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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56/162)


  • 〈 156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사람은 후작의 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곳에 는 초월자의 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적들을 뒤로 물렸고 이 쪽으로 가는 길에는 어쩐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장이 이미 굴복했기 때문인가, 쫓아오는 이들도 없었고.

    “…만약 상대가 진짜 초월자라면 어떡할거지?”

    “아쉽지만 도망가야지. 내 목숨은 소중하거든.”

    “하, 비겁한 놈.”

    “미안하게 됐수다.”

    “도망갈거면….”

    쯔르레이와 불타르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서로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대화는 이어져 나갔다. 초월자와 만났을 때의 대처 방법을 얘기하기도 했고 헛소리로 농담 따먹기를 하기도 했다. 그들 나름대로 긴장을 푸는 법이었다.

    상대방이 초월자가 아닐 확률이 높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그가 설사 초월자가 아닐 지라 하더라도 상대하기 힘든 강자일 수도 있고 아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최악의 경우 초월자라는 것이 진짜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 불타르는 도망친다고 말했지만, 상대가 정말 초월자라면 그건 불가능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어쨌든 긴장을풀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마침내 목적한 방에 도착하자 쯔르레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불타르를 바라보았다. 미리 얘기한 대로. 불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다.”

    불타르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쯔르레이가 랜슬롯을 손에 든 채 앞으로 뛰어들어갔다.

    넓은 방이었다. 방의 끝자락에는 후드를 쓴 거구의 사람이 뒤를 돌아본 채 앉아있었다. 사내에게서는 기이할 정도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쯔르레이에게는 결코 좋은 징조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쯔르레이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면, 그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자이거나, 초월자,   하나일 테니까.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상대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자일 확률은 극히 적었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최악이 아니었다. 아직 쯔르레이는  수 없었지만 분명 그러했다.

     순간  자는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돌려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쯔르레이는 불타르를 뒤로 물렸다. 불타르는 얌전히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얼굴에서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사내에게서 느낀 당황스러움이 나타나있었다.

    그 앞에 선 남자는 기이하게도 후드로 얼굴을 가려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온 몸을 옷으로 둘러싼 채였기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쯔르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이 갖고 있다는 문서를 찾으러 왔다. 순순히 내준다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쯔르레이가 랜슬롯의 크기를 키웠다. 상대가 사정 거리 안에 들어오는 순간 망치를 늘려 요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방금까지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폭발할 듯, 상대방에게서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강력한 기운은 오로지 쯔르레이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증거로 뒤에 서있는 불타르는 갑자기 뚝하고 멈춰버린 쯔르레이를 보며 당황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쯔르레이에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쯔르레이가 천천히 손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확실했다. 상대방은 초월자였다. 최악, 인  같았다. 도망갈 수 없었다. 하다못해 불타르에게 말을 걸어 그라도 도망가게 해야… 하지만 전할 수조차 없었다.

    온 몸이 얼어붙은 듯 가만히 멈춰버렸다.  몸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공포? 그러나 쯔르레이는  이것이 단순한 공포가 아님을 깨달았다. 쯔르레이에게 이것은 낯익음이었다.

    어째서 처음 보는 이의 기운이 이렇게도 낯익을 수가 있을까? 쯔르레이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학습’한 적이 있었다. ‘배운’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인가?떠올릴 수 없는, 떠올려서는 안되는 무언가에 가까운 이것은. 그러니 묻겠다. 그대는 누구인가? 결코 물어서는 안될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야기라는, 하나의 굴러가는 공을 터트리는 뾰족한 가시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나타나서는 안될 이야기. 그러나 사실은 올바르지 않게 굴러가는 공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가시. 이제 공은 터지고 다시 모든 이야기가 원점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공을 굴릴 시간이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다.

    그대는 누구인가?

    대답은, 나왔다.

    “생하울라.”

     초월자는 후드를 벗었다.

    거기에는 초록색 얼굴의 오크가 한  있었다.

    최악보다도  최악이었다.

    ~

    “오, 오크?”

    불타르가 신음성을 흘렸다. 어째서 오크가 아인종을 파는 노예 상인들을 돕고 있는 건지 의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오크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진 초월자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불타르의 신음은 두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며 두 사람만의 세계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 불타르는 쯔르레이의 머리에서 땀이 톡하고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덥다, 라고 할 정도로 이 곳은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웠다. 그러니 저 땀의 의미는 불타르에게 한가지의 의미 만을 해석본으로 내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쯔르레이는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싸울 생각은 없었다.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전혀 아무런 의미도 반향도 갖지 못했다.

