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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44/162)


  • 〈 144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까?”

    “…그냥 알고 있는 오크를 본 것 같아서.”

    “아까 그 오크로군요.”

    뮈미르는  묻지 않았다. 그저 나온 술을 홀짝이며 음식을 계속해서 먹을 뿐이었다. 쯔르레이는 율라티에에 대해 조금 생각했다. 전장의 순례자가 되기 위해 순례를 거듭하고 있는 수도자 오크, 율라티에. 그러나 그와 자신의 친분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저 오크들 앞에 나섰을 때 잠깐 대화를 한 게 전부였으니.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뭘까? 그는 전장과 다른 오크들의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신세이니 지금도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와 얘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생하울라가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 분명했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수소문하면 그를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럴 정도로 궁금한 것도 아니었고 어쩌면 벌써 이곳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쯔르레이는 말 없이 스튜를 한 숟갈 퍼먹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맛있었던 것이 어쩐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생하울라가 해준 비프스튜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

    에레보스는 살람 영지의 중심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수도와 꽤 가까우면서 다른 영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렇다는 말은 즉슨 도시가 굉장히 크며 동시에 온갖 놀거리와 먹거리들이 가득하기도 하단 뜻이었다. 볼타르 왕국의 문화를 보려면 에레보스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화가 융성한 도시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뮈미르와 쯔르레이는 엄청나게 편하며 즐거운(적어도 뮈미르에게만큼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뮈미르와 지낸 며칠 간의 에레보스 생활은 쯔르레이에게도 아주 편했다. 과거 왕궁 시절에 있었을때와 비견될 정도였다. 뮈미르 취향의 귀여운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목욕도 할 수 있었고 잠자리는 편안했고 밥은 맛있었다. 지금까지 고행의 여행길을 걸어온 쯔르레이의 마음은 어쩔  없이 조금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에레보스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돈을 물쓰듯이 쓰고 다니는 거인 여성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어서면 가게 주인들의 입꼬리가 귓가에 걸리고 깍듯이 예의를 차린다고 하더라, 그러면 그녀가 보석을 내려준다더라. 대부분 틀린 소문은 아니었다. 물론 그와 더불어 그녀와 같이 다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한 금발머리의 어린 소녀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다.

    쯔르레이는 처음에는 뮈미르가 옷을 사고 받은 후면 곧바로 출발할 줄 알았다. 그러나 뮈미르는 무슨 목적에선지 계속해서 에레보스에 머물기를 고집했다. 쯔르레이는 평소라면 그 고집을 반대할 입장에 서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지나치게 고생한 쯔르레이는 뮈미르가 주는 단 맛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 날도 그랬다. 뮈미르가 액세서리를사고 그걸 멋대로 쯔르레이에게 걸쳐보는 일을  때였다.

    “언제까지  곳에 있을 겁니까?”

    “질렸습니까? 마사지라도 받으러 갈까요?”

    “그 말이 아닙니다. 언제 에레보스를 떠나실 생각이냔 말입니다. 옷도 전부 받았으니 이제 이 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금방 갈겁니다, 금방. 조금 여유롭게 기다립시다.”

    이런 여유로운 뮈미르의 태도에 쯔르레이도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원래의 쯔르레이라면 혼자서라도 떠났을 것이었으나 그러지 않은 것이 쯔르레이의 미온적인 태도를 증명하고 있었다.

    뮈미르의 태도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편한 생활은 지친 쯔르레이에게 단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뮈미르의 취향에 맞는 옷들을 입거나 목걸이나 반지 등을 걸치는 것은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뮈미르도 쯔르레이가 정말 싫다고 하면 그렇게까지 강요하지도 않았다. 뮈미르는 쯔르레이의 불만이 터져나오지 않도록 잘조절하고 있었다.

