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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38/162)


  • 〈 138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화가 났다는 건 이해하겠다. 하지만,”

    “아뇨!”

    에리히가 노성을 질렀다. 분노의 숨결이 쯔르레이에게 느껴질 정도로 에리히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쯔르레이의 어깨를 잡고 외쳤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고 있다면, 아비를 잃은 아들 앞에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나타날 리가 없으니까요!”

    “당신이 죽은 그 아비의 아들 앞에!”

    쯔르레이는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레히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진건지.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한건지. 자신이 죽인 것은 자신의 친구 아레히였다. 그러나 오로지 그 한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죽인 또 하나의 존재는, 에리히의 아버지인 아레히였다.

    되려 죽은 아레히 앞에서 아레히가 직접 쯔르레이를 비난했으면 이렇게 참담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런 죄책감을 느낄 일은 없었으리라. 아레히는 한  쯔르레이를 버렸고 그래서 쯔르레이도 아레히를 버렸다.

    그랬기 때문에 그 둘 사이의 관계는 한번 무너졌다가 다시 재정립되었고 거기에 남은 것은 아레히의 빚 뿐이었다. 그렇기에 아레히가 자신을 비난하면 오히려 편했으리라.

    하지만 에리히는 달랐다. 에리히는 쯔르레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자신을 버렸던 아레히의 죄업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리히는 아레히의 죽음앞에 온전히 피해자였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을 버린 것도. 그에 대한 빚을 갚은 것도.”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되는거였어. 흑마법사를 구한다는 그 말도 안되는 일에 동원해서는 안되는 거 였다고!”

    “덕분에 아버지의 장례조차 치러줄 수 없어. 아버지의 목이 저 밖에 걸려서 썩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됐다고!”

    쯔르레이의 어깨를 붙잡고 무너져내리는 에리히에게  수 있는 말이라곤  하나 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당신이 증오스러워….”

    에리히는 기어이 눈물을 쏟아보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에리히는 쯔르레이의 어깨를 붙잡은 손을 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쯔르레이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오고 나서 모든 게 이상해졌어. 당신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고.”

    “미안하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는 행복했었는데…. 모든게 변해버렸어 아버지는 죽고, 아버지의 용병단은 끝장났어. 모두 감옥에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겠지.”

    “미안하다.”

    “당신의 같잖은 그 말도 안되는 부탁 때문에!”

    “미안하다.”

    할 수 있는 말이 그것 밖에 없었다. 쯔르레이는 말주변이 없었다.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조차도 헷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오직 그것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여기 그 낯짝을 들이민 것입니까? 나를 조롱하려고?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려고 왔습니까? 그렇다면 정답입니다. 당신의 그 웃기지도 않은 면상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거 같으니까.”

    그러나 그것만큼은 에리히의 이야기가 틀렸다. 에리히의 가슴은 이미 찢어져 있었으니까. 에리히의 가슴은 더는 채울  없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쯔르레이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아레히가 전해달라고 했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 내가 전해줄 수 있는 얘기는 그것 뿐이다.”

    “…빌어먹을! 그딴 얼굴로 말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죽음이 슬프다는 것처럼 표정 짓지 말라고요!”

    당신 때문에 죽은건데!

    맞았다. 쯔르레이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쯔르레이의 입에 나온  변명조차 되지 않을이야기 뿐이었다. 이제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텐데.

    “…그래, 맞다.  때문에 죽었다. 아레히는. 그리고 그건 정당한 계약의 대가였어.”

    “당신 역시도 그게 얼마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건지 알겠지요.”

    “그래, 이게 변명이 되진 않겠지. 그렇다면 적어도 널 구할  있게 해다오. 나와 같이… 나가자. 도망가자.”

    이곳에서 나가자.

    그러나 에리히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말한대로, 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저는 이곳에 남아야 합니다.”

    에리히는 마치 자신이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듯이 얘기했다. 그것을 쯔르레이는   있었다.

    “감옥에… 제리코 아저씨와 실비아 누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붙잡혀 있습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저는 나갈  없습니다.”

    “하지만, 네가 여기있는다면  목숨이.”

    “아마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하겠다고 여기 왔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미 스스로 제 목숨을 구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지?”

