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쯔르레이는 갈등했다. 알고 있었다. 이걸 내보이는 것이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고, 어리석지 않다 하더라도 신의를 버리는 일이라는 걸.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깊은 유혹에 시달렸다. 어차피 베르헬트는 이미 과거를 놓지 않았던가. 잘생각해보면 베르헬트와 그렇게 큰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그와 친구였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동료였던가? 같이 다니긴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와 자신의 관계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가 하잘 것 없이 내뱉은 헛소리에 잠시 구해졌다고 느꼈을 때가 있었다. 그 정도 뿐인 사이였다. 그런 부탁에 얽매일 정도의 사이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베르헬트는 빙룡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고 그것이 더 이상 베르헬트라고 불러야 할 존재인지 쯔르레이는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베르헬트가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은 실로 유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레히의 유언을 들어주자고 베르헬트의 유언을 포기하는게 맞는 일일까?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평했으면서 쯔르레이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가치 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시점에서 그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쯔르레이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빙룡은 자신의 어미였다. 과연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어미라고 말할 수 있냐 하면 쯔르레이는 대답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간에 한때 그것은 자신의 어미였다. 그리고 그 베르헬트를 노예로 만든 것은 빙룡이었다. 그 두가지일 사이에서 인과의 관계 같은 것은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어떤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아레히는 자신의 원수였다. 그러나 친구였고, 더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위해 죽었고, 그 죽음은 개죽음이었다. 그가 목숨을 바쳐 구해낸 류나벨트는 결국 죽었고 자신은 아무도 구하지 못한 채 모든 걸 망쳐버렸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말, 별 거 아닌 사과를 에리히에게 전해달라는 말.
사실 좀 더 많은 말을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좀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에게 그걸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결국 미안하다는 말 하나 밖에 전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거라도 전해줘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쯔르레이는 과연둘 중에 누구의 얘기를 따라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둘 사이의 우위를 정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남자는 고민하고 갈등하는 쯔르레이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가방에서 무슨 물건을 찾아내고 그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거 보면 무언가 갖고는 있나보다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그렇게 참을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만한 상품을 눈 앞에 두고서 조급함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저 소녀가 자신을 팔든 안팔든, 남자는 이미 쯔르레이를 상품으로 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녀의 선택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실력도 있고 무언가 특별한 검도 갖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혼자였다.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아마 불타르 세너맨 그 작자는 이걸 막으려고 할 생각이겠지만 그가 도둑 길드에 혼자서 대항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쯔르레이가 물건을 드러낸 순간, 남자의 눈빛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건….”
“베르헬트 가문의 인장이다.”
“….”
남자가 말을 삼켰다. 그리고 소녀의 손 위에 올려진 인장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자신이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자가 뒤에 손짓했다. 그러자 숨어있던 한 사람이 나타나 쯔르레이의 앞으로 다가섰다.
쯔르레이는 이미 알고 있던 인기척이기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경계했다.
“잠시 살펴볼 수 있을까요?”
남자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확연히 아까와는 달라진 반응이었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거절했다. 그대로 갖고 도망친다면 쯔르레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일 저희가 그런 걸 원한다면, 굳이 그렇게 속여먹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요.”
남자의 말에 쯔르레이는 오히려 더욱 경계했지만 그 말 자체는 틀릴 것이 없었다. 결국 쯔르레이는 앞에 다가온 사람에게 인장을 넘겨주었다.
다가온 사람은 인장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살펴보는 시간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그 사람이 말했다.
“진품입니다.”
“확실한가?”
“예.”
다행히도 그들은 쯔르레이에게 곧바로 인장을 돌려주었다. 쯔르레이는 인장을 품에 넣었다. 쯔르레이는 선택한 것이다. 아레히와 베르헬트 중에, 아레히를.
만약 인장이 없다고 하더라도 베르헬트의 딸인 마이카 베르헬트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에리히를 구하러 가지 않는다면 에리히는 죽는다. 그 사실이 쯔르레이의 선택을 결정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헬트 가문의 인장을 내놓은 것이다. 베르헬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사과를 받을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는 충실한 빙룡의 노예가 되었으니까.
남자는 잠시 생각한 후 곧바로 쯔르레이에게 말했다.
“의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바로 인장을 건네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인장을 주는 것은, 모든 의뢰가 끝난 후이다.”
“그렇게 하시죠. 사전 공작이 필요하니 이틀 뒤에 일을 진행하도록 하죠. 그 동안 지내실 곳은 있으십니까?”
