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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54/162)


  • 〈 154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감옥 안에서는 아이들이 구석진 곳에 몰려서 자고 있었다. 그 안에는 루비도 있었다. 감옥 문은 철창으로 이어져 있었고 노예상인들에게 아이들이 도망 갈 수 있을거란 생각은 없었는지 별다른 구속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쯔르레이에게는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쯔르레이의 머리는 불타르의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으니까.

    그가 쯔르레이를 알아본 것 같지는 않았다. 쯔르레이는 분장을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쯔르레이의가장  특징인 선명한 금발머리도 지금은 가발 속에 묻혀있었고 그가 쯔르레이의 얼굴을 자세히 봤더라면 모를까, 슬쩍 지나친 걸로 눈치채긴 어려울 것이었다.

    쯔르레이는 불타르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가 처음 어린이들의 친구라는 소리를 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가 말한 어린이들의 친구라는 소리가 이런 뜻이었을까?

    그러나 쯔르레이는  배신감을 집어넣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그는 정말 노예 매매를 하는 이인가? 그렇다면 처음 쯔르레이를 만났을 때 쯔르레이를 도와주진 않았을 것이고 쯔르레이가 류나벨트가 죽어 괴로워하고 있을 때 도와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타르가 속해있던 길드에서는 자신을 팔려는 시도도 했었다. 정말로 불타르가  일에 연관이 되어 있던 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는 자신을 도와준 것이었나?

    쯔르레이는 생각을 거듭해나갔다. 남자는 아까 불타르를 신참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불타르가  일에 가담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어쩌면 다시 도둑질을 위해서 잠입한 것인가? 그러나 노예 상인들에게서 훔칠 게 뭐가 있다고?

    의자에 앉아 있는 불타르는 감시 같은 것에 흥미를 쏟지 않았다. 애초에 시선부터가 감옥 안을 향하고 있지 않았으니. 상대가 아이들이고, 감옥의 문이 굳게 잠겨있단  생각해보면 그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불타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불타르가 잠에 빠진 걸 확인  쯔르레이는 팔에 매여있는 팔찌 랜슬롯을 그대로 망치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묶여있는 손을 천천히 망치의 뾰족한 쇠지레 부분으로 갉아내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칼이 아닌 것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쯔르레이의 손은 금세 밧줄에서 풀려났다. 손이 자유가 되었으니 다른 것은 일사천리였다. 쯔르레이는 몸에 묶인 밧줄과 재갈을 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하의 공기는 텁텁하고 답답했다.

    쯔르레이는 곧장  안에 숨겨두었던 나이프를 꺼내 감옥 문의 열쇠 구멍에 집어넣었다. 문을 열어 준다는 마도구였다. 곧 정말로 문이 열렸다. 끼이익하는 소리가 나며 감옥의 문이 열렸다. 소리 때문에 불타르나, 다른아이들이 깨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쯔르레이는 곧장 자신을 묶고 있던 밧줄을 갖고 조심스럽게, 불타르가 깨어나지 않게 하면서 그를 의자에 묶기 시작했다. 꽉 묶을 필요는 없다. 행동을 제한할 정도면 됐다. 밧줄이 그를 고정하자 쯔르레이가 뒤로 돌아가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강하게 때렸다.

    “으악!”

    그리고 곧바로 쯔르레이는 불타르의 입을 막고 랜슬롯의 뾰족한 쇠지레 부분을 불타르의 목에 갖다대었다.

    “조용히, 소리를 내면 죽는다.”

    “……!”

    불타르의 목에서 작은 핏방울이 살짝 흘러내렸고 불타르의 얼굴이 당황으로 우스꽝스럽게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물건을 쥔 자의 손이 어린 아이의 것임을 깨달았지만 목을 겨누고 있는 것을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지금부터 조용히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

    불타르는 그 목소리가 어딘가 낯익음을 깨달았지만 자신의 목에 흉기가 들이 밀어진 상황에서 그런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네 이름, 불타르 세너맨이 맞나?”

    “내 이름은 어떻게…!”

    “맞군. 그럼 다음 질문. 여기서 왜 갑자기 간수 일을 하는 거지?”

    “…당연히 한 몫 잡기 위해서 아니겠어? 여긴 말단이라도 꽤 쎄다고, 페이가.”

    그러나 쯔르레이는  말을 믿지 않았다. 과거 자신을 팔아넘겼더라면 충분히 한 몫 잡고도 남을만한 돈을 얻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자신을 놓아줬으면서 이제 와서 갑자기 다른 아이들을 팔아넘긴다고? 그에게 무슨 사정이 생긴 걸 수도 있지만,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거짓말이군.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불타르가 흠칫했다. 물론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그것 만으로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건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방법도, 꽤나 유용하군.

