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잠깐의 농담 이후, 지나간 시간에 쯔르레이를 덮친 것은 죄책감이었다. 베르헬트의 인장을 그렇게 쉽겨 넘겼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 그것은 자신의 손에 있었지만 이미 없는 것과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하고 결정한 것임에도 괴로웠다. 베르헬트의 인장을 품에서 꺼내 보자 싸늘하게 죽어버린, 이제는 더는 베르헬트가 아니게 된 베르헬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을 손에 꽉 쥐고 괴로워 하는 얼굴로 있자 불타르가 말을 걸어왔다.
“뭘 그렇게 혀 씹은 얼굴로 가만 있어?”
“…글쎄.”
“그 손에 쥐고 있는 건 뭐야?”
“…대가.”
“길드에 넘길 대가? 대체 뭐길래 길드에서 그런 말도 안되는 의뢰를 수락하게 한 거지?”
쯔르레이는 손을 펴서 베르헬트의 인장을 불타르에게 보여주었다. 불타르는 예상대로 그게 뭔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의 물음에 쯔르레이가 답해주었다.
“이게 뭔데?”
“베르헬트 가문의 인장이다.”
대답을 들은 불타르의 얼굴은 당연히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띄었다. 그는 꽤나 정보에 밝은 편이었으니 베르헬트라는 유명한 초월자에 대해서 정도는 알고 있겠지. 불타르는 그 인장을 보자마자 누구나 생각해볼법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런 대단한 물건을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설마 베르헬트 가문의 여식이라는 마이카 베르헬트가….”
“아니, 나는 아니다. 나는 마이카베르헬트가 아니야.”
“…하긴. 마이카 베르헬트는 아파서 누워있다고 들었지. 애초에 네가 귀족이 아니라는 걸 맞혔던 건 나였지. 그 수배서가 혹시나 진짜인가 해서 걱정할 뻔 했다고. 그래, 그렇다면 그 인장은 왜 네가 가지고 있는거지?”
쯔르레이는 여기서 굳이 대답해줄 필요가 없었다. 차가운 목소리로 ‘네가 알아서 뭐할건데.’ 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애초에 대답 자체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냥 주웠다고 거짓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쯔르레이는 그러지 않았다.
“북벽의 기사, 미켈라 베르헬트, 그 본인에게서 직접 받았다.”
“뭐, 그게 사실이야? 그를 만나봤다고?”
끄덕.
“대단하군. 그런데 왜 그가 너에게 그걸 맡겼지?”
“그는… 죽었다.”
사실 죽지 않았다. 죽는게 차라리 더 나을 상황이 되었을 뿐. 그러나쯔르레이는 용에 대한 이야기를 불타르에게 꺼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믿어줄리도 없었고 믿는다고 해도 그게 더 문제였다.
“죽었다고? 그가?”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죽으면서 나에게 이걸, 자신의 딸에게 가져다달라고 맡겼다.”
“…그런 물건을 팔아넘긴건가?”
“그래.”
불타르가 정색하고 나오자 쯔르레이는 긴장했다. 그의 입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말이 나오기를 각오한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떤 기분이 될까. 어쩌면 그런 비난을 자신이 직접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불타르의 반응은 영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수지가 안맞는데, 형씨.”
“….”
“이야, 그걸 팔아넘기는 건 그렇다치겠는데. 초월자의물건이라고? 좀 더 비싸게 팔 수 있지 않았나? 이런 의뢰에 넘기는 것보단 말이야.”
불타르의 비난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지금 도덕적으로 쯔르레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건을 싸게 팔았다고 비난하고 있었다. 당황한 쯔르레이가 되물었다.
“나를 비난하지 않는 건가?”
“비난? 어째서?”
“유언으로 남긴 물건을 함부러 팔아넘겼다고….”
“흠, 몰라서 묻는거지만 아가씨, 그와는 어떤 관계였나?”
“….”
“친구였나?”
“아니.”
“동료?”
“아니.”
“연인?
“아니다!“
“깜짝이야! 놀라게 하고 있어. 그럼 그렇네. 아무 것도 아닌 관계네. 근데 왜 그런 걸 신경 써야하지?”