    뮈미르가 건네주는 에메랄드 목걸이를 목에 걸고 난 뒤 쯔르레이는 혼자서 의상실 바깥을 나와 헤매었다. 뮈미르는 여전히 목걸이나 반지 따위 등을 보고 있는 상태였다. 저러고 꽤 오랜 시간이 있을 테니 나가 있어도 상관은 없겠지.

    쯔르레이는 지금 솜뭉치를 갖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뮈미르나 쯔르레이나 둘 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의상실이나 액세서리 가게 같은 곳에 검을 들고가기는 좀 그랬고 뮈미르가 있다면 무력적으로 문제가 생길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쯔르레이는 귀족, 못해도 부유한 상인의 딸인 소녀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쯔르레이가 가게 대로 앞에서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은 꽤나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쯔르레이는 빙글빙글 돌다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밝은 하늘이었다. 그 순간 쯔르레이에게로 한 소녀가 부딪혀왔다.

    “꺄앗!”

    쯔르레이는 가볍게 소녀를 피해냈지만 그 덕에 소녀는 길바닥에 넘어져버렸다. 쯔르레이는 소녀에게 소매치기 같은 의도가 없는 단순한 실수임을 파악하고 손을 내미었다. 뮈미르와 며칠같이 있어서 말투가 옮은 것일까, 나온  말은 존댓말이었다.

    “괜찮습니까?”

    “아으… 응, 괜찮….”

    소녀는 쯔르레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더니 갑자기 쯔르레이의 얼굴을 보고는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는 곧 멍하니 중얼거렸다.

    “예쁘다….”

    그 말에 쯔르레이의 얼굴이 찌푸러졌다. 여전히 그런 말을 듣는 건 익숙하지가 않았다.  표정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한건지  소녀가 사과해왔다.

    “아, 미안해요. 어디 부딪히진 않았나요?”

    “괜찮다. 나는.”

    상대가 한낱 소녀일 따름에 쯔르레이는 뮈미르와 비슷한  말투를 고쳤다. 평소대로의 쯔르레이의 말투는 무뚝뚝해서 별로 그다지 괜찮아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소녀가 살짝 겁에 질려 말했다.

    “호, 혹시 귀족님이신가요? 저, 미, 미안해요!”

    “나는 귀족이 아니야.”

    물론 과거에 엘핀으로부터 받은 세이피어스라는 성이 있었던 적도 있지만, 그걸 버리고 도망나온게바로 자신이었다. 귀족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귀족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급 옷에 온갖 보석 액세서리를 장착하고 있는 쯔르레이의 모습은 귀족이 아니라고 하기도 힘들어보였다. 그래서일까 소녀는 또 엉뚱한 착각을 내뱉었다.

    “그럼 공주님…?”

    “…공주님도 아니다. 나는 평민이야.”

    “그렇구나. 되게 부자인가보다.”

    쯔르레이의입에서 평민이란 이야기가 나와서야 소녀는 안심한 듯 했다. 그 때 뒤에서 소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비! 어서와! 늦겠어!”

    “루비?”

    “아, 날 부르는거야! 루비는 내 이름이거든. 너는 이름이 뭐야?”

    “쯔르레이.”

    “쯔르레이… 이상한 이름이네. 아,아니 미안해. 놀리려는 생각은 없었어!”

    “신경쓰지 않는다.”

    “응. 그래, 고마워. 저기 혹시….”

    “응?”

    “같이 놀러갈래? 저기 신기한 서커스가 열리고 있대.”

    “되었다.”

    “아, 응 그래 미안해. 괜한 걸 권유했네. 신경쓰지마.”

    소녀는 쯔르레이가 제안을 거절한게 아쉬운지 그런 표정을 짓고는 길을 떠나갔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쯔르레이의 나이가 나이인데, 저런 아이들과 놀라고 하면 고역이 다름없을 것이다.

    비슷한 나잇대처럼 보이던 르베니와 놀 때는 그래고 괜찮았다. 르베니와 논다고 하면 같이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저런 진짜배기 아이들과 노는 건 결코 그런 놀이가 아닐테고 그건 너무 쯔르레이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또 뮈미르가 있으니 멀리 떨어지는 곳도 좋지 못했고.

