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들개들의 진혼가
벨투리안은 밤새 달렸다. 미친 듯이 달렸다. 류나벨트를 업고 한 순간도 채 쉬지 않은 채 달려나갔다. 그러나 벨투리안의 체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한 사람을 업은 채로전혀 쉬지도 않은 채 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날이 새고 아침해가 떠오를 때 즈음에 벨투리안은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하아… 하악….”
결국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더 달렸다가는 심장이 터질 지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더 달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대고 손이 떨리고 발은 후들거려 감각이 없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갑작스레 튀어나와 도와주었던 용의 힘 같은 것은 나올 여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류나벨트는 벨투리안이 노파의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 이미 정신을 잃은 채였다. 류나벨트를 잠시 나무 밑둥에 내려놓은 벨투리안이 숨을 골랐다.
일찍이 류나벨트의 집에서 나와 홀로 벨루나로 갔을 때에는 약 나흘치의 시간이 걸렸었다. 벨투리안은 초인적인 체력으로 밤새 달려 그 반을 주파했다. 그런 벨투리안에게 더 달리지 못하겠느냐고 소리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를 몰아붙이는 이는 오직 벨투리안 그 자신 혼자 뿐이었다. 속으로 더 달리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구한 류나벨트인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제발, 제발. 벨투리안은 기도했다. 그 누군지도 모를 존재에게.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이어도 좋았다. 아니면 용이어도 좋았다. 누구든 류나벨트를 살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 이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좋으니 제발, 이 불행한 운명에, 저주받을 삶에 내린 한 줄기의 단비이외다. 부디 내게서 더는 뺏어가지 말아주오.
그러나 늘 그랬듯 벨투리안의 기도에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적어도 벨투리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여기는….”
숨을 고르는 벨투리안에게 작고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담고 있었고 그 신음 소리가 벨투리안의 가슴을 찔러 그 고개를 들게 하였다.
“괜찮습니까? 지금 당신의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제 집….”
“그래요, 당신의 집입니다. 당신의 작은 채소밭이 있고 밤에는 달빛이 어우러지는 집입니다. 당신을 치료해줄 수 있는 류나의 집입니다.”
“어떻게… 알고 있나요…?”
류나벨트가 말을 묻자 벨투리안은 답이 곤궁해졌다. 자신이 쯔르레이라는 걸 들키는 것 정도야 더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걸 제 입으로 말하는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인거다. 되도록이면 언제까지나 숨기고 싶었다. 그래도 류나벨트가 이런 상황이라면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벨투리안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류나벨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됐어요. 말해주지 않아도… 좋아요.”
“….”
“당신은 비밀이 많은 신사분이군요….”
“언젠가… 말해주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살아있으십시오.”
“후훗… 그럴 수 있으면… 분명 좋겠네요.”
류나벨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벨투리안이 류나벨트의 머리에 손을 갖다대었다. 그러자 작은 미열이 느껴졌다.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걸까. 벨투리안은 급하게 일어나려했으나 아직 다 회복되지 못한 체력이 그의 다리를 붙잡아 무너트렸다.
“크윽.”
“괜찮아요… 열이 아니에요. 멈춰요. 좀 쉬었다 가요.”
“그럴 수는….”
“밤새 달리셨잖아요. 조금 쉬어도 좋아요.”
“하지만…!”
“미안해요, 사실 제가 조금… 더 쉬고 싶어서 그래요. 이해해줄 수 있나요?”
류나벨트가 그렇게 까지 나오자 벨투리안도 더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아니, 상황은 분명 고집이라도 부려야 할 상황이었지만 결국 그것도 벨투리안의 체력이 회복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류나벨트 역시 그를 알고 배려한 것이리라.
벨투리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무에 몸을 기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물렀다. 그런다고 한계까지 몰아붙인 몸이 곧바로 회복 될리도 없었으나 가만히 앉아서 마냥 기다리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나비가… 날아다니네요. 아름답네요.
그 시간을 달래주는 것은 류나벨트의 고른 숨소리와 함께 퍼지는 작은 목소리였다. 듣기만 해도 그 괴로움이 느껴지는 힘든 목소리로 류나벨트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엘프인 류나벨트라서 그런 일일까, 풀벌레 소리가 주변에서 아름답게 울려퍼지고 나비가 류나벨트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벨투리안은 말하지 말고 쉬라고 말렸지만 류나벨트는 요지부동이었다. 벨투리안은 저 나비들이 어쩐지 못내 불안하였다.
“벨투리안씨는… 몇 살이신가요…?”
“…서른을 좀 넘겼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후훗… 어린애…네요.”
류나벨트가 미소지었다. 그 사라질 듯 연한 미소에 벨투리안의 가슴이 쿵쿵하고 울렸다. 아무래도 아직 피로가 덜 풀린 게 분명했다.
“벨투리안씨는… 말이 적네요….”
