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뮈미르와 대화하는 건 꽤나 목 아픈 일이었다. 둘 모두 과묵한 편이었기에 말이 많아 목이 아프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단순하게 물리적으로 뮈미르의 키가 너무 커서 반대로 키가 작은 쯔르레이에게 괴로운 것이란 뜻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쯔르레이는 애초에 말을 줄였다. 둘 사이는 덕분에 단기간에 친해지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서먹서먹해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뮈미르의 덕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곳은 어디인가요.”
위치를 물어보는 쯔르레이는 존댓말로 물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존댓말 정도야 얼마든지 써줄 수 있었다. 상대는 생명의 은인이었고 동시에 같은 반룡이었으며 자신보다 나이도 많았다. 누나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당황을 금치 못했지만 그렇게 부를 것도 아니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엘핀에게 오라버니라고 부르던 기억보다야 훨씬 나았다.
“곧 살람 영지에 도착할 것 같군요. 아마 삼 일 정도.”
“삼 일?”
쯔르레이는 놀랐다. 듄벨 영지에서 살람 영지까지는 쯔르레이가 알기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런데 벌써 삼 일이면 도착한다고?
“혹시 내가 잠들어있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당신은 일주일을 잠들어있었습니다.”
일주일이라, 그 정도나 잠들었던건가.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골똘히 생각하는 쯔르레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는지 뮈미르가 그 생각의 대답을 대신 해주었다.
“아마 그렇게 오래 잠들어있던 건, 당신 친구의 머리에 담긴 영혼의 흔적이 그대와 마주쳤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그 의태가 풀리는 것과 맞물려 받은 충격 때문에 잠든겁니다.”
“그렇다면… 눈 색깔이 갑자기 바뀌게 된 건 어찌된 일인가요.”
“당신은 솜뭉치로 스스로를 찔렀습니다. 그래서 몸 안에 있는 용의 부분이 일시적으로 죽어서 남은 반쪽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추측합니다.”
“남은 반쪽….”
“쯔르레이.”
뮈미르가 불렀다.
“당신의 반쪽은, 금시입니까?”
“….”
쯔르레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래, 어느 정도는 쯔르레이 자신도 예측하고 있었다. 머리에서 돋아나는 황금색 깃털, 금색 머리와 금색 눈, 그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의 새. 모른 척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쯔르레이는 울푸레를 찾는다던 그 황금의 새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존댓말.”
“네….”
자신도 모르게 다시 반말로 돌아온 말투를 뮈미르가 지적했다. 새삼 깐깐한 소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위기에 쳐하면 머리에서 황금색 깃털이 돋아납니다. 적어도 이것이 용의 특성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존댓말을 하자 어쩐지 말투가 뮈미르와 비슷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뮈미르의 무표정한 얼굴이 기분 좋아보이는 건 기분탓인걸까.
“나도 금시에 대해서는 잘모릅니다. 그들을 찾을 이유가 또 생겼군요.”
“왜 뮈미르는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겁니까.”
쯔르레이의 갑작스런 물음에 뮈미르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어째서일까. 솜뭉치를빌릴 기회를 잡기 위해서일까? 어째서 뮈미르는 쯔르레이와의 동행을 제안한 걸까? 쯔르레이에게도 그들을 찾아가야 할 이유는 있었지만 뮈미르는 그걸 알 수 없었다. 뛰어난 눈치로 쯔르레이가 그들과 관계가 있는 걸 알아챈 것일까?
그러나 뮈미르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예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아플 때는, 같이 있습니다.”
“당신은 아파보였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쯔르레이는 부끄러웠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내보였다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동정을 받는다는 것이 어색했다. 오로지 혼자일 시절에는 그럴 일이 없었는데. 그때는 오로지 혼자 괴로웠고 혼자 상념을 먹어치웠다.지금은 그런데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약해진 것일까? 아니면 더 많은 시련이 자신을 잡아먹은 것일까.
처참한 표정의 쯔르레이를 보고 뮈미르가 자신에게 안기라는 듯이 팔을 벌렸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다가가지 않았다. 친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헤어지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면 애초부터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 어리석고 바보 같은 방법이 끌릴 정도로 쯔르레이는 나약해져있었다.
쯔르레이는 곧장 마차 위로 올라가 모포를 덮고 누워버렸다. 거절의 표시였다. 그런데 뮈미르가 그런 쯔르레이를 따라 마차 위로 올라왔다. 거인의 것이기 때문일까, 자리는 충분히 넓었고 뮈미르가 누워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뮈미르는 쯔르레이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는 자신의 힘으로 쯔르레이를 끌어안았다. 뮈미르의 가슴이 쯔르레이의 등에 닿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뮈미르가 자신을 껴안았다는 것에 더욱 당황한 쯔르레이였다.