    이길 수 없다. 쯔르레이는 알고 있었다. 생하울라를 상대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승산이 없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쯔르레이는 싸울 생각을버린 것이다. 버렸다는 것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갖고 있지 않았으니.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와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쯔르레이의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천천히 생하울라가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 그 상황에서도 쯔르레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쯔르레이에게 손을 뻗는 생하울라를 보고 불타르가 순간 앞으로 나가려 했으나 의문의 압력에 되려 몸을 낮추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생하울라는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하하!”

    껄껄대며 웃어대는 생하울라를 보고 쯔르레이는 순간 과거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아무 것도 몰랐을 시절, 편하고 즐거웠던 시절, 그와 함께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웃음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절름발이의 웃음일세, 그냥 넘어가도 좋아.”

    생하울라다운 웃음, 생하울라다운 농담, 생하울라다운 말투였다.

    왜냐하면 그는 생하울라였으니까.

    쯔르레이를 죽이라고 시켰던.

    “잘있었나? 자네는 키가 좀 컸군.”

    “너는 그대로군. 그때와 똑같이 웃고 있어.”

    가증스럽긴.

    불타르는 서로 아는 척 하는 두 사람이 무척 당황스러운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불타르의 당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둘은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네가 살람 후작이 고용했다는 그 초월자인가?”

    “일단은 맞네. 물론 진짜 그를 위해 고용된  아니지. 일종의 잠입이라고 하면 되겠군.”

    “잠입? 율라티에는 너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어.”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네. 미안하지만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머리 아프게 여기서  얘기를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럼… 문서를 내놔.”

    “여기 있네.”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생하울라는 시원스럽게 봉투를 건네주었다. 던져진 문서는 정확하게 불타르의 앞에 떨어졌고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잡고는 열어보았다.

    “…진짜 문서다.”

    “확실한가?”

    불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쯔르레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불타르가 빠르게 열린 문으로 달려나갔다. 미리 약속된 이야기였다. 만약 문서를 확보한다면 불타르는 그대로 도망쳐나가 쯔르레이가 연락한 벤클에게 전해주기로.

    미리 얘기해둔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다행히도 생하울라는 불타르를 막지 않았다.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열린 문을 보고 눈짓하자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쯔르레이는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좋아, 그럼… 우리 이야기를 할 시간이군.”

    “그래, 회포를 풀 때가 된 것 같군.”

    “회포?”

    그 말을 듣더니 쯔르레이는 별안간 웃겨죽겠다는 듯이 생하울라를 쳐다보았다.  표정에 담긴 것은 분노, 가리키는 것은 회한, 묻혀있는 것은 후회였다.

    “헛소리 하지 말고, 말해라.  나를 찾아왔지?”

    “물론 우연이 아니겠는가.”

    생하울라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 자신도 쯔르레이도 믿지 않을 대답이었다. 쯔르레이가 노성을 지르며 말했다.

    “웃기지마. 그런 헛소리 따위 더는 믿지 않아. 네가 정말로 힘을 썼다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연극이 아니더라도 바로 일을 해결했겠지. 내가 옛날의 그 어리석은 벨투리안으로 보이나? 네가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정도는, 네 얼굴을 보는 순간 깨달았어!”

    “보이지 않군, 그래.”

    “말해! 왜 날 만나러 왔는지! 왜,”

     죽이려고 했는지!!

    쯔르레이의 외침이 방 안에 울려퍼졌다. 침묵이 주변을 감싸안았다. 생하울라는 천천히 쯔르레이를살펴보았다.

    “편지를 봤군.”

    “그래.”

    “율라티에가 읽어줬나?”

    “아니, 골트룬 산맥에서 빙룡을 만났다. 그녀의 골렘이 읽어주었지.”

    “빙룡 네메시스를 만났다고? 놀라운 일이로군. 그녀의 위치는 어떻게 알았나?”

    “…제놈 그라시아가 알려줬다.”

    오랜만에 떠올리는 이름이었다. 초월자 마법사인 제놈 그라시아가 알려줬었다. 기이하게도 그가 쯔르레이에게 정보를 준 것은 쯔르레이가 생하울라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건가. 자네가 빙룡과 마주칠 거 라곤 예상하기 어려웠네. 이해를 해주었으면 좋겠군.”