    “아마티코 듄벨, 그와 계약을 했습니다. 저는 그와 손을 잡았고 이제는 한 배를 탄 운명이죠.”

    아마티코 듄벨의 이름에 쯔르레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에리히를 죽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에리히의 입에서는 이미 그에게서 스스로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곳에  것은 헛수고였나?

    “저는 아르카딘 듄벨과알카디엔 듄벨을 죽이고, 백작이  겁니다.”

    “저에게 남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처럼 도망치지는 않을 겁니다.”

    쯔르레이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생각해보았다. 여기서 에리히를 구할 수 있는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을 구했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방향인지는 몰라도. 그렇다면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 전해주었다. 아레히의 유언을. 그것이 의미있는지는 몰라도 성공하였다. 차라리 실패하는  나았을 성공이지만. 어쨌든 전해주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슈라헤의 이름이었다.

    세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슈라헤.

    그것이 에리히 오바드 듄벨이었다.

    쯔르레이는 에리히에게 그것을 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슈라헤의 마지막 핏줄을 퍼트려라.”

    “아레히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게 만들어라.”

    쯔르레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에리히의 손을 잡은 뒤 손등을 물어뜯었다. 갑작스런 쯔르레이의 이상행동에 에리히가 손을 빼려고 했지만 쯔르레이의 힘은 강했고 빼낼 수 없었다. 에리히의 손등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피에 입을 대어 핥은  쯔르레이가선언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슈라헤여. 그대의 피가 용을 죽이고,”

    “그대의 손톱이 땅을 가르리라.”

    “그대의 눈썹에 바람이 파묻히고,”

    “그대의 발바닥이 하늘을 좇으리라.”

    “이끌어라, 용사냥꾼의 발을! 용사냥꾼의 길을 걸어올라라.”

    “네가 족장이다.”

    쯔르레이의 갑작스런 얘기에 에리히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에리히는 알지 못했으나 그것은 쯔르레이가 전해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더는 아무런 의미도 효력도 갖지 못하는 선언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에리히의 물음에 쯔르레이가답했다.

    “아레히가 죽었다. 벨투리안도 죽었지. 그러니 네가 유일하게 남은 슈라헤다. 그렇기에 너에게 슈라헤의 족장 자리를 계승시켰다. 더는 아무런 힘도 의미도 남아있지 않는 자리다. 그러나 네가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리라, 그것은.”

    “내가 왜 그런 자리를…! 당신이 살아있는데?”

    “내 모습을 봐라. 이것은  자의 것이 아니리라.”

    “필요없어! 이 따위 것…!”

    “그것이 네 아비의 장례가 되리라.”

    “…장례, 라고.”

    “퍼트려라, 용사냥꾼의 피를. 저주받은 흑룡의 울부짖음을 이어가라.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네 아버지의 이름을 살릴.”

    “….”

    “미안했다.”

    쯔르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 순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기척을 감추고 문 뒤로 숨었다.

    “…들어오십시오.

    “조금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서 찾아왔습니다만. 혼자시군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였다. 목소리가 새어나갔나 보다. 에리히는 아마티코와 손을 잡았다고 했지만, 기사들까지 에리히를 믿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의 눈에는 약간의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쯔르레이는 긴장했다.만약 여기서 에리히가 자신의 존재를 밝힌다면 그때는 끝장이었다. 에리히에게 슈라헤를 계승시켰고 그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으나 에리히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자신을 팔아넘겨도 결코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악몽을 꿔서 비명을 지른  좀 새어나가기라도 했나 보군요.”

    에리히는 쯔르레이를 팔아넘기지 않았다.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잠을 방해했군요. 잠깐  상처는…?”

    문제는 쯔르레이가 물어뜯은 에리히의 피묻은 손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악몽 때문에 날뛰다가 상처가 났나보군요.”

    “의사를 보내지요.”

    “괜찮습니다. 돌아가시지요.”

    에리히의 축객령에 기사는 미심쩍어했지만 딱히 더 트집을 잡을 생각은 없는지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사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쯔르레이가 다시 에리히의 앞에 섰다. 에리히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팔아넘기지 않은 거냐.”

