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5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45/162)



〈 145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친구…?”

쯔르레이가 뮈미르를 향해 찌푸러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쯔르레이의 실제 나이를 알고 있을텐데도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이 여자는.

하지만 쯔르레이는 곧 생각을 바꿨다. 어쩌면 뮈미르에게 있어서 이 소녀의 나이와 쯔르레이의 나이는 별 차이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뮈미르의 나이는 칠백 살이 넘는다고 하니까 둘의 나이는 그다지 큰 차이가 있는 걸로 보이진 않겠지.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친….

그러나 곧 루비의 말에 쯔르레이의 말이 삼켜졌다.

“친구! 맞아요!”

루비는 거인인 뮈미르가 무섭지도 않은 것일까. 쯔르레이의 손을 잡고 친구라며 들이댔다.

기이할 정도로 높은 친화력의 태도에 쯔르레이는얼굴을 찌푸린 채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그 순간 뮈미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쯔르레이는 결국 손을 놓을  없었다.

“어른인 저는, 여기서 빠져주겠습니다. 쯔르레이. 재밌게 놀다 오십시오.”

“잠깐…!”

뮈미르는 어째서일까, 쯔르레이를 루비에게 맡겨둔 채로 그대로 서커스장을 빠져나갔다. 설마 진심으로 쯔르레이가 이런 어린애랑 놀거라고 생각을 한 걸까? 아니면 어린 소녀의 동심을 지켜주려고 한 이유일까?

진심이든 아니든 곤란한 선택이었다. 결국 쯔르레이는 루비와 함께 남겨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루비는 순진하게 웃어재꼈다.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쯔르레이가 되물었다.

“헤헤….”

“왜 친구라고 한거지?”

“응? 그, 글쎄?”

“하아….”

“기분나빴다면미안해. 그치만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서….”

루비에겐 다행히도 쯔르레이는 아이들에게 그다지 가혹한 어른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냥한 편에 가까웠다. 아이가 저렇게 친해지고 싶다는데 마냥 거절할 수 있는 위인은 아니란 것이었다. 과거에 르베니와 지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아이였고 동시에 미워할 없는 친구… 같은 것이었다.

르베니를 떠올리니 더욱  루비를 박대하기가 껄끄러워졌다. 결국 쯔르레이는 아이에게는 좀 약한 면이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마음이  맛에 절여져 유해진 까닭일까, 쯔르레이는 상당히 너그러워져 있었다.

“…그래서 뭐하고 놀거지?”

“응?”

“놀자고 했지 않았나. 서커스도 끝났으니까 뭔가 따로 해야겠지.”

“진짜? 야호! 가자, 내가 모두에게 소개 시켜줄게!”

루비는 쯔르레이의 손목을 잡고 잡아당겼다. 원한다면 루비의 힘에 전혀 끌려가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만큼은 하면서 쯔르레이는 루비가 이끄는 대로 두었다. 루비는 쯔르레이를 마을의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공터로 이끌었다.

루비가 이끌고 간 공터에는 여러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루비를 포함하여 여자아이가 둘, 남자아이가셋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갑작스레 등장한 쯔르레이의 모습에 감탄하며 한 마디  했다.

“우와… 예쁘다!”

“나, 들어봤어! 너 거인 여자랑 다니는 그 꼬맹이지?”

“우디! 말 조심해, 꼬맹이라니!”

“저, 정말 귀족이 아닌거 맞아?”

“갈리, 귀족이라고 쫄지마! 그래봐야 여자애인 걸!”

“아, 안녕!  멜리사라고 해! 네 이름은 뭐야?”

아이들에게 쯔르레이는 대인기였다. 그런 외모에 그런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쯔르레이가 만약 귀족이었다면 어떡했을까 싶을 정도로 무례하기도 했고. 물론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도 쯔르레이에 대해 궁금해했고 쯔르레이도 어느 정도는 어울려 줄 생각이 있었다. 쯔르레이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내 이름은 쯔르레이다.”

“푸핫, 이상한 이름이네?”

“우디! 건방져,너!”

“메리, 너야말로!”

“이름이 쯔르레이구나?! 혹시 쯔르레이는 공주님이야?”

“공주님이 아니다. 나는 성이 없는 평민이다.”

“헤에! 진짜? 이렇게 예쁜데? 신기하다!”

“루비, 대단한데! 이렇게 예쁜 친구를 데려오다니!”

“헤헤, 내가  대단하긴 하지.”

그 외에도 아이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쯔르레이에게 물었다. 아이들에게 갑자기 거인과 함께 나타나서 지내고 있는 이쁜 여자아이의 이야기는 그저 흥미가득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쯔르레이는 적당히 대답해줄  있는 선에서 대답해주었다. 아이들은 쯔르레이만큼이나 거인 여자에게도 관심이 있는  했다.

“자, 그럼 새 멤버도 모였으니 이제 수가 맞네! 3대3으로  차자고!”

“남자애들은 맨날 공놀이 생각 밖에 없나봐! 저기 저 언덕으로 같이 산책이라도 가는  어때?”

이야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무슨 놀이를 할지를 두고 대립각을 세웠다. 사실 대립이라고 하기에는 귀엽고 유치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중요한 이야기였다. 우디와 멜리사는 공놀이를 할지, 산책을 갈지 싸웠는데 이야기가 끝날 기미를 안보이자 그들은 쯔르레이에게 선택을 넘겼다.

“그럼 공평하게 새로 들어온 쯔르레이에게 정하게 하자고! 자, 쯔르레이 공놀이야, 산책이야?!”

물론 쯔르레이의 선택은 말할 것도 없이 정해져있었다.

