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불만이 가득 쌓인 어느 날은 쯔르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살람 영지에 진입한 뒤의 일이었다. 뮈미르는 마차를 몰고 있었고 쯔르레이는 바로 뒤에서 편히 앉아서 가고 있었다. 과묵하게 마차를 몰고 있던 뮈미르를 향해 쯔르레이가 말했다.
“뮈미르, 나는 뮈미르의 여동생이 아닙니다.”
“남동생입니까?”
“남동생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누나입니다.”
쯔르레이의 키의 두배는 될 법한 뮈미르가 갸우뚱거리는 모습은 꽤나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위압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쯔르레이의 속을 긁어놓는 건 잊지 않았다.
“엘핀이라는 초월자와 같이 있었을 때는 이런 것도 자주 했다고 들었습니다.”
뮈미르는 쉽게 말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쯔르레이의거부에 이번엔 엘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왔다. 그때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 꺼낸 것이 문제였을까. 어쨌든 그때는 휘리엘 때문에, 동시에 엘핀의 동생 연기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거였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그때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괜히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머리를 빗을 필요도 머리를 땋을 필요도.”
“나는 불가항력적인 존재입니다.”
쯔르레이는 뮈미르의 뻔뻔한 말에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뮈미르는 불가항력적인 존재가 맞았지만, 지금의 얘기는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쯔르레이는 뮈미르의 말을 반박할 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뮈미르의 말이 가진 힘이 너무 강해서 억지를 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때와는 다릅니다.”
“다릅니까?”
“다릅니다.”
“하지만 쯔르레이, 어린 반룡입니다.”
“…나는 어리지 않습니다.”
“아직 백 살도 되지않았습니다. 너무 어립니다. 보호가 필요합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금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서른 살이면 인간 기준으로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
“그러나, 지금 쯔르레이 그 모습, 과연 어린 나이가 아닌 것이 맞습니까?”
반대로 이번엔 뮈미르가 억지를 부렸다. 어리다니, 모습은 이렇지만 쯔르레이는 결코 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뮈미르의 시점에서는 영 아닌 듯 했다.
이쯤되면 쯔르레이도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확실히 쯔르레이의 지금 모습은 어린 아이가 맞았지만 그 속도 그러하지는 않다는 걸 뮈미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억지를 부려서는, 쯔르레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쯔르레이는 논점이 어그러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쯔르레이는 다시금 차근차근 생각해보았다. 애초에 쯔르레이는 여동생 취급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거였지, 보호 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보호받는 것도 그렇게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국엔 뮈미르의 말솜씨에 휘말려든 것이다.
“내가 어린 모습인 것과 뮈미르가 나를 동생 취급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앞으로는 그러지 마십시오.”
“쯔르레이는 불만이 많군요.”
“이건 정당한 항의입니다.”
“태양이 밝습니다.”
뜬금없는 선문답에 쯔르레이가 뮈미르를 쳐다보았다. 뮈미르 또한 웃으면서 쯔르레이를 쳐다보았다. 쯔르레이가 뮈미르의 웃음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광이 뮈미르를 비쳤다.
“재밌는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
뮈미르는 거인들 틈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때는 이렇게 뿔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평범한 거인으로 살아갔습니다. 뮈미르는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다른 거인들보다 훨씬 작았고 똑똑한 거인들과는 달리 머리도 멍청해서 그랬습니다.
거인들이 멍청하다는 이야기가 인간들 사이에서는 많이 퍼져있습니다만, 거인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들보다 훨씬 똑똑합니다. 아무튼 간에 작고 어린 뮈미르는 하루 빨리 크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병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버지, 흑룡 갤러해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뮈미르는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왜 바깥으로 나갔냐고요? 저도 잘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때는 혼자라는 게 너무 싫어서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혼자서도 괜찮을 거라고 증명할 수 있었을 것 같았습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뮈미르가 바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뮈미르는 선량해보이는 인간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친절했고 뮈미르에게 잘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뮈미르는 인간들에게 잡혔습니다. 노예상인들이었죠. 그들은 뮈미르에게 쇠고랑을 채우고 감옥에 가뒀습니다. 뮈미르는 울었습니다. 무서웠죠. 목에 달린 사슬은 아무리 애써도 끊어지지 않았고요. 그렇게 뮈미르는 팔려나갈 뻔 했습니다.
