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9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49/162)


  • 〈 149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순간 쯔르레이는 웃고 싶어졌다. 그러나 웃으면 안되는 걸 알고 있었기에 쯔르레이의 얼굴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그 표정은 어쩐지 참혹하였다. 쯔르레이는 자신의 표정을 볼  없었지만 적어도 정상적인 표정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고, 그것이 고통스러웠다.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나?”

    그런 참담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것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쯔르레이는 쇳소리가 가득한 목소리로, 비참하게 구걸하듯 물었다.

    율라티에의 표정도 마찬가지로 가관이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걸 말해야 하는 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금기를 범하는 어리석은 사제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율라티에는 깊게 고민하고, 또 괴로워 하면서 술을 들이켰다. 술기운이 그를 잠식한 것일까, 아니면 술기운 탓으로 모든 걸 돌려버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결국 끝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오래 전, 언제인지는 잘모르겠습니다. 저도 직접  기억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그렇게 오래 전의 일은 아닐겁니다. 적어도 산 아래의 어리석은 것, 우리들의 수명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까요. 용들의 이야기를 논할 만큼 오래 전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기에는 힘든 오래 전의 이야기. 누군가였다면 잊어버렸을, 포기하고 단념했을 이야기의 파편.

    생하울라님은 용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율라티에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을 맺었다.

    “쯔르레이님에게 아마도 전해지지 않았을 이야기입니다. 생하울라님은 위대한 오크들의 왕, 오크로드 빌마하르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말은 즉슨 생하울라님은 전장의 순례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오크로드의 지위를 계승하셨을거란 뜻입니다.”

    “그가 왕자란건가. 내게는 그런 이들이 참 잘도 모여드는 군.”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생하울라님은 오크로드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을 거부하시고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

    “사랑, 사랑… 이라고?”

    “철혈과도 같이 단단하고 산맥처럼 둔중한 생하울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시작된 열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졌고 모든 영광과 명예를 뒤로  채 떠났습니다.  상대는 아직 어린 엘프 족의 공주였습니다.”

    “엘프….”

    쯔르레이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엘프 류나벨트를 떠올렸다.

    “생하울라님은 사랑에 보답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엘프들의 나라로 떠나서 무릎을 꿇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그녀의 기사가 되리라! 이 도끼를 공주의 이름 아래에 뉘이리라! 본디 엘프들은 야만적이고 성정이 냉정하기에 점잖으면서 불과 같은 오크를 싫어하는 일이 많습니다만, 생하울라님은 예외였습니다. 생하울라님은 온화하며유쾌하고 동시에 강인했습니다. 오크와 엘프 인간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시던 그 공로를 인정 받고 있던 것이죠.”

    “유쾌하다라, 하.”

    쯔르레이가 비꼬았다.  편지를 보기 전이었다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  있었겠지. 그러나 술에 취한 채 이야기하고 있는 율라티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척일 수도 있고.

    “평생을 오크로드의 아들로 살아온 생하울라님이 엘프 사회에  적응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결국 생하울라님은 엘프의 기사가 되었고 그들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엘프와 오크, 그 흔치 않은 조합은 겉으로 보기에는  되어가고 있는  보였습니다. 생하울라님은 엘프 공주가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고 자신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엘프 공주가 생하울라님을 사랑했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이가 나쁘단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잘 풀릴 것만 같았죠.”

    율라티에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조금 기다린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때의 그 사건만 없었다면 말이죠.”

    “그 사건?

    쯔르레이가 되물었다.

    “엘프족들이 어째서 지금 나라를 갖지 못한  흩어져서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니, 모른다네. 적어도 내가 태어난 이후로, 엘프들에게 나라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다시 율라티에가 술을 한모금 들이켰다. 마시지 않고는 얘기할  없는 이야기였을까? 쯔르레이가 듣기에는 그랬다.

    “그것은 단 한 존재의 변덕 때문이었습니다. 하나의 검은 용이 그  날아올랐습니다. 용이 숨결을 내쉬자 수많은 엘프들이 땅바닥에 묻혀 죽었습니다. 누군가는 녹아내렸으며 누군가는 가라앉았죠. 그리고 그 날 생하울라님은 그 곳에 없었습니다.

    생하울라님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라고 했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엘프들의 왕국은 멸망했고 엘프들은 문명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생하울라님이  날 어떻게 되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절규했을 수도 있고, 복수를 다짐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결국 생하울라님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수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해 전장의 순례자가 되었습니다.

     분은 용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분노도 증오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웃지도 울지도 않았습니다.  분은 시체처럼 변한  같았습니다. 아니, 시체도  보다는 더욱 풍부한 표정을 지닐 것입니다.