    “돈을 원했다면, 너는 그때 진작 나를 팔아넘겼겠지. 팔자에도 맞지 않는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그 말에 불타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탓에 그의 목이 망치에 스치고 피가 흘렀지만 그는 개의치않았다. 그리고 그는 분장으로 인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쯔, 쯔르레이?”

    “말하면 죽인다고 했을텐데.”

    하지만 그 말과는 달리 쯔르레이는 이미 망치를 그의 목에서 치운 후였다. 그의 반응에서 그가 진심으로 이 곳에 몸을 담은 것이 아님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조금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쯔르레이는 그래도 불타르를 믿었다.

    “오랜만이다, 불타르.”

    “오랜만…이요. 형씨.”

    “그렇게 불리는 것도 오랜만이군.”

    쯔르레이가 작게 미소지었다. 불타르도 어색하게 마주 웃으려 했다. 하지만 심문은 끝이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다시 망치를 불타르의 목에 대었다. 그리고 쯔르레이가 웃으며 말했다.

    “목숨이 급하다면 대답하는 게 좋을걸?”

    “하지만 이번엔 망치를 거꾸로 들었는데….”

    쯔르레이의 관대한 심문에 불타르가 허탈하게 웃었다. 랜슬롯의 망치 부분을 목에 대어봤자 피가 새어 나오는 일은 없을 테니.

    “그래서 여기서 뭘 하고 있던거지? 또 좀도둑질인가? 아니면.”

    “뭐 비슷하지. 좀도둑질이야. 아니, 좀  큰 도둑질이지, 이번에는.”

    “뭘 훔치러 온거지?”

    “너야말로, 여기 잡혀 들어온 이유는 뭐냐? 그럴 실력은 아닐텐데.”

    쯔르레이가 웬일로 씨익 웃어버렸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어쩐지 유쾌했기 때문이다.

    “도둑질이지.”

    “하, 피차 오래는 못살겠군.”

    “그래서 이번 건은 뭐지? 혹시나 같은 걸 찾고 있다면….”

    “거래 문서야.”

    “거래 문서?”

    “지금 이 도시에 있는 서커스단은 알고 있나? 그쪽이랑 이곳 노예 상인이 큰 거래를 한다고 들었어. 그 서커스단은 깨끗한 척 하고 있지만 뒤를 파고 보면  구린 놈들이거든.”

    “하지만 그 서커스단의 노예들은 전부 합법적인 루트로 구매했다고 하던데.”

    “노예들은 합법적으로 구매했지. 하지만 그 노예를 구매한 곳이 멀쩡한 곳이 아니야. 이 곳과 연관되어있는 곳이다. 복잡하게 세탁 되어 있지만 어차피 아인종의 노예는 타국에서 불법이 아니니까, 조사해도 제대로 나오는 것이 없는거다.”

    “그 놈들… 쓸데없는 곳이나 쑤시고 다녔나보군.”

    “아무튼 내 목적은  문서들이지. 그 문서만 있으면 제대로  몫  수 있을  같아서. 이 서커스단은 살람 후작의 후원을 받고 있거든.”

    문득 쯔르레이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도둑 길드가 이곳과 연을 맺고 있는데, 불타르가 여기서 문서를 훔치는  도둑 길드를 배신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불타르가 이전에도 그다지 길드에 대한 연을 과시한 적은 없었지만 이상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거지, 그럼? 도둑 길드의 연으로 들어온 건가?”

    “그렇지. 아니면 내가 여기 이런 데를 어떻게 들어오겠어?”

    “그럼 도둑 길드는 노예 상인과의 연결을 끊어버릴 생각인건가?”

    불타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는 살짝 힘이 빠져있었다.

    “…아, 이건 숨길 수 없으려나. 그건 아니. 이 일은 철저하게 내 독단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슬슬 도둑 길드에서도 나올 때가 됐으니 한 몫 크게 잡고 나오는 거다.”

    불타르의 표정은 어쩐지 조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그의 심중을 파헤칠 이유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서를 손에 넘는 것이었다. 만약 불타르의 도움을 얻는다면 아마도 훨씬 쉬운 일이  수 있을것이다.

    “아무튼 간에 우연이로군. 나도 그 문서가 필요할 것 같은데.”

    “나보고 양보하란 거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되겠는데.”