태양이 밝은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그 노예상인들의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때가 아버지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노예상인들의 감옥 안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갑자기 바깥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퍼지고 모든 것들이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하늘에서 흑룡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울고 있는 저를 구하러 왔습니다. 아버지의 등 뒤에는 불타오르는 도시들이 보였죠. 죽어가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인간이 밉지 않냐고 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죽는 건 싫었습니다.
저는 노예상인보다 아버지가 더 무서웠습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죽고 하나의 나라가, 문명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난 후에는 많은 것이 바뀐 후였습니다. 인간들은 아버지의 분노에 두려워해 그들의 존재 조차 지워버렸고 거인들은 저를 위험에 빠트린 죄로 큰 곤욕에 빠졌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둥지에서 일어났고요.
그 후로는 아버지의 둥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다른 거인들을 다시 보게 된 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 날 아버지는 울었습니다. 어머니를 챙겨주지 못해서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제게 미안한 일을 했다고 울었습니다. 저는 무서웠지만 아버지를 껴안아주었습니다. 그 뒤로는 아버지와 함께 쭉 살았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뮈미르의 이야기였습니다.
~
쯔르레이는 뭐라고 답해야할지 고민했다. 뮈미르의 이야기는 이상했다. 재밌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무서운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녀 나름의 과거사를 들려주는 방법인 걸까. 쯔르레이는 흑룡이 일으킨 거대한 파괴에 소름이 돋았다. 그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 환했다. 일족을 멸망시킬 때와 같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둘은 같은 흑룡이었다. 어쩌면 관계가 있는 걸까? 두려움을 애써 감춘 채로 쯔르레이가 조금 투덜거렸다.
“이게 지금 얘기와 무슨 상관입니까.”
“글쎄요. 잘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네요.”
쯔르레이는 불만을 드러냈다.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뮈미르가 짓는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아니, 무표정이라서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겠다. 하여간 표정을 잘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무표정이란 건 불편했다.
“이야기의 핵심은, 뮈미르가 사실은 외동딸이었다는 겁니다.”
“….”
“어라, 놀라지 않습니다.”
“저를 놀리고 있군요.”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뮈미르는 예전부터 동생이 갖고 싶었습니다.”
“놀리는 게 맞잖아!”
“쯔르레이는 아직 어립니다. 조금은 누나에게 어리광을 부려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어리지 않습니다! 저는 뮈미르의 동생도 아니고요!”
결국 쯔르레이는 고개를 돌려 마차 안에 누워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뮈미르는 보이지 않을 미소를 조금 지은 채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마차를 몰았다. 자신이 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 어린 반룡은 이야기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겠지.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
그 다음날, 둘은 살람 영지의 도시 에레보스에 진입했다. 도시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은 뮈미르의 모습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한 듯 입을 벌렸다. 거인을 처음보는 그들에게 키가 일반 성인 남성의 반배 이상 큰 소녀의 모습은 확실히 그럴만 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당황은 좀 더 이어졌다. 뮈미르가 신분증을 보여주자 병사들은 당황스럽다는 듯 뮈미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로서는 판단이 불가능하니 상급자를 불러오겠습니다.”
기다리는 새에 쯔르레이가 뮈미르에게 물었다.
“저들이 왜 그러는겁니까? 신분증이 어떻길래?”
“보시겠습니까?”
뮈미르가 보여준 신분증은딱 봐도 비싸보이는, 아니 단순히 비싼 정도가 아니라값어치를 판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황금으로 된 판에 보석으로 글씨가 써져잇었다. 거기에는 뮈미르의 얼굴과 알 수 없는 언어가 적혀 있었고 그 밑에는 쯔르레이가 익히 알고 있는 문자들이 써져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세계의 꿈 왕녀 뮈미르 아유시한’
“왕녀?”
