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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130/162)


  • 〈 130화 〉잃어버린 사자의 걸음걸이

    구슬피 우는 풀벌레 소리들을 뒤로 하며 쯔르레이는 류나벨트의 집을 떠났다.

    일어났을 때, 벨투리안의 모습이 아닌, 쯔르레이로 변해있던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더는 당황할 일도 아니었다.

    분명 솜뭉치로 자신을 찌르고 벨투리안으로 돌아온 것이 며칠전의 일이었다.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 정확히 파악은 못했지만, 분명 솜뭉치로 자신 안의 용을 죽인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런데 다시 이 모습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그 죽음은 완벽하지 않았거나 한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그렇게 쉽게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을거라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에 벨투리안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지금은 애초에 그런거에 마음을 쓸만한 여유가 없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계속 류나벨트의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곳에 계속 있는 것도 괴로웠고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추격자가 따라붙었을지도 몰랐다. 추격자들이 온다면 필시 이 곳이겠지.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류나벨트가 죽었으니 그녀와 함께 도망 생활을 다니려던 계획도 끝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가야 겠지. 쯔르레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필요한 길인지 더는 확신할 수 없었다.


    쯔르레이는 우선 옷을 찾아 입었다. 원래의 짐은 모두 벨루나에서 용병들에게 맡겨놨었기 때문에 당장 입을 옷이 없었다. 다행히도 류나벨트가 사줬었던 원피스 같은 옷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헐벗을 걱정은 없었다. 천상 여자아이 같은 이 모습이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류나벨트가 남겨준 옷이라는 생각에 차마 벗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이런 모습으로는 여행은 둘째치고 다니는데 의심을 받기 좋은 모습일거다. 쯔르레이는 집을 뒤져서 류나벨트의 것으로 추정되는 로브를 뒤집어썼다. 크기가 큰 만큼 후드로 쓰기도 쓸만해보였다.

    쯔르레이가 로브를 뒤집어쓰고 로브에 손을 묻어 냄새를 맡았다. 물론 류나벨트의 향취 같은 것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괜시리 울적해진 쯔르레이는 손을 털어냈다.


    옷을 챙겨입은 쯔르레이는 류나벨트의 집을 뒤로 하고 나섰다. 전에 몰래 류나벨트의 집을 떠났을 때와는 전혀 달랐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류나벨트를 뒤로 한다는 것은 같았다.

    미안해요, 류나.

    잘있어요.

    쯔르레이는 자기 자신에게 슬픔을 되새길 시간 조차 주지 않은 채 길을 떠났다.


    때로는 슬픔을 고뇌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가슴을 달래는데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

    쯔르레이의 첫 목적지는 다시 벨루나가 되었다. 용병단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없었으나 자신의 모든 짐이 그곳에 있었다. 한때는 포기하기로 생각도 했었지만 이런 상황이 된 이상 다시 되찾으러가는 것이 맞았다.


    무엇보다 거기엔 생하울라의 편지와 베르헬트의 인장이 있었다. 지금은 의미가 바랬을지도 모르는 물건들이었으나 버리고 싶지 않았다.


    울적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물리적인 발걸음은 가벼웠다. 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무게가 없는 검인 솜뭉치 하나만을 들고 가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쯔르레이는 먼저 강가를 향해 달렸다. 지금 당장 벨투리안으로 돌아갔을 때 입을  있는 옷이 들개들의 갑옷 밖에 없다보니 피로 젖은 게 상당히 불편했다. 어차피 벨루나로 돌아갔을 때는 입을 수 없겠지만  때까지는  간수해두는 게 좋았다.

    강가에는 금방 도착했다. 류나벨트의 집 자체가 원래 강가에 가까이 위치해있다보니 그런 것이었다. 갑옷을 씻기려고 류나벨트의 집에서 가져온 가방에서 꺼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강가에 비치는 자신을 보고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대체 이 위화감의 정체는 뭘까 하고 얼굴을 둘러보던 쯔르레이는 곧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금…색?”

    눈이, 금색이었다. 쯔르레이의 눈동자가 이전의 산호빛 붉은 색에서 선명한 금색으로 변해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눈이 금색으로 변한거지?  모습 같은 것에 애착 같은 것은 없었지만 갑작스런 변화가 마냥 마땅치는 않았다. 또 자신의 몸에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결코 반가운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당장 어떻게 문제의 원인을 알아낼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 색이 바뀐 것이 무슨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으니 쯔르레이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쯔르레이는 이런 자잘한 일을 신경쓰기에는 너무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쯔르레이는 갑옷을 마저 씻겼다. 가죽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갑옷은 영 잘닦이지 않았지만 쯔르레이는 대충 넘겼다. 어차피 계속 입을 옷도 아니었고 피가 좀 남아있다고 못입을 옷도 아니었다.

