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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43/162)


  • 〈 143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방에 들어선 뮈미르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퍽 편해보이는 눈치였다.

    “좋습니다. 쯔르레이도 눕겠습니까?”

    “절 껴안을 생각이라면, 저는 나가서 새로 방을 잡을겁니다.”


    “그럴 돈이 있다면 말이죠.”

    으윽. 뮈미르의 말에 쯔르레이가 이빨을 갈았다. 물론 쯔르레이에게 이런 고급스런 여관의 숙박비를 낼 정도의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뭐, 지금은 눕지 않아도 좋습니다. 지금 나가서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요.”

    “해야할 일?”

    “쇼핑입니다.”


    ~

    솔직히 말해서 옷을 사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당장 돈이 별로 없는 것도 있고 이런 모습으로 옷을 사는 것이 자신의 현 상황을 직시하게 만들다보니 불쾌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뮈미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돈은 자신이 낸다고 밝혔고 쯔르레이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거절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하지만 우선 나가기 전에 할 일이 따로 있었다. 목욕이었다. 고급 여관은 당연하다는 듯이 목욕 시설 또한 갖추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혹시나 뮈미르가 자신과 같이 목욕을 하려하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쯔르레이가 목욕탕에 혼자 들어서자 방심한 틈을 타서 목욕탕에 난입한 것이었다.


    뮈미르는 소녀처럼 어린 얼굴에 큰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몸매는 꽤나 풍만했고 그 모습은 쯔르레이에게는 꽤나 자극이 강했다. 물론 류나벨트와도 목욕을 한 경험이 있었으니 못버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얼굴이 빨개지는 것만큼은 막을  없었다.


    “쯔르레이, 얼굴이 빨갑니다.”


    “뮈미르 때문입니다!”

    쯔르레이가 소리쳤다. 물론 뮈미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적당히 씻고 나면 목욕탕을 벗어날 생각이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쯔르레이,  더 기다렸다가 나갑시다.”


    뮈미르의 가녀린 손이 쯔르레이를 붙잡은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쯔르레이의 힘으로는 뮈미르를 뿌리칠 수 없었고 결국 쯔르레이는 속절없이 뮈미르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목욕은 자주 할 수 없으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머리를 감아드리겠습니다.”


    뮈미르의 손길을 부드러웠다.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솜씨 좋게 쯔르레이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쯔르레이의 손이 닿지 않는 등을 닦는 것을 도와준 것도 뮈미르였다. 쯔르레이는 결국 뮈미르에게 자신도 뮈미르가 닦는 걸 도와준다고 말했다. 물론 등만이었지만.

    뮈미르의 커다란 등을 닦는 것은 꽤 지치는 일이었다. 쯔르레이의 작은 몸으로는 뮈미르가 앉아도 그 키를 넘지 못했다. 제대로 잘닦았는지 쯔르레이는 알  없었지만 뮈미르가 만족한 것을 보아하니 다행인 것 같았다.

    목욕이 다 끝나고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깨끗하고 깔끔히 씻은 몸에 다시 더러운 옷을 걸치니 폼이 살지 않았지만, 쯔르레이의 얼굴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그 미모를 발휘할  있었다. 여관바리들의 시선이 바뀐 것도 알  있을 정도로.

    뮈미르는 반대로 원래 입고 있던 회색 가죽 옷을 집어넣고 깔끔한 여성용 일상복을 꺼내 입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원단의 원피스였다. 그 위에 가죽 케이프를 덧입었다. 뮈미르와 같은 키 큰 소녀가 그런 차림을 하자 아름다웠지만 위압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아마도 키만 아니었다면 어딘가의 귀족가 영애로 보이지 않았을까. 사실은 왕족이지만.

    “잘어울립니까?”

    물론 쯔르레이가 대답할 수 있는 대사는 한가지 뿐이었다.

    뮈미르는 쯔르레이를 데리고 도시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의상실을 찾아 들어갔다. 물론 그런 가게에서 드레스라면 모를까, 쯔르레이가 입을 법한 여행복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뮈미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인을 불렀다.

