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7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47/162)


  • 〈 147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잠, 아니 기절이라고 해야 맞을, 그러한 것의 총체에서 깨어난 쯔르레이는 곧바로 어제의 격통을 떠올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흐아악…!!!”

    온 몸을 괴롭히던 격통, 그러나 지금은 괜찮았다. 쯔르레이는 숨을 가로쉬며 자신을 쫓아오는 고통 속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다행히 그렇게 끈기 있는 주자는 아니었고 곧 쯔르레이는 자신을 몸서리치게 만들던 격통을 잊을  있었다.

    격통에서 벗어나면  다음 단계였다. 쯔르레이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떠올렸다. 주박이 걸렸다. 저주에 가까운 것이겠지. 그것을 뮈미르가 자신에게 걸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어디? 솜뭉치는 어디? 쯔르레이는 어디?

    놀랍게도 쯔르레이는 아까의 방에 그대로 있었다. 심지어 옷까지 잠옷으로 갈아입혀진 채였고 얌전히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이걸 갈아입힌 건 아마도 뮈미르겠지. 뮈미르를 생각하자 가슴이 싸늘해졌다.

    쯔르레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당장 솜뭉치를 찾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걸 그대로 놔뒀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가만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맥빠지게도 솜뭉치는 침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었다.

    “…어째서?”

    혼잣말로 중얼거려봤지만 어차피 생각해보면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솜뭉치를 갖고 있어도 제압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단 거겠지. 실제로 그랬고, 이걸 갖고 도망친다고 해도 금방 잡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었다.

    확실히 쯔르레이와 뮈미르의 차이는 그러했다. 같은 반룡인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것은 살아온 세월의 차이 때문일까. 쯔르레이는 부족한 무력이 가슴에 사무쳤다.

    솜뭉치를 들고 다시금 침대로 올라오자, 어제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뮈미르에게 당한 것이 굉장히 기분 나쁘고 끔찍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이 되어서까지 뮈미르는 결백을 주장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장의 계획 자체는 어그러진 것이 없었다. 그저 골치아픈 주박 하나가 붙은  뿐이었다. 문제라면, 그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는 것이지만.

    “일어났군요.”

    당연하게도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뮈미르였다. 뮈미르는 태평하게 음식이 가득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있었고 그 얼굴에 어제 일의 흔적 같은 것은 전혀남아있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침대 위에 서서 솜뭉치를 뮈미르에게 겨누었다. 뮈미르가 자신에게 건 주박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할 수는 없는노릇이었다. 그러나 뮈미르는 쯔르레이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쯔르레이는 자신을 무시하고 음식을 먹어치우는 뮈미르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배에서꼬르륵 소리를 내보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쯔르레이는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효과는 그리 좋지 않은 듯 했다. 쯔르레이는 붉게 물든 얼굴을 채 숨기려고 하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날 어떻게 할거지?”

    “어떻게 하다뇨? 변한 것은 없습니다. 동생이 지금 아파서 쉬고 있다고 바깥에는 말해두었습니다. 보양식을  받아왔으니 먹죠.”

    “난 당신 동생이 아니야.”

    “제가 다시 쯔르레이의 이름을 불러야 존댓말을 할 건가요?”

    뮈미르는 간단하게 주박을 입에 올렸다. 그 비인간적인 협박에 쯔르레이는 차라리 그냥 입을 닫아버리는  선택했는데 뮈미르는 갑자기 한숨을푹 내쉬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미안해요, 쯔르레이. 후우, 사과하겠어요.”

    “사과… 한다고?”

    뮈미르는 쯔르레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한쪽에 둔  죽 그릇을 들어올렸다.

    “자,  하세요.”


    “사과한다는 얘기부터 먼접읍읍.”

    쯔르레이는 당연히 죽보다는 뮈미르의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졌지만, 뮈미르는 쯔르레이의 생각보다 더했다. 쯔르레이의 이름을 부르며 고통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뮈미르는 그냥 수저를 그대로 쯔르레이의 입에 쳐박아버렸으니까.

    “읍, 읍!”

    “그러게 아 하라고 했죠?”

    여기까지 와서 쯔르레이도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 마당이었다. 결국 쯔르레이는 입을 벌렸고 아기새가 모이를 받아먹 듯 뮈미르에게서 죽을 받아먹었다.어제까지만해도 쯔르레이를 노예처럼 만들어버릴 것 같은 기색을 내뿜던 뮈미르의 태도변화가 쯔르레이는 당황스러웠다.

    “아프게  건 미안해요.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거에요.”

    그 뒤에는 ‘물론 쯔르레이가 착한 아이로 있으면 말이에요.’ 라는 꼬릿말이 따라붙었다.

    “너는… 사과한다고 했어.”

    “그래, 맞아요. 어른인 제가 너무 흥분해버렸어요. 쯔르레이에게 차분히 설명할 수도 있는거였는데.”