    천천히, 천천히 생하울라님은 돌아오셨습니다. 순례를 다니며 다시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시작했고 죽은 자들을 위한 진혼곡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눈, 그 심장,  안에 담긴 무언가를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것처럼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와는 아주 오랜 시간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생하울라님이 기운을 되찾았다고  참사를 드디어 잊으셨다고.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만. 그리고 생하울라님을 다시 뵙게 됐을 때는, 그 자리에 당신이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생하울라님이 웃고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그 웃음을 되찾아줬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생하울라님이 기운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율라티에의 긴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아니, 그것이 사실은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쯔르레이는 이 이야기가 마치 데자뷰처럼 느껴졌다. 일족이 죽고 혼자 남은 자의 이야기,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니던가. 심지어 그가 엘프를 사랑했다는 것조차 비슷하여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 검은 용은 누구였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미쳐버린 광룡 갤러해드란 이야기도 있고, 그대의 일족을 몰살한 울푸레일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정보는 오직 그 용이 흑룡이었단 것 뿐입니다. 그러나 갤러해드가 오랜 시간 자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

    그래서였나. 그럴 수밖에 없었나? 자신을 거둔 이유는 당신과 같은 신세라서 그런거였나? 죽음을 종용한 것은, 내가 울푸레의 자식이라서 그런 거였나? 쯔르레이는 율라티에의 손에 잡혀있던 술잔을 뺏어 그대로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두 모금 정도 되는 양의 술이 쯔르레이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괜찮습니까?”

    “안괜찮을건 뭔가? 안마시고는 못배기겠어.”

    “….”

    술은 쯔르레이의 몸을 곧바로 뎁혀주었다. 쓰고 맛도 없는 이런 것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더워졌고 어지러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꼼짝없이 몸에 그대로 붙잡혀 있었다. 술기운이 쯔르레이를 잡았지만 그럼에도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보게.”

    “이건?”

    쯔르레이가 품에 담아두었던 편지를 한 장 꺼내었다. 그것은 생하울라가 강철 부리 부족에게 전해달라고 건네준 편지였다. 자신을 죽이라고 적혀있는 편지였다. 율라티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편지를 읽었다.

    “이건….”

    “재밌구만. 생하울라는 자네 말대로  죽이려고 했으니까.”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지? 크크큭.”

    쯔르레이는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담았다. 그리고 다시 들이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쯔르레이의 작은 입으로는 한번에 마시지 못할만큼 많은 양이었다. 쯔르레이가 술잔을 내려놓자 반 이상이 훨씬 남은 술잔만이 남아있었다.

    율라티에는 다시금 쯔르레이의 술잔을 뺏어 자신의 앞으로 돌려놓았다.

    “아, 왜!”

    “더 마시면 이야기가 안됩니다. 그만하시지요.”

    “이씨….”

    술을 뺏긴 쯔르레이는 지금 상황도 잊고 투정부렸지만 율라티에는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쯔르레이는 입맛을 다시며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강철 부리의 부족의 힘이라면,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을 죽일 수 없을 겁니다. 쯔르레이님이 정말 반룡이라면 말입니다.”

    “그건… 무슨 소리지?”

    “이 편지를 전한다고 해서 당신이 죽을 일은 없을거란 얘기입니다. 애초에 당신을 정말 죽이려고 했다면 생하울라님이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없겠지요. 초월자가 아니라면 반룡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처럼 어린 반룡이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입으로 어리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 영 어색했지만 그것 외에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위험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다시 그 육신이 살아숨쉬기 시작하는 걸 경험한 기억이 없습니까?”

    “…있다.”

    “용이란 그런 생물입니다. 아니, 그들이 정말 생물인지도 알 수 없군요. 그러나 확실한 건, 종족의 한계를 초월할 정도로 강인한 자들이 아니라면 그들을 죽이는 건 불가능 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쯔르레이가 소리쳤다. 동시에 테이블을 두 손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율라티에는 솜씨좋게 잔과 술병을 들어 술이 넘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술이 넘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쯔르레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은 막을  없었다.

    “그가 나를 죽이라는 말을 써서 보낸단 말인가?!”

    “그건… 죄송합니다. 저로써는 이유를  수 없군요. 하지만….”

    “하지만?”

    “제가 보았을 때,  분이 같이 있을 때 생하울라님이 지으신 웃음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제 눈엔 그렇게 보였습니다.”

    “…다 거짓말이야. 다….”

    쯔르레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한번 힘을 써서 난리를 친 것 때문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원래의 쯔르레이라면 속으로 어느 정도 희망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그가 나를 죽이려고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죽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기에 그런 편지를  것이 아닐까.

    하지만 쯔르레이는 너무 많이 속아왔고 너무 많이 잃어왔다. 지금 그를 다시 믿기에는 너무나도 상처받은 영혼을 가진 것이었다. 더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더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그와 다시 만나서 모든 오해를 풀  있다고 하더라도, 더는 그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없을 것 같았다.

    생하울라여,

    그대와 나는 정말로 친구였는가?

    쯔르레이는 눈물과 함께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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