쯔르레이는 할 말을 잊었다. 그것은 자신도 생각한 것이었고, 또한 고려해본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책임감 때문에 함부러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불타르는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그걸 거론해냈다. 잊고 있었지만, 불타르는 도둑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겠지. 어쩐지 머리가 하얘졌다.
“그를 죽인 것은 내 어미…였던 이다.”
“네가 네 엄마야?”
쯔르레이는 입을 닫았다.
그랬다. 쯔르레이는 빙룡이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로서는 오히려 그 양반이 이해가 안되는데. 친구도 동료도 연인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이한테 그런 걸 맡기는 거 말야. 물론 그럴만한 상황이었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받은 사람이 그 생각대로 해줄거라고 생각해서는 안되지. 넘긴 순간, 그걸 팔아넘기든 어디 갖다버리든 그건 받은 사람 재량이라고. 네가 숭고한 유언의 집행자가 될 필요는 없단 뜻이야.”
“네가 괜히 쓸 데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알겠지만, 좀더 생각해보라고. 그런 거 하등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이야기니까.”
“그리고, 아마 이 길드라면 그 인장을 팔아넘길 곳은 베르헬트 가문일 것이다. 상대가 좀 돈을 지불하게 되겠지만 네가 바라는대로그 인장은 주인에게로 돌아갈거야. 이래도 신경이 쓰여?”
불타르의 이야기는 감미로웠다. 그것이 훨씬 편한 방법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일순간 쯔르레이 역시도 그 생각을 그대로 따를까 고민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생각이 늘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확실히 불타르의 말을 듣고 마음이 편해졌음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죄책감을 잊을 생각도 없었다.
자신이 팔아넘긴 것은 베르헬트의 인장이 아니었다. 베르헬트조차 믿지 않았던, 베르헬트조차 사실 기대하지 않았을 그와의 신의였다. 괴로워하지 말자. 그렇지만 그것을 잊지 말자. 지금 죄책감을 버리지 말자.
그래서야 겨우 쯔르레이는 편해질 수 있었다. 불타르의 길은 결코 옳은 길도 아니었고 그것을 따를 생각도 아니었지만 그제서야 쯔르레이는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던 것이다.
“네 말대로 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군.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좀 편해졌다. 고맙다.”
“별 말씀을. 그나저나 그런 거 있으면 나한테 흥정 맡기지 그랬소. 그때 웅담 팔던 것처럼. 그랬으면 내가 잔돈까지 받아왔을텐데 말이야.”
“네가 갖고 도망칠 줄 어떻게 알고?”
“그도 그렇네, 하하.”
~
이틀의 시간은 금방 흘렀다.
밤, 도둑의 시간이 되자 쯔르레이는 남자와 다시 대면했다. 불타르는 함께하지 않았다. 그는 확실하게 이 일에 끼어들지 않을 것을 얘기했고 남자와 대면할 시간이 되자 자기 볼일을 보겠다고 떠났다. 쯔르레이는 아쉬웠으나 말리지는 않았다. 이 일에 참여하지 않을 것인데도 자신과 이틀간 같이 있어줬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남자가 설명해준 계획은 간단했다. 포섭해둔 병사들이 있는 쪽의 성벽을 타고 올라서 안으로 잠입해 지정해둔 경로로 이동해 서쪽 별관에 잠입하는 것이었다.
“이 일로 꽤나 많은 성내 인물들을 포섭했습니다. 하지만 기사들을 포섭하지는 못했으니, 그들과의 만남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
“에리히가 있는 곳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그들에게도 빈틈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충분히 그 빈틈을 파고들 실력이 있죠. 아닙니까?”
남자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얘기했다. 사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요 이틀간 쯔르레이의 실력을 어느 정도 확인해둔 상태였다. 특히 몸을 숨기는 그 재능만큼은 도둑으로 스카웃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맞다.”
“가도록 하죠.”
쯔르레이는 남자를 따라갔다. 듄벨의 성 앞에 도착하자 꽤 많은 도둑들이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듄벨의 성으로 다시 진입하는 건, 확실히 그들의 능력 덕분인지 훨씬 쉬웠다. 그들은 그림자처럼 움직였고 성문의 병사들까지 포섭해두었다. 물론 성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벽을 타고 오르는 그들을 못본 척 하는 것 까지는 충분했다. 성 안으로 숨어들자 남자가 말했다.
