 이곳에서 도망쳤다가 상대가 병사들을 부르면 더 곤란해질 것을 생각해 그만두었다. 일단은 어떻게든 대화로 해결해야했다.
“이렇게 쉽게 들킬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대단하시군요, 아가씨.”
“뻔해요. 도둑질은 재능이 없으니 그만하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그거 잘됐군요. 이쪽도 사실 전업을 고민하던 중이였답니다.”
불타르는 실실 웃으면서 그녀에게 맞춰주었다. 다행히도 상대에게는 불타르를 고발할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불타르에겐 당황스럽게도 그녀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불타르의 몸을 잡았다. 불타르가 반응하기도 전이었으니 엄청난 속도였다. 불타르는 반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꼼짝없이 당했군. 불타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불타르를 해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킁킁대며 코를 내밀어 냄새를 맡을 뿐이었다.
“킁킁.”
“저, 저기 아가씨? 이게 무슨 일이신지….”
그녀는 당황하는 불타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불타르를 놓아주었다.
“당신, 쯔르레이와 함께 있었군요.”
“어떻게 그걸!”
그녀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은 불타르도 잘 알고 있었으니. 대신 그녀는 불타르에게 대답을 촉구할 뿐이었다.
“쯔르레이는 어디 있죠?”
“…미안하지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전에는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야.”
불타르가 목소리를 깔았다. 그에게 있어서 살람 후작의 성 안에 있는 이가 쯔르레이의 아군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얘기였다. 쯔르레이를 초월자에게 두고 도망쳐온 불타르였지만 적을 더 붙여줄 생각까지 할 정도로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안심하십시오.”
그러나 그녀는 말했다.
“저는 뮈미르. 쯔르레이의 누나입니다.”
물론 어딘가에 있는 쯔르레이는 전혀 동의하지 않을이야기였지만.
~
시점을 바꿔 다시 쯔르레이와 생하울라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보자.
쯔르레이는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생하울라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용을 죽여? 누가? 내가? 지금 이 작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무언가 잘못들은게 아닐까 싶었지만 생하울라의 목소리는 쯔르레이의 귓가에 남아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모든 용을 죽인다.
내가.
머리가 빙빙 돌아가던 쯔르레이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쯔르레이는 결론을 내렸다. 답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생하울라는 미친 것이었다. 그것은 광인의 지식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웃나?”
“자네는 미쳤어.”
“부정하지는 않겠네.”
생하울라가 껄껄대며 웃었다.
“내가 용을 죽인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그건 불가능해!
쯔르레이가 소리쳤다. 그러나 생하울라는 고개를 저었다.
“가능하네.”
“하, 대체 어떻게? 그걸 위해서 내게 솜뭉치를 들려준 건가? 빌어먹을! 그런 검이 있다 한들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나에겐 그런 힘이 없단 말이야!”
“힘이란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거지.”
“흰소리는 집어치워! 그럴거면 어쩌자고 나를 죽이려고 한 건데?!”
“그건 약속된 시련의 일부였다. 영웅에게 있어야 할 마땅한 시련이지.”
“영웅? 영웅! 헛소리! 나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나는 용을 죽인 슈라헤와는 달라! 그는 일곱 용을 죽인 영웅이자 살인자였다!”
“그러나 너는 슈라헤지. 네 속으로도 그걸 부정할 수는 없을 거다. 너는 용을 잡기 위해 태어났어. 그런 숙명을 갖고 있는거다.”
생하울라가 다가와 쯔르레이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쯔르레이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쯔르레이의 금색 머리칼이 생하울라의 손에서 흘러내렸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나도 사과하고 싶네. 원래대로라면 내가 무대 위로 올라올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렇다면 왜 지금와서 나타난거냐…!”
“자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지. 얌전히 아토그의 수해로 갔다면 이렇게 내가 몸을 움직일 일도 없었을 거다.”
“네 놈의 뭘 믿고?”
“글룸라에게는 용의 심장이 있다.”
“뭐?”
쯔르레이가 당황했다. 그것은 용의 심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어쩐지 지나치게 불길했기 때문이다. 쯔르레이가 불길함에 몸서리치는 모습을 생하울라는 무심히 넘겼다.
“자네가 약속한대로 그곳에 갔다면 순순히 그걸 먹고 각성했을 테지. 그렇다면 모든 계획이 잘 이뤄졌겠지. 하지만 말이야, 확실히 모든 일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더구만.”
“…안타깝게 됐군. 나는 수해로 가지 않았으니까. 더는 갈 생각도 없고.”
“걱정하지 말게나. 하늘은 날 돕고 있으니.”
“걱정? 웃기는 소리!”
“다시 이야기를 돌려 볼까?”
생하울라가 쯔르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용을 유혹하는 금시의 피,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게 용을 끌어들일 수 있는 물질이지. 자네가 가진 것은 그것이야.”
“…내가 금시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나는 자네를 처음 볼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네.”
“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연극을 하고 있던 거였군.”
지독한 배신감이 쯔르레이를 감싸안았다. 그렇다면 단순히 쯔르레이를 죽이려고 한 것보다 더 질이 나쁜 이야기였다. 생하울라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쯔르레이를 속인 것이었다. 이미 한번 당한 배신이 쯔르레이를 감싸주었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너를 진심으로 친구라고 믿었는데…!”
“나 역시 자네를 진심으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쯔르레이는 생하울라가 내려놓은 찻잔을 집어던졌다. 생하울라가 여유롭게 피해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야기는 하나 뿐이었어. 그대가 용을 물리친다. 그것 뿐인 이야기였지. 너무 멀리 돌아온 수준이라고.”
“나에게 그런 힘 같은 건 없어! 현실을 봐라! 여기 있는 건 나약하고 어리석은 빌어먹을 어린애 모습의 사냥꾼일 뿐이라고…!”
“아니, 그럴 수 있다네. 아주 간단한 덧셈이다. 필요한 건 그것 뿐이지.”
“덧셈…?”
“와야 할 손님이 왔군.”
딸깍하는 소리가 문이 열림을 알려주었다. 방은 넓었고 그렇기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마땅히 작아보였다. 그러나 상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상대는 거인, 반룡 뮈미르였다.
그녀가 들어왔다.
“저기, 용의 심장이 걸어들어오지 않았나.”
그제서야 쯔르레이는 생하울라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반에 반을 더하면,
그것을 우리는 하나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