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솜뭉치가 웅웅대는 소리가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쯔르레이의 귓속으로만 들리는 것이었다. 솜뭉치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지금의 쯔르레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시끄럽게 울어대는 솜뭉치가 쯔르레이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만큼은 다행이었다. 순간 패닉에 휩싸일 뻔한 쯔르레이가 거기서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시선을 끌고 기사들에게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골목으로 숨어들은 쯔르레이는 쿵쿵뛰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숨을 가로쉬었다. 그리고는 솜뭉치를 꺼내 뽑아들었다.
“네가… 말한 거냐?”
우습게 보일 것을 알면서도 쯔르레이가 솜뭉치에게 말을 걸었다. 분명 이 검은 자신에게 말을 걸었었다. 아니, 그때 분명, 감옥에서 이 검을 잡지 않았을 때 미친 듯이 떠들지 않았던가. 검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였으나 쯔르레이는 그 자신보다 더 우스운 이야기는 없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이 솜뭉치는 아무런 말도 돌려주지 않았다. 사물에게 말을 거는 모양새가 정말로 어린애가 되어버린 것 같아 쯔르레이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솜뭉치를 집어넣자 검으로 쏠렸던 생각이 다시금 아레히의 수급으로 이어졌다. 쯔르레이는 알고 있었다. 저걸 가지러 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자신이 아레히의 목을 되찾으러 간다면 결국 잡혀서 또다시 감옥에 갇힐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고민을 계속했다. 자신이 그를 마지막까지 친구라고 생각했는지 이제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저런 모습으로 놔두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쯔르레이는 방심하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끼는 순간 곧바로 기척을 숨겼다. 이런 골목길에서는 숨는 곳이 여의치 않았기에 마냥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상대방은 쯔르레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정말이냐? 그 꼬마가 갖고 있는 검이 그 야만인이 쓰던 검이랑 같다고?”
“아니, 뭐 나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비슷하게 생긴거 같다고.”
“착각 아니야? 그런 무지막지한 검은 어린애가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나도 확인해보자고 온 거 아니야. 꼬마는 어디 간거지.”
대화의 내용을 들은 쯔르레이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졌다. 병사들에게 덜미가 잡힌 건가. 솜뭉치와의 연결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잡으려고 들 줄은 몰랐다. 다행히 병사들은 금방 사라졌지만 쯔르레이의 마음은 덕분에 심란한 상태였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경고다.
그래, 아레히의 목을 되찾는 건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이미 한번 버린 쯔르레이였다. 두 번이라고 못버릴 것은 없는 것이다. 속이 답답했지만 참았다. 참아야 했다. 어차피 아레히에게는 에리히가 있었다. 에리히가 살아있다면… 살아있다면 그를 구해내겠지. 그렇게 믿어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에리히는… 잡혀있지 않은가.
분명 아마티코, 자신의 손가락을 부러뜨린 그가 에리히를 죽인다고 했다. 자신이 이대로 떠난다면,에리히는 죽는건가? 아레히에 이어 그 아들마저도?
마틴의 반응을 보면, 에리히의 구출은 실패한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실패의 책임에는 자신이 결코 빠져있지 않겠지.
양심! 쯔르레이의 가슴을 그것이 독하게 찔러들어왔다. 아레히가 말하지 않았던가. 에리히에게 자신의 마지막 말을 전해달라고. 별 것 없는 짧은 내용의 유언이었다. 그저 미안하다는 사과를 담은.
그러나 그것을 전해주지 못하는게 쯔르레이의 가슴팍을 강하게 찌르고 있었다.
그 하잘 것 없는 작은 말 한마디 때문에!
아레히여, 저주 받아라. 너는 결국 나를 끝까지 붙잡고 가는 구나.
쯔르레이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마틴이 있는 술집이었다.
~
아레히가 죽고 벨투리안이 류나벨트와 도망친 날의 며칠 전, 알바디엔 듄벨은 이미 수도로 올라가 있었다. 말로는 황제 폐하에게 전달할 서신을 보내기 위해 잠시 보내버린 것이었지만, 실상은 류나벨트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쫓겨난 것이었다.