~

솔직하게 인정해야겠다. 쯔르레이는 재밌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어린애 놀이라고 비웃었던 공놀이가 재밌었다. 비싼 옷들이 먼지로 뒤덥히고 땀으로 흠뻑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같이 뛰어놀았다.

멜리사와 우디, 갈리와 아르코, 그리고 루비와 쯔르레이가 태그를 맺어 서로 공을 뺏고 뺏기는 단순한 놀이였다. 하지만 쯔르레이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놀이였다. 설산에서 살 때는 놀거리라고는사냥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아레히와 유리히하고만 어울렸었다. 그래서일까 이런 장난거리에 불과한공놀이가 쯔르레이에게 재밌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답지 않게 열이 올라 최선을 다해 뛰었고 당연하지만 덕분에 쯔르레이와 루비의 태그는 가장 많은 점수를 득점할 수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놀이였기에 망정이었지, 그마저도 아니었다면 다른 아이들은 공을 만져볼 수도 없었을것이다.

답지 않게 뛰어논 쯔르레이는 놀이가 끝나자 부끄럼에 젖어들었지만 뭐, 그래도 즐거웠으니 된  아니겠나. 쯔르레이는 뛰어놀면서 떠들던 아이들과는 달리 별로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에게는 말 없이도 충분한 이야기가 있는 법이었다. 아이들이 쯔르레이를 보며 선망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너 되게 잘뛴다!”

“진짜! 빠르더라!여자애인데도! 내일도 같이 놀래?”

“…생각해보고.”

아이들의 칭찬에 쯔르레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루비는 마치 자신이 칭찬 받은 것 마냥 의기양양했고.

그러나 쯔르레이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거절의 말을 내밀지는 아니하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웠을까, 뛰어노는 것이? 공놀이가?

사실 그런 것보다 즐거운 것은 또 따로 있었다. 이렇게 아이들과 같이 모여서 그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정말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힘든 일, 운명, 그리고 주박 같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게 즐거운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쯔르레이는 어쩌면 다시 한 번 이런 시간을 선택할지도 몰랐다. 그건, 쯔레이가 너무나 단 물에 취해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리석게도.

어찌되었건 간에 아이들과 쯔르레이는 즐겁게 놀았고, 밤이 어둑어둑하니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공터 바깥에서 쯔르레이의 반대 방향으로 아이들이 떠나갔다. 모두들 신분이 좋은 아이들은 아니었으니 고급 여관이 있는 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사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쯔르레이와 다른 아이들의 방향이 갈리게 된 것이다.

“잘있어! 조심해서 들어가고.”

“우리는 이쪽에서 살고 있고 매일 여기 모이니까 또 만나고 싶으면 이쪽으로 오면 돼.”

“잘있어, 쯔르레이! 내 이름 기억해! 우디라고!”

“그래, 기억하겠다.”

“루, 루비야! 나도 기억해줘야 해?”

“그래, 알았다. 루비.”

쯔르레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히 거의 반쯤 끌려오다시피 해서이뤄진 시간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간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  같았다. 그에 따라오는 부끄러움은 잠시 잊어버릴  있을 정도로.

“아참, 조심해서 돌아가야해, 쯔르레이? 요새 어린애들이 자꾸사라진다는 소문이 있어. 쯔르레이는 이쁘고 귀여우니까  조심해야해, 더!”

“그래, 알았다. 조심하도록 하지.”

“후훗, 그건 그렇고 쯔르레이 말투도 이상해. 내일 보자!”

그렇게 말하고는 루비도 떠나갔다. 쯔르레이는 루비가 떠나가는 걸 잠시 지켜보다 공터를 돌아보았다. 공터에는 아이들이 뛰어논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쯔르레이는 아까 전 공을 향해 휘두르던 발걸음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공터에서 몸을 움직였다. 건강한 움직임이었다.

바보같았다. 자신 정도나 되는 나이의 어른이 아이들과 즐겁게 뛰어놀았다는 게 바보 같았따. 그래서 더욱 부끄러웠고 그래서 더욱 즐거웠다. 자신도 모르게 쯔르레이는 조금 크게 웃어버렸다. 그 웃음은 어쩐지 어린아이 같아 더욱 귀여워보였으나 아쉽게도 그걸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

다?

쯔르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강렬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신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는 존재의 느낌이었다. 분명 아까 루비가 말했었다. 아이가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다고. 쯔르레이는 당장에 인기척을 숨긴 채 공터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존재감만 드러낸 채 자신의 위치는 전혀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보통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쯔르레이는 전투를 회피할 생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에게는 뮈미르도 솜뭉치도 없었다. 그것이 정답이었다. 그러나 도망치기 시작한 순간부터 쯔르레이를 뒤쫓는 상대방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쯔르레이보다 빨랐다.

쯔르레이의 뒤를 상대방이 덮쳤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막고 쯔르레이를 잡아버렸다.

“읍읍!”

쯔르레이는 발버둥쳤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상대는 쯔르레이보다 강했고, 당해낼  없었다. 그는 쯔르레이를 껴안고 뒷골목으로 이동했다. 쯔르레이가 계속 반항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곧 쯔르레이는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을 붙잡은 이의 손을 통해서 그의 피부색을 알 수 있었다. 초록색이었다.

뒷골목에 들어서자 그가 말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목소리, 쯔르레이는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그는 쯔르레이를 놓지 않았지만 그 손길은 사실 섬세했고 피해를 입히려는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하셨군요. 이렇게 데려온 것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벨투리안님.”

그가 쯔르레이를 놓아주었다. 쯔르레이는 지금이라도 도망가야하나 고민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그 생각을 참아내었다. 그는 쯔르레이를, 아니, 벨투리안을 알고 있는 이였다.

“오랜만입니다, 저는 율라티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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