    “….”

    “쯔르레이에게 화를  건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어요. 미안해요, 쯔르레이. 사과할게요.”

    “사과할거라면, 네가 정말 결백하다면 이 주박을 풀어.”

    쯔르레이가 여전히 자신의 목에 박혀 있는 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리 뮈미르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사과한다고 해봐야 이 주박이 남아있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였고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뮈미르는 거부했다.

    “그건 안되겠어요.”

    “어째서지?”

    “쯔르레이가 나를 아직 믿고 있지 않으니까요. 저는 쯔르레이가 도망가는 걸 원하지 않아요.”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쯔르레이가 저를 믿지 않는 만큼, 저도 아직 쯔르레이를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쯔르레이가 계속 착한 아이로 있었준다면 언젠가 그 주박은 풀어주도록 할게요.”

    “…불공평하다.”

    “잊었습니까? 용은 가장 아름답게 불공평한 존재입니다.”

    쯔르레이는 뮈미르가 떠주는 죽을 오물오물 계속해서 씹어삼켰다. 죽을 거의다 먹었을 무렵, 쯔르레이는 다시 입을 열어 뮈미르의 결백을 추궁했다.

    “…너는 울푸레와 만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건 사실인가?”

    “제 아버지 갤러해드는 일 평생 두 명의 여식을 슬하에 두었죠. 중 하나가 울푸레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두 번째인 제가 울푸레와 관련있다는 건 아쉽게도 틀린 말이에요.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째서지?”

    “울푸레는 제가 태어났을 때 이미 광증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에 만날 일은 없었습니다.”

    “광증….”

    “흑룡의 피는 그 소유자를 미치게 합니다.  광기의 방향이 어느 곳으로 세어나갈 지는 알 없지만요. 저의 아버지 갤러해드는 스스로 이성을 놓아버리는 것을 선택했죠.”

    “광룡 갤러해듭으븝!.”

    쯔르레이가 광룡 갤러해드의 이름을 입에 담자 뮈미르는 마지막 남은 한 숟갈의 죽을 쯔르레이의  안에 꽂아넣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뮈미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저번에도 광룡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그녀는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다시는 제 아버지를 ‘광룡’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쯔르레이.”

    쯔르레이는 뜨거운  수저를 입에 담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것은 뮈미르 나름의 역린인  했다. 확실히 그것은 명예로운 종류의 이름은 아니긴 했다.

    “그렇다면, 왜 나한테 사실을 밝히지 않았지?”

    “사실을 밝히면 쯔르레이는 저를 적대하려고 했을테니까요. 그 전에 쯔르레이와 먼저 친해지려고 했습니다.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지금도 그녀가 울푸레의 동생임이 밝혀지자마자 곧바로 적대했고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뮈미르가 자신에게목줄을 채운 걸 용납할  없었다. 물론 언젠가 풀어준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 어떻게 알겠나?

    “결백한  믿어준다고하면, 이걸 풀어줄 건가?”

    “존댓말하면 생각해볼게요.”

    “할게요.”

    “생각해봤는데 안되겠어요.”

    “….”

    어린애 말장난 같은 대화였다. 쯔르레이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고 뮈미르도 그리하였다. 죽을 다 비운 쯔르레이에게 뮈미르는 다른 빵을 스프에 적셔 먹여주기 시작했고 쯔르레이는 받아먹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어제의 고통은 잊혀지지 않고 그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박이 아니었다면 마냥 순순히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주박이 풀리지 않는 한 쯔르레이는 뮈미르의 손바닥 안 인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상 외로 뮈미르는 쯔르레이를 더 구속하거나 하지 않았다. 쯔르레이가 음식을 다 해치우자 뮈미르가 쯔르레이에게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어제는 계속 누워있느라 못나갔으니, 오늘은 나가서 놀다 와도 좋아요.”

    “…뭐?”

    “아이들과 약속하지 않았나요? 어제 루비라는 그 아이가 찾아왔어요. 쯔르레이는 아파서 못나간다고 했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내가 어린애들이랑 놀거라고 생각하나?”

    “그런 말하는 것 치고는 꽤 많이 더러워져서들어왔었잖아요.”

    쯔르레이는 뮈미르에게 말로 이기는 것은 포기했다. 어쨌던 뮈미르의 품새에서 벗어날 수 있단 것은 다행이었다. 최소한 지금은 그녀의 시야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린애들이랑 만난다는 것을 핑계로 나가는 것은 꽤나 없어보이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쯔르레이는 나갈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쯔르레이, 잊지 마십시오.”

    “…?”

    “저는 쯔르레이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요.”

     말은 누군가 들었다면 아름답고 어쩌면 사랑스러웠을 이야기, 그러나 쯔르레이에게는 어쩐지 기분 나쁜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뮈미르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그녀가 자신을 쉽게 놓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