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쯔르레이는 벤클과 다른 정보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빈민가의 한 골목으로 이동했다. 빈민가는 익숙하지 않은 악취가 풍기고 있었고 더럽고 지저분했다. 벤클은 따로 행동수칙 같은 걸 주어주지는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빈민가의 아이처럼 있으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있으라는 것이 어떻게 하란 건지 쯔르레이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수긍했다.
빈민가에는 악취만 도는 것이 아니었다. 어딜가나 둘 중 하나였다. 무기력함과 폭력.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고 그들 또한 살아숨쉬고 있었다. 쓰레기를 뒤지는 아이들, 도둑질을 하는 아이들, 썩은 과일을 먹고 있는 사람, 감자 한 조각을 두고 서로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창녀들.
쯔르레이가 썩은 과일들을 파는 가게 앞을 다가가자 낡고 구멍 뚫린 옷을 지닌 상인이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둑질을 하는 아이들 때문인지 신경질적으로 보였고 쯔르레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대놓고 욕설을 하며 쯔르레이를 쫓아냈다.
어느 한 구석으로 가자 창녀들이 남자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쯔르레이가 이전 고급 사창가에서 본 적극적인 창녀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들은 무기력했고 반쯤 헐벗은 옷 사이로는 멍자국들이 보였다.
쯔르레이에게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광경들이었다. 쯔르레이가 그런 감상을 품는다고 바뀌는 일 또한 없었고. 쯔르레이는 눈을 돌려버렸다. 자신의 목적은 여기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눈을 돌린다고 불쾌해진 기분까지 돌려지지는 않는 것이었다.
쯔르레이는 하루 종일 주변을 걸어다녔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쯔르레이는 골목길로 들어가 구석진 쓰레기 더미에서 잠을 청했다. 악취가 일어났지만 하루종일 걸어다니면서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 쓰레기 더미는 여관의 침대와는 달리 푹신하지도 않고 불편하고 어색한 잠자리였지만 어쩐지 피곤함 때문에 눈이 쉽게 감겨들어갔다.
다음 날 일찍 잠에서 깨어난 쯔르레이는 겉보기에 한층 더 빈민가의 아이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악취가 완전히 몸에 배었고 단순한 분장이던 것들은 진짜와 비교해도 별반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이제 남은 시간은 이틀이었고 그에 대한 초조함 때문인지 쯔르레이는 더욱 긴장되어보였다.
계속해서 빈민가의 사창가나 가게들 사이를 어물쩡거리며 돌아다니던 쯔르레이는 곧 어떤 눈치가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에서 누군가가 쯔르레이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시선은 쯔르레이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달려와서 쯔르레이에게 강하게 부딪혔다.
쯔르레이는 피할 수도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넘어졌고부딪혀 온 이도 넘어졌다. 그러나 부딪혀 온, 그 아이는 일어나서 쯔르레이의 위에 올라타 곧바로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물론, 뭔가 나올 리가 없었다.
“뭐야? 아무 것도 없잖아?”
혹시나 노예 상인의 끄나풀일까 기대한 쯔르레이는 그 말에 상대가 단순한 소매치기임을 깨닫고 밀쳐버렸다. 아이는 꽤 힘없이 뒤로 밀려나갔다.
“망할! 괜히 그렇게 안절부절하고 있지 말라고! 뭔가 숨기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이는 쯔르레이보다 한 두 살 많아보이는 외모의 소녀였다. 곱슬거리는 검은색 단발머리를 한 소녀는 꽤나 이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덮쳐오고는 무고한 쯔르레이를 욕하던 소녀는 곧 일어나서 다시 도망가버렸다. 다른 사냥감을 찾으러 가는거겠지. 쯔르레이는 천천히 그녀를 쫓아갔다. 어쩐지 그 소녀에게 뭔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녀의 동선은 꽤나 넓었다. 빈민가의 아이면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건지 빈민가의 온갖 지역을 돌아다니곤 했다. 주로 하는 일은 누군가 적당한, 자신보다 어린 나이대의 아이들을 골라 아까처럼 습격해 먹을 걸 뺏는 일이었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든간에 성과를 얻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 번은 도망치다가 쫓아오는 다른 아이들에게 잡힐 뻔하기도 했다.
아이를 따라다니는 지루한 스토킹도 하루가 다 되었다. 밤이 되자 아이는 쓰레기 더미를 하나 찾아내더니 그대로 그 위에 누워버렸다. 쯔르레이가 천천히 소녀에게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가려 할 때였다.
“하루종~일 따라다니더니 대체 무슨 볼일인거지?”
“…어떻게 알았지?”