    “저는 아직 설산에서 저를 구해준 당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래 전의 기억이었다.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 벨투리안이 얼어죽을 뻔한 에리히를 구해줬던 일이. 사소한 친절이었다. 그를 구해준 것은 일종의 변덕이었고, 그 때까지는 그가 아레히의 아들일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그것이 지금 이렇게 돌아와 쯔르레이의 목숨을 구원하였다.

    “가십시오.”

    “다시는, 보지 맙시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쯔르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문 밖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돌아오셨군요. 가셨던 일은.”

    “잘해결했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면 된다. 의뢰는 끝이다.”

    “물론 이 성을 나갈 때까지지만요. 안내하겠습니다.”

    돌아온 쯔르레이를 남자가 반겼다. 남자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쯔르레이의 귀환을 웃음으로 마주했다. 쯔르레이는 아마도  남자는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둘을 데리고 나가면서 자신이아닌 이를 도울  없다고 말한 것부터 이상했다.

    어쩌면 이 자는 이미 내부 사정을 파악해서 에리히를 구할 수 없다는, 에리히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뢰를 받아들인 것일지도 몰랐다. 그저 인장을 얻기 위해서.

    그러나  모든 것은 추측일 따름이었다. 쯔르레이는 그걸 입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끝난 일이었고 설사 지금 이걸 지적한다고 하더라도 인장을 돌려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쯔르레이는 모든 것이 다 귀찮아졌다.

    “돌아가도록 하지.”

    성 밖으로 나가는 일은 쉬웠다. 아까처럼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은  성벽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남자는 어째서인지 자꾸 뒤를 돌아보았짐나 쯔르레이는 신경쓰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그대로 남자의 도움을 받아 성벽을 넘어갔다. 성 밖을 빠져나오자 남자가 옷소매를 털더니  인사하였다.

    “그럼 저희의 인연도 여기까지군요.”

    “그래.”

    “아무쪼록 조심하시길.”

    “…?”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이미 성에서 나왔는데 무슨 조심이란 말인가. 그러나 쯔르레이는 곧 그 말뜻을 깨닫게 되었다. 도둑 길드에서 파견된 이들과 헤어지고  뒤 쯔르레이는 자신을 뒤쫓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전문적으로 훈련된 이들의 것은 아니었지만 시시각각 쯔르레이의 위치를 찾아 오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기척을 숨기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쯔르레이가 성 밖으로 나가고 나면 도둑 길드에서 쯔르레이를 호위할 이유는 없었다. 아무래도 기척은 기사들의 것. 처음에는 도둑 길드에서 쯔르레이를 팔아넘기기 위해 잡으려는 것인가 했지만 그러려면 더 좋은 기회가 있었다.

    아까 전 에리히의 방을 찾은 기사를 생각했다. 그는 애초에 에리히를 믿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향초에 취해있는 상황 자체가 이상함을 깨닫고 성 주변을 추적한거겠지. 그리고 도둑 길드와 헤어지고 나면 쓸데없는 교전도 피할 수 있으니 기다린거겠고.

    쯔르레이는 몰렸다. 기사들의 수는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집요했고 쯔르레이는 계속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교전을 개시한다면 도망치는 것은 무리였고 기사들 여럿에게 몰린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쯔르레이는 광장으로 향했다. 그래, 쯔르레이는 미친 짓을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들켰다면 더는 그 일을 하든 안하든 의미는 없는 일이겠지.

    광장에는 여전히 아레히의 목이 걸려있고 그 밑에는 그를 지키는 병사들이 두엇 있었다. 뒤에서는 기사들이 쫓아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병사들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기척을 숨긴 채 기습하는 쯔르레이의 공격에 병사들은 속절없이 당해 누워버렸고 쯔르레이는 아레히의 목이 달린 장대를 부숴버렸다.

    그리고 아레히의 목이 떨어졌다.

    그것이 땅에 닿기 직전 쯔르레이는 그것을 간신히 잡아들었다.

    그리고 꼭 껴안았다.

    “내가 왔다… 친구여.”

    “편히 잠들게 해주마.”
    쯔르레이가 부릅 떠있는아레히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고 쯔르레이를 향해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쯔르레이는 그 순간 정신을 잃었고, 거대한 그림자가 쯔르레이의 위로 섰다.

     수 없는 존재의 거대한 인영이 쯔르레이를 안아들었다.

    솜뭉치가 웅웅거리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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