“뭐, 뭡니까.”
“따뜻합니다.”
쯔르레이는 발버둥 쳤지만 거인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발버둥치는 쯔르레이를 꼭 끌어안고 있는 뮈미르의 숨결이 쯔르레이의 목에 닿자 쯔르레이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놔주십시오.”
“안놓습니다.”
“왜 그러는겁니까.”
“혼자 자면 춥습니다.”
물론 쯔르레이는 그 말이 거짓말인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쯔르레이라면 모를까 칠백 년이나 살아온 강대한 힘을 가진 반룡이 고작 밤추위 때문에 고생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것은 쯔르레이를 안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이 분명했다.그러나 뮈미르는 부정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럼.”
“혼자 자면, 춥습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춥습니다.”
쯔르레이는 과연 이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쯔르레이를 위한 것인지, 뮈미르를 위한 것인지. 그러나 거절하기에는 뮈미르가 너무 강했고 따뜻했다. 결국 쯔르레이는 입을 닫고 자신의 등 뒤를 껴안은 뮈미르를 최대한 신경쓰지 않기로 하며 눈을 감았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아침이 밝았다. 정신을 차린 쯔르레이는 곧 아직도 자신이 뮈미르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려던 쯔르레이는 이내 곧 시도해보기도 전에 포기했다. 자기 전에도 불가능했던 것이 지금와서라고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뮈미르라는 이 반룡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것 같았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그 호의가 불편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혼자인게 편했고 혼자인게 좋았다. 혼자는 아프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룡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에게 달라붙었다.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뮈미르가 깨어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쯔르레이는 속절없이 뮈미르에게 안겨있어야 했다. 중간에 다시 한번 뮈미르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낑낑거려봤지만 역시 효과는 없었다. 깨어난 뮈미르가 말했다.
“잘잤습니까.”
“덕분에.”
“다행입니다.”
“비꼬는겁니다.”
뮈미르는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를 껴안은 품을 놓지 않았다. 그대로 쯔르레이를 안은 채로 앉아버린 뮈미르는 마차 안에 있는 가방에서 빗을 하나 꺼내들었다. 쯔르레이는 그걸 보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뮈미르는 천천히 쯔르레이를 품에 안은 채 쯔르레이의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머리가 많이 상했습니다.”
어이를 상실한 쯔르레이는 이제 와서는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머리를 빗어준다라, 과거 엘핀과 함께 있었을 때 이후로는 처음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반룡이라는 것은 확실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왜 이러는겁니까.”
쯔르레이는 차마 말릴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찬찬히 머리를 정리 중인 뮈미르에게 말로써 시위했다. 그러나 뮈미르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눈치채지 못한 척 하는건지, 쯔르레이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머리를 정리해줄 뿐이었다.
머리를 다 빗겨내리자 뮈미르는 이제는 쯔르레이의 머리를 갖고 놀기 시작했다. 머리의 한쪽 끝 부분을 땋아내려 땋은 머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쯔르레이는여기까지 와서는 더는 얘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쩐지 굉장히 피곤한 기분이었다.
“다 했습니다.”
뮈미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쯔르레이는 뮈미르의 품에서 벗어났다. 뮈미르도 더는 붙들지 않았다.
그동안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부스스했던 쯔르레이의 머리는 깔끔하게 정리됐고 한 쪽 머리를 예쁘게 땋아 내려 귀여웠다. 뮈미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쯔르레이에게 말해주었다.
“귀엽습니다.”
물론 쯔르레이가 좋아할만한 칭찬은 아니었다. 그러나 격렬하게 거부하는 것도 뮈미르의 심기를 거슬릴까봐 두려워 하지 못하였다. 결국 쯔르레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마차의 구석진 곳에 앉았다.
이런 일은 첫 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밤이 되자 뮈미르는 쯔르레이를 껴안고 잤고 일어나면 다시 머리를 빗고 또 다른 모양으로 머리를 바꿔주었다. 마차를 몰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잠시 쉬어갈 때면 쯔르레이의 곁에 달라붙었다.
쯔르레이는 이쯤되서는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뮈미르는 마치 자신을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머리를 빗어주거나 껴안는 것 정도야 참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여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쯔르레이가 그걸 말로 표현하는 일은 없었다. 스스로만 참으면 되는 일을 갖고 괜히 뮈미르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쯔르레이의 불만은 계속해서 쌓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