아마도 당분간은 본가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겠지. 적어도 최소 류나벨트의 죽음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그러나 알바디엔 듄벨은 류나벨트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라며 주장해봤지만 미친 놈 취급만 받을 뿐이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음모에 의해 류나벨트가 희생된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알바디엔은 무력했다. 결국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며칠 뒤 면 류나벨트의 처형이 진행될 것이다. 자신은 그걸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왕궁에 도착한 알바디엔은 듄벨 가의 적자가 왔다고 알리고 황제 폐하에게 보낼 서신을 전달했다. 직접 알현이라도 할 수 있으면 류나벨트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무지렁이에게 그런 혜택 같은 건 이뤄지지 않았다. 들개들은왕궁의 가장 유명하고 강한 기사단이지만, 황제 폐하의 직속이 아닌 것에서 그렇게 이쁨 받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모든 일을 끝내고 한숨을 내쉬며 왕궁 밖으로 나선 알바디엔은 곧 검은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영애 한 명을 목격했다. 이국적인 외모의 영애는 초록색 눈을 갖고 있었고 그 눈은 마치 류나벨트처럼 느껴졌다.
알바디엔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영애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꽤나 유쾌한 말뽄새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영애분. 혹시 이 무지렁이 촌놈에게 그대의 아름다운 이름을 알려주실 영광을 하사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 멋진 신사분이시네요. 제 이름은,”
휘리엘 울펜슈타인이라고 합니다.
휘리엘이 곱게 웃었다. 알바디엔도 마주 웃었다. 휘리엘은 느끼지 못했으나, 그 웃음은 어쩐지 만들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둘은 통성명을 한 뒤 금방 헤어졌다. 그러나 휘리엘이 쓰러진 것은 알바디엔과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곧 출장을 가 있는 엘핀을 향해서 급보가 보내졌다.
~
쯔르레이가 술집으로 다시 돌아가자 예상했던 대로 좋은 반응이 돌아오진 않았다. 저게 왜 다시 돌아왔나 싶은 그런 반응들과 함께 마틴이 쯔르레이를 보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우리가 너를 다시 도와줄 일은 없다고 했을텐데.”
차가운 반응에 쯔르레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염치가 없는 일이란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말하기도 전부터 이런 반응이라면 솔직히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쯔르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한가지 부탁이 있다.”
마틴은 자존심 강한 이 소녀가 고개를숙이는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그렇다고 상기한 이야기를 바꾸지는 않았다.
“이제와서 고개를 숙여봐야 우리의 선택은 변하지않는다. 돌아가.”
“에리히를 구하고 싶다. 힘을 빌려다오.”
그러나 확실히 에리히의 이름은 다른 것인지, 마틴의 반응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더 안좋은 방향으로. 마틴은 조금 뻔뻔하게 느껴질 만한 쯔르레이의 말에 예의 바른 인상을 완전히 버리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에리히를 구하고 싶다.”
“하, 이제와서 위선이라도 떨 생각이냐? 그 아이는 너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어! 에리히를 구한다고? 너 때문에 우리 용병단 대부분이 이미 잡혀들어갔는데!”
자신에 대한 비난이라면 조용히 들어줄 생각이었던 쯔르레이였다. 그러나 마틴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고는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 용병단이 잡혀들어갔다고?
“그 말은, 무슨 소리지? 용병단이 잡혀들어갔다는 건 아마티코가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건가?”
“…그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들었다.”
“어째서 죽이지 않은거지?”
쯔르레이는 의문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미 열이 오른 마틴에게는 그런 말도 그다지 좋게 들리지 않았다. 마틴이 화를 내며 꼬투리를 잡았다.
“지금 우리 용병단이 죽어야 했다고 말하는거냐?”
“아니, 아레히가 말한대로 에리히에게 누명을 씌워 죽일 생각이라면 아마티코 듄벨 입장에서는 그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그들이 살아있단 건, 그들이 인질이라는 뜻이다. 에리히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거지.”
“원하는 게 있다고? 대체 무엇을?”
“나는, 모른다. 그런 걸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너를 도와줄 생각은 없어. 아니, 도와줄 수도 없다. 용병단은 이미 사실상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고 널 도와줄 방법 같은 것은 없어. 얌전히 포기하고 길을 떠나는게 좋을 거다. 적어도 아레히씨는 널 아꼈으니까 마지막으로 주는 충고다.”
그 말에 쯔르레이도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마틴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들도 이미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백퍼센트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 소재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터벅터벅 술집에서 나와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쯔르레이는 골목길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며 조심스레 움직이는 그 얼굴은 이제는 잊어버리면 섭할 그런 얼굴, 불타르 세너맨이었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넘겼을 쯔르레이는 조용히 불타르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어째서일까, 그저 무언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불타르는 곧골목길의 한 허름한 상점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