    다행히도 쯔르레이의 차림새가 낡아보인다고 그녀를 박대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 그런 대우를 하기에 거인은 너무 이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이 아이가 입을 법한 여행복, 만드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나, 나흘 아니 사흘이면  것 같습니다만…. 돈은 있으신지….”


    그 말에 뮈미르는 대답없이 그저 가방에서 꺼낸 물건을 톡하고 내려놓았다. 주먹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였다. 의상실의 주인인 마담은 그걸 보고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놀란 모습을 보였다. 잠시 놀라던 그녀는 곧 작은 외눈 안경 같은 것을 꺼내 살펴보더니 정말로 숨이 헉하고 넘어가버렸다. 물론 엄청나게 놀랐다는 뜻이었다.

    “지, 진품.”

    “얼마나 걸립니까?”

    “이틀이면 됩니다! 금세 만들어드리죠! 최고의 품질!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이 의상실의 명예를 걸고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거 받고, 드레스 하나, 원피스 둘, 추운 곳에서 입을 일상복과 더운 곳에서 입을 일상복, 속옷들과 케이프도 하나, 따뜻한 로브도 하나 준비해주십시오, 후드가 달린 것으로. 여행복을 제외하면 기성품으로도 됩니다.”

    “물론이죠! 얼마든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자,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죠. 치수를 재야하니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따라가지 못하던 쯔르레이는 마담의 말에 따라 의상실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치수 정도는 부하 직원들에게 시켜도 될 텐데, 마담은 헹여나 직원들이 무례를 범할라 자기 자신이 직접 모든 일을 주관했다.


    잠시 후 치수를 재고 난 후 쯔르레이의 모습은 완전히 뒤바껴 있었다. 제대로 된 속옷조차도 못입고 이미 꽤 낡아버린 여행복은 뮈미르의 명령 하에 폐기처분 되었고 쯔르레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옷으로 갈아입혀졌다.

    물론 그 옷은 전적으로 뮈미르의 취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쯔르레이는 난생 처음 입어보는 브래지어가 답답하기만 했지만 뮈미르는 단호했다. 그나마 전에 기방에서 입었던 창녀의 속옷과는 다르게 단정한 것이 유일하게 나은 점이었다.

    아무튼 속옷을 입고 난 후에는 약간 짧지만 폭이 넓은 치마와 셔츠를 껴입고 그 위에 상큼한 모양새의 케이프를 걸쳤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부족한데 없는 귀족 영애가 마실이라도 나온  같은 차림새가 되었다. 당연히 불쾌했지만 그나마 프릴이나 레이스가 잔뜩 달린 옷은 아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물론 뮈미르가 구매한 옷에는 그런 것도 포함되어있었지만 그걸 입을 일이 얼마나 있으려고. 쯔르레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천사 같으십니다. 아가씨. 여기 이런 옷은 어떠신가요?”


    “…필요없어.”


    “좋습니다. 그것도 주세요.”


    마담의 아부도 그렇게 좋게 들리진 않았다. 물론 쯔르레이의 외모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 하나 없는 완전한 사실을 얘기한 것이겠지만 그러면서 여러 가지 옷을 권유해보는 것이 장사치의 사심 가득한 모양새를 내고 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쯔르레이의 모습은 천사 같이 귀엽고 아름다웠기에 뮈미르는  말에 혹해 여러 옷을 사들였다. 뮈미르는 즐거워보였지만 자신을 인형처럼 재단하는  모습이 쯔르레이에겐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사는 것이 어차피 뮈미르의 돈이었기 때문에 쯔르레이는 특별히 거부하려 들지 않았다. 안입으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안입으면.

    마담이 잠시 옷을 가지러  사이 쯔르레이가 뮈미르에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이렇게 돈을 써도.”

    “아버지의 둥지에는 저런  굴러다닙니다.”

    그 말에 쯔르레이는 납득했다. 하긴 용이란 것들이 보통 그렇지 뭐. 둥지에 돈 쌓아두고 보석과 보물들이 가득한. 네메시스의 둥지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아마 그녀도 그런 것들이 가득 쌓여있는 방이 어딘가에 있었겠지.


    “그렇다면 뭐….”