쯔르레이는 진심으로 놀랐다. 쯔르레이는 아직 모습을 드러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 소녀는 쯔르레이가 있는 것을, 그것도 계속 따라다녔다는 것까지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상당히 허망했다.
“나는 감이 좋거든. 사실 반쯤은 찔러본거긴 한데, 정말 그렇게 순진하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어.”
“….”
“뭐, 그래서 왜 따라다닌 건데? 미안하지만 네가 봤듯이 아까 널 덮친 걸 보상해줄 여유 같은 건 없어.”
“그런 걸 따지러 온 게 아니다.”
“그래? 너, 이쪽 출신이 아니지? 딱봐도 여기서 있는게 어색한 그런 얼굴이야.”
“…많이 티가 나나?”
“겉만 봐서는 모르겠지만, 지금 말하는 걸 보면 확실한거 같네. 내 이름은 벨. 너는 누구야?”
“나는… 투르, 투르라고 한다.”
“가명인가?”
“….”
“가명이네. 너 꽤 순진하구나.”
쯔르레이는 한참이나 어린 아이에게 모든 걸 간파당했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나왔다. 이래서는 제대로 잡혀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물론 잡혀가는 것에 그런 건 의미가 없겠지만.
“처음에는… 여기 신참인가 싶어서 덮쳤는데, 말하는 거 보니까 그런 건 아닌거 같네.”
“물어볼 것이 있다.”
“공짜는 안돼. 하지만 너는 아까보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데? 저기 사창가 쪽으로 가면 널 데려갈 사람들은 충분히 있을 테니까. 딴…”
“노예 상인들은 어디에 있지?”
“…데 가서 알아봐. 뭐? 노예 상인이라고?”
“나는 노예 상인들을 찾고 있다. 나를 잡아갈.”
…그 말에 갑작스럽게 소녀가 다가와서 쯔르레이의 머리를 만졌다. 역시 이번에도 쯔르레이는 피하지 않았다. 소녀는 쯔르레이의 머리를 살펴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쯔르레이가 반응하기도 전에 쯔르레이의 머리에 씌여진 가발을 잡아당겼다.
“가발이네.”
쯔르레이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나부꼈다. 밤 중에도 그 아름다움은 전혀 바래지 않았다.
“아까 어쩐지 이상하긴 했어. 부딪혀서 머리가 잡아당겨졌는데 넌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지. 너 정체가 뭐야? 이런 금발머리… 귀족이라도 되는 건가?”
쯔르레이가 벨의 손에서 가발을 뺏어 다시 머리에 썼다.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넌 버려진 아이 같은 게 아니야. 맞지?”
“…그래.”
“좋아, 널 도와주겠어.”
“갑자기?”
“나는 감이 좋다고 했지. 너는 절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여기에 버려진 거라면 적어도 그런 태도를 보이진 않았을 거야. 그 가발도 말도 안되고. 그럼 너는 여기서 다시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거야.”
“….”
벨의 말은 정확했다. 쯔르레이는 이쯤 되면은 자신이 순진하다기보다는 벨이 너무 잔뼈가 굵은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빈민가에서 굴러먹어서그런 걸까? 아니, 그렇다고 하면 모든 빈민가의 아이들이 그래야겠지. 이건 그저 벨 그녀자신의 능력이었다. 벨에게는 통찰력이 있었고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비록 쓰레기나 주워먹는 인생이지만, 여기 사정에 대해서는 잘알지. 그리고 네 머리를 본 순간, 나는 알았어. 이건 기회라고.”
“대가는?”
“날, 이 곳에서 데리고 나가줘.”
다소 절박하게, 벨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다르게 조금 자신이 없어보였다.
쯔르레이는 고민했다. 이 작고 굶주린 소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올바른 일일까? 그러나 쯔르레이가 채 제대로 고민하기도 전에 소녀가 메마른 팔로 쯔르레이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아니, 고민하지마. 부탁이야. 평생 책임져달라는 얘기가 아니야. 어떻게든 이곳에서 나가서 조금, 정말 조금만 도와주면 돼. 빈민가에서 썩은 채로 굴러다니는 건 지쳤어. 너도 봤지? 아까 쓰레기를 주워먹는거. 그렇게라도 뭔갈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인 삶이라고.”
벨은 간절했다. 당돌한 소녀였지만 그 역시 빈민가의 아이였다. 이곳에서의 탈출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그것만을.
그러나 벨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잡을 줄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변화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얼마 안남았어. 사창가의 아저씨가 날 눈독 들이고 있어. 곧 남자를 받게 되겠지.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밖에서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밥을 먹을 수 있게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거기 밖에 없으니까.”