“미리 말해두자면, 저희도 이건 꽤나 도박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요. 듄벨가를 적으로 돌리고서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 이 일이 끝나면 저희 길드는 장소를 옮겨야 할 겁니다.”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움직인거 같은데.”
“아마티코는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의 계획이 끝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해도 내일이면 문제를 깨달을 겁니다.”
“말하고자 하는 게 뭐지…?”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당신이 도망나오지 못하고 잡힌다면 저희는 망한다는 이야기죠.”
“그 얘기는.”
“네, 맞습니다. 인장, 이리 주시지요. 여기까지 와서는 저희도 배신 할 수 없으니, 당신도 불만은 없겠지요?”
남자의 긴 얘기는 다 이걸 위해서였나. 쯔르레이는 말없이 인장을 넘겼다. 아쉽지만 이제 와서 미련 가져봐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확실히남자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여기서 일이 끝날 때까지 인장을 주지 못한다고 뻗대봐야 나오는 것은 배신 뿐일 것이다. 어차피 한 배를 탔으니 돌이킬 수 없다.
남자는 인장을 품에 넣고 다시 쯔르레이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가는 길에 다른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얼마나 포섭을 잘해놓은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본래라면 마주쳐야 할 순찰을 하는 병사들도 없었다.
에리히가 있는 서쪽 별관까지 도착해서야 쯔르레이와 남자는 다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별관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은 어쩐지 상태가 멍해보였다. 반쯤 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정신을 못차리는 것도 같았다.
“최면향초입니다. 메이드들을 몇 명 포섭해서 그들이 맡게 해두었죠.”
“그럼 어떻게?”
“제가 주의를 끌면 기사 한 명이 이쪽으로 올겁니다. 곧 제 고양이가 문제를 일으키면 나머지 한 명도 이리로 올 테니 그때 진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미리 말했듯이. 빠져나올 때 저희는 당신을 지켜줄 수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까지 데려가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이해하셨겠죠?”
“알았다.”
쯔르레이가 대답하자 곧 이어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들이 숨어있던 곳 옆의 풀 숲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덧붙였다. ‘고양이고양이 주문입니다.’
“무슨 소리지?”
“갖다 와보지. 기다리게나.”
일은 계획대로 흘러기사 한 명이 정말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그 틈을 타서 기척을 숨기고 다른 기사 한 명이 지키고 있는 서쪽 별관의 옆으로 숨어들어갔다. 기사는 확실히 상태가 향초로 인해 안좋은 것인지 쯔르레이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곧 고양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나면서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아마 크게 할퀴어진 모양이겠지.
곧 다른 한 명의 기사도 무슨 일인가 하고 잠깐 움직였다. 그때가 틈이었다. 쯔르레이가 별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쯔르레이는 곧장 별관에 있는 에리히의 방을 찾아들어갔다. 노크를 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다행히 문은 열려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엎드려 누워있는 에리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쯔르레이가 에리히를 깨우기위해 천천히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바깥에 소리가 들리면 안되니 최대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에리히를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에리히… 에리히… 일어나라.”
곧 정신을 차린 에리히가 멍하니, 쯔르레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못볼 것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벨투리안…씨?”
더는 쓰지 못할 그 이름을 에리히가 불렀다. 쯔르레이는 대답했다.
“더는 그 이름을 쓰지 못하지만. 그래, 나다.”
“이건 꿈인가요?”
에리히는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인 건지, 아니면 뭔가를 부정하고 싶은 건지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쯔르레이가 다시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꿈이 아니다. 일어나라. 도망갈 시간이다.”
“도망?”
“그래, 이 곳에서 탈출한다.”
“아뇨, 저는 나가지 않습니다.”
“뭐?”
에리히가 쯔르레이의 손을 팍하고 쳐내었다. 그리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쯔르레이에게 말했다.
“무슨 낯짝으로, 제 앞에 기어들어오셨습니까?”
쯔르레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에리히의 얼굴에서 보이는 그것은, 차가운 증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