“없다.”
“그럼 저희 쪽에서 안내해주도록 하죠. 불타르, 그와 함께 지내시면 될 겁니다.”
거주 까지 편의를 봐준다는 얘기까지는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불타르를 언급함에 따라 생각이 바뀌었다. 혼자 있었다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위험한 제안이었지만 불타르가 있다면 그나마 안심이었다. 어차피 혼자서 바깥에 적당한 곳을 찾아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걸 도둑 길드가 찾지 못할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다시금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까 인장을 살핀 이가 나타났다.
“안내해드리죠.”
쯔르레이는 그를 따라갔다.
~
쯔르레이가 방에서 나가고 문이 닫히자 숨어있던 다른 이가 나타났다. 그가 남자에게 말했다.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숨어있던 요원들을 전부 감지했더군요. 바깥에서부터 확인했습니다.”
“보통내기는 아니란 건가. 확실히 겉보기로 판단할 수는 없군.”
남자가 작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아직 어리다. 덕분에 좋은 걸 얻었군.”
“의뢰는 정말로 수행하실 생각입니까?”
“도둑은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아. 원래대로라면 인장도 훔치고 노예로 팔아버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
“그렇다면…?”
“하지만 베르헬트 가문의 인장을, 어떻게 저런 아이가 갖고 있는 것일지 조금 생각해본다면….”
“북벽의 기사의 행방불명이 저 아이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라곤으로 연통을 넣을 준비를 해라. 도착지는 베르헬트, 베르헬트 가문의 마이카 베르헬트다.”
남자가 명령을 내리자 곧바로 다른 남자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남자는 혼자 남아서 천천히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더 비싼 냄새가 난다.”
~
쯔르레이가 안내된 방은 특별히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깔끔한 방이었다. 평범한 여관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방에 붙어있는 침대에는 불타르 세너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타르는 쯔르레이를 보자마자 얼굴을 굳히고는 말했다.
“제길, 어떻게 간부를 구워삶은거지? 당신이 의뢰비를 감당할 여력이 있을 리가 없는데. 설마… 몸이라도 팔겠다고 한 건 아니겠지?”
“…아니다. 신경꺼라.”
“신경을 어떻게 끌 수가 있어. 내가 도둑놈이라지만 도둑들은 믿을 게 못된다고. 지금이라도 마음 돌리고 이 도시를 떠나.”
“이미 의뢰를 받아들였으니, 그들도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걸 원치 않을테지.”
쯔르레이의 지적은 옳았다. 쯔르레이를 자신의 관리 속에 집어넣은 시점에서 그건 확실했다. 이제와서 쯔르레이가 의뢰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인장만큼은 확실히 받아가겠지.
“젠장, 확실히 미리 말해두겠는데. 이번에는 저번 같은 요행은 없을 거다. 내가 구하러 가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거란 얘기야. 기억해둬.”
쯔르레이는 조금 미소를 지었다. 얼마만에 짓는 미소인지 잘모르겠다. 불타르의 말은 자신을 구하지 않을 거란 얘기였지만 그의 말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잘생각해보면 그와도 꽤 변변치 않은 인연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이었다.
그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자신을 믿지 않겠지. 그저 가는 길 따라 우연히 만나 서로를 도왔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겐 배신 당할 염려도 없었다. 그것이 편한 관계였다. 그는 자신을 포기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않았는가. 만약 자신을 구하러 온다고 했다면 또 한 번의 배신을 당했을 뿐이겠지. 쯔르레이는 그가 편했다.
“어린이들의 친구라더니?”
“댁은 뒤숭숭한 아저씨잖소.”
쯔르레이의 농담에 불타르가 정색했다. 간만이었다.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쯔르레이가 조금 소리내어 웃었다.
“웃지마! 제길, 도둑질하고 나서 그대로 떠나버렸어야 했는데.”
“그래도 결국 나와 다시 만난 걸 보면 이것도 인연인가 보군.”
“여동생 생각난다고 도와주는게 아니었어. 아이고.”
“확실히 그 여동생보다는 내가 더 예쁠거 같은데 말이야.”
“웃기는 소리 하지마쇼. 그 속에 담긴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니까.”
“하하하!”
쯔르레이가 호쾌하게 웃었다. 마치 생하울라와 같이 농담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꽤나 유쾌한 이야기였다. 앞에 있는 상대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