“사창가?”
“내가 그럼 여기서 노숙이라도 할 것 같아? 그럼 시체 찾는 일이 더 빠를 걸? 네가 사창가까지 쫓아오면 너까지 잡히니까 여기로 온 것 뿐이야.”
그 말에 쯔르레이는 고민을 지워버렸다. 결국 승낙해버린 것이다. 벨이란 아이를 돕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연을 맺어버린 이상, 이렇게 두고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모든 사실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노예상인에게 잡혀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 후에 모든 일이 끝난 후 돌아와서 벨을 구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노예 상인에게 잡혀가는 이유 같은 거, 나 같은 년은 짐작하기도 어렵지만 어쨌든 반드시 탈출할 생각이겠지? 네 머리를 보면 뭔가 귀한 신분일 테니 분명 누군가가 구하러 올 테고.”
쯔르레이의 황금색 머릿칼은 확실히 벨이 그런 확신을 가질만큼 밤 중에도 아름답게 빛났었다.
“네가 탈출하고 나면, 날 구하러 오는 거야. 믿겠어.”
“그래, 날 안내해줘.”
벨의 표정이 밝아졌다. 절박했던 그 얼굴과는 딴판인 모습이었다.
“좋아, 좋아. 이쪽으로 따라오라고. 우리 쪽 아저씨가 그런 일은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어두운 밤이었다. 빈민가에서는 불빛을 켤 수 있는 곳이 없었고 당연하게도 빈민가의 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벨은 모든 길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천천히 발을 옮기면서 움직였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빈민가의 밤에서 몇 안되게 불을 켜놓고 있는 건물이었다. 사창가는 아까 낮보다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고 아까보다 더욱 활기찬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널 잡아갈거야. 내가 속여서 데려왔다고 할거거든. 확실히 하라고!”
그 말을 남기고 벨은 사창가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있는 듯 했지만 다행히 일은 곧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얼마 안있어서 거구의 남자가 나오더니 쯔르레이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쯔르레이는 순진하게 서있었다. 곧 남자가 말을 걸었다.
“벨이 데려왔다고? 배가 고프다면서? 아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렇게 어린애가…. 자 들어오렴!”
연기 같은 건 영 모르겠는 쯔르레이였지만 여기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쯔르레이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 남자를 따라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 문이 닫히고 남자가 쯔르레이의 뒷목을 쳤다.
그 정도에 기절할 쯔르레이가 아니었지만 여기서는 그래야만 했다. 쯔르레이는 천천히 눈을 감고 쓰러졌다. 다행히 남자는 쯔르레이의 연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는 사람을 불러서 쯔르레이를 밧줄로 묶고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는 바깥에 있는 마차로 옮겼다.
곧 아무도 모르게 마차는 출발했다. 사창가의 건물 안에서 벨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기절시켰으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들은 쯔르레이의 눈까지 가려놓지는 않았다. 설사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어두워서 길을 파악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어차피 팔려나가면 볼 일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쯔르레이의 눈은 밝았다.
마차의 뒷칸에 실린 쯔르레이는 천천히 어딘가 먼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쯔르레이는 곧 그 곳이 살람 후작의 성 뒷 편으로 이어진 거리임을 깨달았다. 쯔르레이가 머물던 여관과 큰 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마차는 이윽고 움직임을 멈췄다. 마부 역할을 하던 남자는 이윽고 뒤에 묶인 쯔르레이를 들고 지하로 이루어진 길로 들어갔다. 지하로 들어서자 그곳은 완전히 미궁이나 마찬가지 일 정도로 복잡한 길들이 이어졌다. 쯔르레이는 최대한 길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기억했다.
도착한 곳은 한 감옥이었다. 감옥에는 상당한 수의 아이들이 이미 갇혀 있었고 문은 철창으로 되어있었다. 아이들은 쯔르레이처럼 묶여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다들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쯔르레이를 데려온 남자가 감옥을 감시하고 있는 간수에게 말했다.
“어이, 신참! 새 상품이 들어왔다. 잘 관리하라고.”
“네!”
어쩐지 대답하는그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하며 쯔르레이는 감옥 안에 있는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루비는? 루비는 있나? 쯔르레이는 구석진 곳에서 눈물진 얼굴로 잠을 자고 있는 루비를 발견했다. 다행이다. 아직 무사했다. 루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쯔르레이는은 묶인 채 그대로 감옥 안으로 들여보내졌다. 그런데 순간, 쯔르레이는 당황했다. 신참이라고 불린 간수였다. 순간적으로 그 간수와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간수의 얼굴이 정말 익숙한 얼굴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타르 세너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