    “그건 그렇고  드레스 한 번 입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귀엽습니다. 아주 사랑스러울 겁니다.”


    “절대 사양입니다.”

    ~

    옷을 잔뜩 사들인 뮈미르는 쯔르레이에게 몇 벌 옷을 갈아입혀보려했지만 역시나 쯔르레이의 격렬한 거부에 힘입어 그 시도는 무산되었다. 옷들을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여관 쪽으로 보내라고 말한 뒤 둘은 의상실을 나왔다. 쯔르레이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의상실에서는 나가는 쯔르레이에게 서비스라면서 작고 귀여운 노란색의 모자까지 서비스로 얹어줬다. 어차피 그 다이아몬드 가격이  의상실에서 벌어들일 1년의 수익을 훨씬 넘을 테니 서비스라고 하기도 뭣했지만. 쯔르레이는 거절하려 했지만 뮈미르는 냉큼 받아들여 쯔르레이에게 씌워줬다. 쯔르레이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어쨌든 이제 쯔르레이는 이 기분나쁜 쇼핑이 끝났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뮈미르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제 악세사리를 사러 가봅시다.”

    “…?”

    쯔르레이는 그게 뭔 개소리냐는 표정을 있는 힘껏 지어 뮈미르에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뮈미르도 장난이 지나쳤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농담입니다.”

    “재미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사두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디서 쓸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어떻습니까?”

    “그만하세요.”

    다행히도 뮈미르의 장난, 그것이 정말 장난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거기서 끝이났다. 뮈미르는 그대로 쯔르레이를 데리고 마찬가지로 가장 비싼 이 도시의 음식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의상실의 마담에게 물었더니 추천해주는 음식점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

    그런 도중 쯔르레이는 결코 잘못 볼 수 없는 인간, 이 아닌 사람을 발견했다. 초록색의 피부에 낡은 로브를 쓰고 있는 그는 확실히 인간은 아니었다. 오크였다. 오랜만에 보는 오크에 쯔르레이는 반가움을 느꼈지만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가서 인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쩐지 그 얼굴이 조금 낯이 익은 것도 같았지만 잘기억나지 않았다.

    오크는 어떤 의미에서는 쯔르레이와 뮈미르보다 더욱 눈에 띄었다. 여행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의 행색은 어쩐지 보기 힘들어지는 고행의 구석이 있었다. 오크는 거인 뮈미르를 보더니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고, 쯔르레이를 보았을 때는 어쩐지 고개를 들썩였지만 그 외에는 별거 없이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쯔르레이는 그를 어디서 보았나 고민했지만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뮈미르는 오크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쯔르레이를 데리고  뿐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음식점은, 확실히 훌륭했다. 쯔르레이는 원체 별로 맛있는 것을 먹고 다닐  있던 환경이 아니었기에 입맛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식점의 음식들은 대단했다. 과거 왕궁에 있었을 때 먹었던 식사와도 비견된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전에 배운 예법이 아직 그 폼에 남아있었지만 쯔르레이는 그런건 신경쓸 생각도 못한 채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특히 쯔르레이의 입맛에는 달게 졸인 비프스튜가 일품이었다. 그러나 쯔르레이의 식욕은 뮈미르에 비할 바가 못되었는데 뮈미르는 거의 5인분은 되는 양의 음식들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먹어치웠다.

    식사를 하던 도중, 선금으로 역시 보석을 받은 음식점의 사장이 직접 나와서 서빙을 하며 물었다.

    “술은 맥주와 와인, 어느 것을 드시겠습니까?”

    “맥주, 라거로.”


    뮈미르는 능숙하게 술을 주문했다. 뮈미르가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자 과거 자신이 오크들의 앞에서 마셨던 술이 생각났다. 아마도 저 술과는 다를 것이겠지. 그 순간 쯔르레이는 그 장면에서 떠올리는 얼굴이 있었다.

    율라티에였다.


    쯔르레이가 모두의 앞에서 오크들과 맹우의 잔을 나눌 때 유일하게 의문을 두었던, 전장의 순례자가 되기 위해 떠돌아다니던 오크, 율라티에.


    아까 마주쳤던 오크는, 율라티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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