    “이해? 대체 무엇을! 날 죽이려는 편지를 써놓고는.”

    “자네가 오해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네. 하지만 너무 열 올리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생하울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

    그리고 내렸다.

    “머리를식히지.”

    그러자 쯔르레이에게 들어오던 모든 압박감이 사라졌다. 동시에 쯔르레이에게 쏟아지던 강렬한 기운의 폭풍도 잠잠해졌다. 쯔르레이는 그 반동에 발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생하울라는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쯔르레이를 부축해주었다.

    “이, 이거 놔…!”

    “그만. 천천히 차라도 마시지 않겠나? 예전처럼.”

    쯔르레이를 공주님 안기 식으로 들어 올린 생하울라는 그대로 방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생하울라에게 집중하느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방은, 방이라기 보다는 넓은 투기장처럼 보였고 한쪽 구석 부분에만 집기가 쌓여있었다.

    생하울라는 구석에 놓인 돗자리 한 구석에 쯔르레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주전자를 꺼내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한가한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쯔르레이의 분노가 가라앉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당장에 그가 싸워 줄 분위기는 아니란 걸 깨닫기는 하였다. 쯔르레이는 분했으나 그의 말대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 편지를 쓴 건 내가 맞네. 인정하지. 그들에게 자네를 죽이라고 시킨 건 사실이야.”

    쯔르레이는 솔직한 그의 대답에 오히려 화가  차올랐다.

    “…변명하지 않는 거냐?”

    “그래, 변명. 좋은 울림이군. 하지만 거짓을 말해 뭣하겠나?”

    “그렇다면 왜!”

    진정한 보람도 없이 쯔르레이가 소리치며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한번 힘이 풀린 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말은 계속 이어나갔다.

    “어째서 네가 직접 죽이지 않은 거냐?!”

    네가 직접 죽여줬다면, 차라리 이렇게 고통스럽지도 않았을텐데.

    “자네를 죽이는 건 내 목적이 아닐세.”

    “너에게 어떤 숨겨진 목적이 있었음은 나도 알고 있어. 거짓말하지 마라.”

    “나는 자네에게 어떤 단 하나의 것도 숨긴 적이없다네. 거짓을 말한 적도 없지. 나는 처음부터 말했어. 모든 것을.”

    “모든 것…?”

    “잘 생각해보게. 내가 너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라고 했지?”

    그 말에 쯔르레이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냈다. 왜 생하울라가 쯔르레이를 도우려고 했는가? 그가 진짜 어린 아이도 아니었을진데.

    어째서 그랬지? 어째서 생하울라는 만난지 사흘도 채 되지 않은 저주 받은 이에게 그런 도움을 줬지?

    왜 싸우는 법을 가르쳐줬지? 왜 무기를 손에 쥐어주었지? 왜 그 모든 호의를 베풀었지?

    ‘말하지 않았나. 나는 가장 위대한 전사의 목숨을 취할 자라고. 용의 수급을 취할 자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는 존재지.‘

    “…용을 죽인 전사의 목을 취한다.”

    쯔르레이는 순간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말했었다. 그는 자신에게.

    용을 죽일 것을 기대한다고.

    ‘용의 수급을 취할 자’ 라고.

    분명히 그는 그 농담도 안되는 헛소리를 진지하게 내뱉었었다.

    쯔르레이답지 않게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그리고  사실이 고통스러워 머리를 감싸쥐었다.

    생하울라는 울푸레에게 원한이 있다. 그는 용을 증오한다. 쯔르레이는 용이었다, 반쯤. 쯔르레이는 금시였다, 반쯤. 그리고 쯔르레이는 울푸레의 자식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용을 죽인 전사의 목을 취한다.

    중요한 것은 전사의 목을 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용을 죽인’ 이었다.

    “너는… 울푸레를 죽일 생각이냐?”

    “그 말에는  가지 틀린 점이 있다네.”

    생하울라가 천천히 말을 끊었다.

    “울푸레가 아니다.”

    그것은 정말

    “모든 용을 죽인다.”

    말도 안되고

    “그리고,”

    어리석고 미친 짓이었다.

    “내가 아니다.”

    생하울라가 손을 들어 쯔르레이를 가리켰다.

    “네가 죽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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