“공주님입니다, 짜잔.”
뮈미르는 그런 대사를 치면서 웃지도 않은 채였다. 쯔르레이는 당황을 금치 못할 수가 없었다. 반룡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왕녀라고? 쯔르레이의 입장에서 두가지는 서로 아주 먼 거리를 갖고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쯔르레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공주, 르베니가 생각났다. 그녀와 뮈미르는 확실히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뿔이 달려있고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 추운 지방의 옷을 껴입은 그녀는 확실히 왕녀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 본 동화를 떠올리자 어쩐지 납득이 될 것도 같았다. 용은 항상 공주를 납치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은 역시 공주일 것이다.
“세계의 꿈은 거인들의 왕국입니다. 인간들과는 그다지 교류하지않고 있지만 존재를 모를 정도는 아닐 겁니다.”
고향을 생각하는 걸까, 뮈미르가 잠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쯔르레이를 보며 말했다.
“나중에 언젠가, 쯔르레이도 데려가주겠습니다.”
“…그렇지만 왜 굳이 이런 곳에서 드러내는 겁니까?”
쯔르레이는 의문을 담아 물었다. 일국의 왕녀나 되는 인물이 혼자 다니고 있다면 당연하지만 소문이 날 것이고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뮈미르는 전에, 듄벨의 영지에서도 이러고 다닌 것이었을까.
“이미 이전에도신분을드러내고 다녔으니 큰 의미는 없을 겁니다. 이런 신분을 드러낸다는 것은 오히려 괜한 시비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뮈미르는 자신감이 있어보였다. 하긴 반룡이니만큼 그녀를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상대는 없을 것이다. 그녀 자신만의 무력을 생각한다면 초월자가 오지 않는 한 그녀를 건드리는 건 불가능했다. 동시에 그녀를 건드린다면 거인 왕국과의 외교적인 문제까지 감안해야 할 것이다.
둘이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도중, 병사들의 상급자로 보이는 인물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경비대장이라고 밝히며 말을 이어나갔다.
“살람 영지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녀님. 확인이 되었으니 안으로 들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들어가도 된다는 얘기였다. 그는 재차 인사하며 뮈미르에게 호의를 표시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살람 후작가로연통을 넣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원하신다면 살람 후작가의 성에서 지내시는 것도 물론 가능하십니다. 연통을 넣어드릴까요?”
“그만. 되었습니다.”
경비대장은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예, 그럼 좋은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뮈미르는 경비대장의 말을 듣고는 곧장 마차를 출발시켰다. 주변 병사들에게서 확실히 뮈미르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입단속을하겠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거인족의 왕녀가 살람영지를 방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겠지.
물론 왕녀란 사실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뮈미르는 눈에 띄었다. 마차를 몰고 도시의 안으로 들어서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뮈미르에게로 쏠렸다. 뮈미르는 확실히 시선이 쏠리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지나가는 곳마다 거인족 소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쯔르레이는 그것이 영 불편했지만 뮈미르는 익숙한 일인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하였다.
“뮈미르는 불편하지 않습니까?”
“익숙하니까요. 예전보단 낫습니다. 거인족과 인간족의 사이가 좋지 않던 시절에는 이거보다 더했습니다.”
어떻게 더했다는 걸까. 쯔르레이는 굳이 듣고 싶지는 않았다.
뮈미르는 여관부터 찾았다. 당연하지만 가장 크고 가장 고급스러운 여관이었다. 여관은 뮈미르를 수용할 수 있을만큼 컸다. 단촐한 차림의 뮈미르는 생각보다 부자인 모양이었다. 하긴 왕녀 정도나 되는 신분이면 당연한 얘기였다.
초고급의 여관은 건물도 크고 방도 컸다. 하다못해 안에 있는 침대마저도 컸다. 뮈미르는 가장 큰 방을 빌렸다. 당연하게도 쯔르레이의 불평과는 별개로 둘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