“대화는… 익숙치 않습니다.”
“그거 아쉽네요…. 대화란 건 참 즐거운 일인데….”
“저는 그다지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쉬십시오.”
“후후…. 저는 즐거워요. 조금이라도 어울려주지 않겠어요?”
그러겠습니다. 제가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류나. 그러나 벨투리안은 퉁명스럽게 고개만 끄덕일 뿐 그 간절한 대답을 입에 올리진 않았다. 사실 조금이라도 류나벨트의 상태가 악화되지 않게 더는 말하지 않길 바랬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조금이나마 생기를 띄는 류나벨트의 모습에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류나벨트가 다시금 미소를 짓자 벨투리안의 가슴이 또 쿵쿵 뛰기 시작했다.
“벨투리안씨는 좋아하는 게 있나요?”
당신입니다.
“없…습니다.”
“그럴리가요. 좀 더 생각해봐요. 좋아하는 음식이라던가, 취미라던가.”
“…단 걸 좋아합니다.”
“하하, 의외네요. 그런 험상궂은 외모로 그런 말을 하니까, 어울리지 않네요. 그래도 좋아요. 저도 단 걸 좋아, 해요. 과자를 좋아하시나요?”
“좋아… 하는 것 같습니다.”
벨투리안의 목소리는 조금 작았다. 자신을 험상궂은 외모라고 하는 것에 조금 시무룩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대답이 오히려 류나벨트의 마음에 들은 걸까 그녀가 다시금 웃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좋아하는 것, 같은 대답이 어디 있어요, 푸훗.”
“….”
그러고보면 류나벨트가 과자를 사온 적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과자에 손이 가던 자신을 막아서던 류나벨트의 모습이 지금의 류나벨트의 모습과 겹쳤다. 그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양새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나는 아름다웠다.
류나벨트는 벨투리안의 많은 것이 궁금한 듯 했다. 여러 가지 물어본 것이 많았다. 어디서 왔느냐, 무슨 일 때문에 여행을 다니느냐,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냐. 대부분 대답할 수 없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벨투리안은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어 적당히 둘러대기보단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류나벨트가 그를 동정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류나벨트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벨투리안이 입을 닫으면 조용히 기다렸다 다시 다른 이야기를 꺼낼 뿐이었다. 그때마다 가냘프게 미소짓는 류나벨트에게 벨투리안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물론 벨투리안 그 자신은 알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대화할 이야기가 다 떨어질 때 즈음, 류나벨트가 더 조용한 목소리로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보며 말했다.
“…엘프가 죽을 때가 되면, 풀벌레들이 마지막 가는 노래를 불러준다고 하는데… 직접 듣는 건 처음이네요. 이 나비들은 저를 마중나온 걸까요?”
그 소리에 벨투리안은 곧바로 솜뭉치를 크게 나무에 휘둘렀다. 풀벌레들이 날아가고 사라져 당연히 노랫소리는 끊기고 주위를 맴돌던 나비들도 날아갔다. 류나벨트는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 그런 류나벨트를 보며 벨투리안은 단언했다.
“되었군요, 이제. 그런 노래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네요.”
류나벨트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우는 것도 같았다. 벨투리안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제… 다시 출발해야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럴 시간도 주지 않았다. 벨투리안은 아직 피로하다 느꼈지만 못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전처럼 전력질주를 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다시 달려야 할 시간이었다. 벨투리안이 류나벨트를 업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참아주십시오.”
“물론이에요.”
기분 탓일까, 류나벨트의 목소리는 좀 더 힘겹게 들렸다. 그 얼굴은 뒤에 있어 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갑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이후 하루의 시간이지나서였다. 들개들의 기사들, 그리고 그들의 마법사 올리안 살람이 류나벨트와 벨투리안이 앉아 있던 나무 밑둥에서 흔적을 조사하고 있었다.
“여기 머무른 게 맞나?”
“그런거 같군요. 확실히 사람 둘이 머물다 간 흔적이 있어요.”
“나무에 칼자국이 있군…. 무슨 표시지?”
“글쎄, 야만인의 생각 같은 걸 어찌 알겠어요? 아무튼 핏자국을 보면 얼마 안남은 게 분명합니다.”
“엘프는… 이미 죽었거나, 죽기 직전인 상황일 것이다. 그렇겠지?”
“살람, 혹시 그 엘프가 독을 해독했을 가능성은 없나? 흑마법사인데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그러자 살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럴리는 없을 겁니다. 흑마법사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니까요. 그들은 남을 저주하거나 썩은 시체를 일으키는 건 잘해도 누군가를 치료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극독을 한 둘도 아니고 여러 개를 주입해두었습니다. 엘프의 강력한 자연 치유력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 제한일겁니다. 만약에….”
“만약?”
“마법의 종주인 용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해독을 불가능할 겁니다. 단언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