    “자네가 지금 묶여있단 걸 잘 생각하는 게 좋을거야.”

    불타르가 자기 자신을 둘러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몸부림친다면 못  것도 없는 구속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구속 뿐이었다. 이 앞에 있는 소녀의 힘을 생각한다면 의미가 없는 발버둥이었다.

    자신이 이 구속을 푼다고 하더라도 쯔르레이를 이길 수는 없을 테고, 사람을 부른다고 하면 그 즉시 쯔르레이는 자신을 공격할 테니까. 불타르의 말투가 바뀌었다.

    “이봐,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양보 못해. 굳이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아, 젠장. 나는 살람 후작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 그걸 풀기 위해서 라면 목숨도 내놓을 생각이 있어. 전에 봤지? 살람 후작이  잡아 오라고 하는 것. 그도 나도, 한 곳에 살아 숨 수 없는 관계라고.”

    쯔르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과거 그가 끌려가고 있던 곳의 목적지는 살람 영지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거짓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에게 붙어야겠는 걸.  문서를 보낼 곳은 왕궁이고, 나는 그의 죄를 밝혀내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니까.”

    “뭣…. 하지만 네가 어째서?”

    “저 뒤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잠시 생각하던 불타르는 고민 가득한 표정이었다. 쯔르레이의 말을 못 믿겠다는 것보다는 그 이야기 자체의 실현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내 그는 살짝 웃어버렸다. 아이들을 위해서 라는 이야기는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얘기겠지만 그는 쯔르레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무고한 엘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있는 사람이었다.

    “하, 오지랖도 넓은 사람이라니까,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래도 아예 보수가 없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왕국이 상대라면 내가 받을 보수도 확실한거겠지?”

    “아마도.”

    “좋아, 뭐 미더운 대답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군! 협력하겠어. 조금 시기가 지나치게 빠른  같지만 정보는 충분히 모아두었다. 가자고!”

    불타르가 그대로 일어서려 했다. 물론 의자에 묶인 몸이 제대로 일어나 질리 없었고 그는 우스꽝스럽게 묶인 채로 넘어져버렸다. 단순히 고정만 해둔 수준에 불과한 밧줄이 문제였다. 덕분에 의자가 넘어지면서  소리가 났다.

    “이런!”

    “이봐 신참 무슨 일 있나?!”

    덕분에 바깥에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닙니다! 잠깐 넘어져서 그만!”

    “덜떨어진  같으니!”

    다행히도 남자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일을 크게 그르칠 뻔 했다.

    “…그렇게 보지 말고 이거나 풀어줘요.”

    “쯧.”

    그러나 큰 소리가 불러들인 것은 그 남자 뿐이 아니었다. 뒤에 감옥에 갇혀 있던 아이 중  명이 눈을 비비며 일어난 것이다. 그 아이는 문이 열려 있는 것과 쯔르레이와 불타르의 상황을 보고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어…? 에?”

    쯔르레이는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곧바로 아이를 기절 시키려고 했지만  아이의 얼굴을 보자 그럴 수 없었다. 당황한 채 쯔르레이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는 바로 루비였다. 루비는 쯔르레이의 얼굴을 보자 더욱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다가가 루비의 입을 막고 말했다.

    “미안, 지금은 나갈  없어. 나중에 꼭 구해주러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줘.”

    “읍읍? 늡으브?”

    아마도 루비는 쯔르레이를 알아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러나 아쉽게도 재회의 기쁨을 나눌 시간은 없었다. 쯔르레이는 루비를 내버려둔 채 다시 감옥 밖을 나갔다. 불타르는 열린 문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문을 잠가버렸다.

    “어째서?”

    “괜히 문이 열린 걸 보고 도망치려 다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여기서 애들을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군.”

    대화를 하던  사람을 바라보던 루비가 곧 상황을 파악한 건지 철창에 달라붙어서 쯔르레이를 불렀다.

    “쯔르레이… 맞지?”

    “…조심히 기다리고 있어. 구하러 올 테니까.”

    “어째서 여길 온거야? 여긴 위험해!”

    “쉿, 조용히.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마.”

    “…하지만.”

    “루비는 착한 아이구나.”

    쯔르레이가 철창 너머로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모든 것이 잘 해결 될 거야.”

    “…나, 기다릴게.”

    “그래.”

    겉으로 보기에는 어린 두 소녀의 우정 어린 모습이었다. 오직 그 자리에 있는불타르만이  모습의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별 생각이 없는 듯 태평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쯔르레이도 루비도 몰랐다. 짐작할  없는 일이었다.

    모든 기다림에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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