    마침 뮈미르도 가게에서 나와 쯔르레이를 보았다.

    “여기 있었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워낙 늦어서.”

    “그렇군요.”

    뮈미르의 목에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 목걸이가 달려있었다. 쯔르레이가 물었다.

    “목걸이 같은 게 그렇게 좋습니까?”

    뮈미르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조금 고개를 흔들고는 말했다.

    “다릅니다.”

    “뭐가 다릅니까?”

    “목걸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좋아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것은 애매합니다. 거인들에게는 더 뛰어난 장인과 더 훌륭한 보석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흥…일까요.”

    “뮈미르를 위한?”

    “아뇨, 그대를 위한 것입니다.”

    쯔르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보석 같은 것들을 사주는 것이 쯔르레이를 위한 여흥이라고? 그러나 쯔르레이는 이런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고 오히려 불편했다. 그런데 어째서 쯔르레이에게 뮈미르는 그런 말을 건네는 것일까. 쯔르레이의 미간이 찌푸러지자 뮈미르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 어려운  나중에 생각하고 놀러갑시다. 저쪽에 신비한 서커스가 열렸다는 군요.”

    …쯔르레이는 아까 서커스에 같이 가자고  소녀가 생각났다.


    서커스에 도착하자 한쪽 구석에 아까 보았던  소녀가 있었다. 쯔르레이와 뮈미르는 다른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한쪽 구석에 앉아서 서커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고급진 옷들이 더러워지겠지만 둘은 신경쓰지 않았다.

    서커스는 신기하게도 돈을 받지 않고 손님들을 받았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간에 좋은 볼거리가 생겼으니 사람들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즐거울거라고 생각한 서커스에서 쯔르레이는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평범한 묘기들을 선보였을 때는 쯔르레이도 신기한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으나 후반의 연기들이 문제였다.

    후반의 연기들을 행하는 건 목에 사슬을 건 여러 아인들이었다. 불을 뿜는 리자드맨, 온 몸이 털로 뒤덥힌 사자 수인, 그리고  어항에 들어있는 인어였다. 인어만큼은 유일하게 사슬 같은 것을 쓰고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명확해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웃고 있었으나 쯔르레이는 눈치챌 수 있었다. 결코 이것이 그들의 의지로 행해지는 일이 아니라고. 그들은 노예였다. 볼타르 왕국은 아인종에 대해서 꽤나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이들은 타국의 서커스단. 왕국은아마 참견할 수도 없고 참견할 생각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오크 같은 종족들이 저런 곳에서 같은 대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쯔르레이는 불쾌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쯔르레이는 그걸 구해줄 생각도,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불쌍하고 이 일이 불쾌한다 한 들 자신의 선 밖의 일이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쯔르레이는 옆을 돌아보아 뮈미르를 쳐다보았다. 뮈미르는 한때 노예상인에게 붙잡힌 기억이 있었다. 혹시나 그들을 보고 분노하여 모든 것을 다 때려부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뮈미르의 표정은 편안했다. 분노하고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혹시 해서 물었다.

    “…괜찮습니까, 뮈미르?”

    “괜찮습니다. 쯔르레이는 착하군요.”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서커스의 클라이막스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서커스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그들은 다음에 열릴 서커스를 공지하며 그때는 더욱 화려하고 멋있는 볼거리 많다고 광고했다. 아마도 그 때에는 돈을 받겠지. 이런 곳에서는 약식 서커스로 손님을 끌고.

    둘이서 일어나자 멀리서 쯔르레이는 자신을 부르는 눈치를 받았다. 아까 그 소녀, 루비였다.

    “아, 안녕. 너도 보러왔구나. 같이 보러왔으면 좋았을텐데.”

    “일행이 따로 있었다.”

    “쯔르레이 친구를 사귀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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