    그리고 쯔르레이는 얼굴을 내밀어 강물을 마셨다. 물은 시원하고 맛있었다.

    다시 갈 길을 떠나는 쯔르레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더는 서두를 이유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격자들이 뒤를 쫓을지도 몰랐지만 그들은 시간을 생각해보면 아직 류나벨트의 집을 찾고 있을 테니 길은 이미 엇갈려 있었다.


    천천히 움직였음에도 결국 밤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쯔르레이는 슬슬 벨투리안으로 돌아올  대비하여 옷을 벗고 기다렸다.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하여 귀를 귀울였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벨투리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벨루나에 도착할 때까지도 쯔르레이는 벨투리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처음에는 며칠 정도 늦어지나 생각했다. 그런 적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벨루나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쯔르레이가 벨투리안으로 돌아오지 않자 쯔르레이는 결국 이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어이 나는 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건가? 도저히 이런 상황에 대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변한 거라고는 오직 자신의 눈동자 색깔 뿐이었다.

    깊게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었고, 달거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큰 피로에 젖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가질 않는다.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는 쯔르레이에게 있어서  고통이었다. 계속해서 쯔르레이와 벨투리안의 모습을 오간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다잡을  있었다.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계속해서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있었다면 어느 순간 이 모습에 굴복했을 지도 몰랐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은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니었기에 저항할 수 있었다.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그 희망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쯔르레이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자신을 잃은 것이 고통스러운 만큼 편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언제 벨투리안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계속 이 모습으로 있는다면, 매일 모습이 바뀐다는 점에서 생기는 그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거니까.

    과거 왕궁에서 휘리엘과 엘핀의 신세를 졌을 때도 그랬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편안함에 익숙해질까봐 모습이 변하자마자 도망갔다. 그러나 이제는 더는 도망칠  없었다.


    이 굴레, 이 운명을 대체 어떻게 벗겨내야 하는가.

    ~


    쯔르레이의 마음 속은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도시 바깥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통행증도 뭣도 없었기에 적법한 절차로 벨루나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쯔르레이에게는 무기가 하나 있었다.


    쯔르레이는 벨루나로 들어가는 문으로 다가가  앞을 지키는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후드는 이미 벗은 상태였다. 가기 전에 흙으로 얼굴을 더럽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기….”


    “꼬마…? 무슨 일이냐?”


    “숲에서… 길을 잃어버렸어요. 들여보내주세요.”

    물론 이 정도로 들여보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단다. 내가 도와줄 수는 없겠구나.”

    “숲에서 아빠를 잃어버렸어요. 아빠가 잠시만 기다리면 온댔는데 오지 않았어요.”


    쯔르레이의 거짓말에 병사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누가 봐도 아빠가 아이를 버리고 갔다고 생각될만한 대사였다. 실제로 벨투리안은 도망간게 맞을지도 몰랐다. 더는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보거라. 혹시 도시에 아는 사람이 있니?”


    “…있어요. 마틴…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그 사람과는 무슨 관계니?”


    “아빠 친구의 친구라고 들었어요.”


    “그 사람이 어디있는지 알겠니?”


    쯔르레이는 마틴이 있었던 술집의 위치를 병사에게 불러주었다. 병사는 성문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다른 병사 한 명을 대동하고 나왔다.


    “꼬마야, 이리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렴. 그 사람을 한번 불러올 테니,  신원을 확인시켜줄  있나 보자.”

    “감사합니다….”

    쯔르레이는 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병사들이 쉬는 숙소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신원 보증이 안되더라도 어떻게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병사가 생각하는  방법은 아마도 고아원의 것이겠지만 그는 쯔르레이를 배려하려는 건지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따. 물론 쯔르레이는 고아원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 검은 뭐니?”

    “장난감이에요.”


    쯔르레이가 검을 건네줘보았다. 병사는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고 날도 서있지 않는 검은 색의 솜뭉치를  살펴보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신기한 장난감이구나.”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려받은 솜뭉치를 소중하게 껴안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의 것이라 병사는 의심할 것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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