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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화 〉들개들의 진혼가 (126/162)


  • 〈 126화 〉들개들의 진혼가

    벨투리안과 류나벨트는 순조롭게 숲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마냥 좋지 못했다. 언제 추적이 따라붙을지 알  없었기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둘은 계속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어서야 둘은 나무 밑둥을 둥지 삼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작게 불을 피운 벨투리안이 류나벨트를 향해 다가갔다. 류나벨트는 순간 움찔했지만 곧 그가 해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가만히 있었다. 그 반응에 벨투리안은 과거의 활기찬 류나가 떠올라 가슴이 쓰렸다.

    벨투리안은 말없이 류나벨트의 구속구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밧줄로 묶인 부분은 벨투리안이 풀어낼 수 있었지만 사슬로 묶인 팔 다리는 어떻게 끊어낼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솜뭉치로 끊어내기엔 류나벨트가 위험했다. 결국 사슬 부분만 솜뭉치로 끊어내고 구속구 자체는 그대로 팔다리에 남은 상황이 되었다.

    “미안합니다. 이건 풀 수가 없겠군요.”

    “아뇨, 구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에요…. 늦었지만 인사할게요, 류나벨트라고 합니다. 구해줘서 감사합니다.”

    “…나는 벨투리안… 이라고 합니다.”

    벨투리안은 사실 지금 강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그녀에게 자신이 쯔르레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처럼 류나에게 다시 안기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대체 류나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텐가. 이런 모습이면서 자신을 속이고 있었냐고 반응할 것이 두려웠다. 두려워 벨투리안은 입을닫았다.

    “벨투리안, 암사자의 이름이군요. 아름답네요.”

    류나는 역시나 박식했다. 바로 그의 이름의 뜻을 알아맞췄으니.

    “잘아시는군요.”

    “이래뵈도 책은 꽤 많이 읽었답니다. 후후, 지금은 자랑할 것도 못되지만요.”

    류나벨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웃음에 벨투리안은 가슴이 아파왔다. 그 자조적 웃음 때문일까, 둘의 대화는 그 뒤로 한참이고 이어지지 않았다. 사실 서로 그렇게 즐겁게 수다를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둘 사이의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류나벨트였다.

    “저를 왜… 구해주셨나요?”

    어떻게 대답해야할까요, 류나벨트.

    “…당신이 결백한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친구가 죽는 걸 봤어요. 단순히 제가 결백하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를 죽게 하면서 까지 저를 구하는게 맞나요?”

    “사정이 있습니다. 더는… 묻지 말아주시길.”

    류나벨트의 의문은 타당했다. 그러나 벨투리안에게는 결코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결국 벨투리안은 이야기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류나벨트의 입으로 듣는 아레히의 죽음은 생각보다  쓰고 차갑게 다가왔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훑는 것만 같았다. 류나벨트는 조금 침묵하더니 벨투리안을 보고 사과했다.

    “미안해요. 당신도 친구를 잃었죠. 제가 너무 무신경했네요. 구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신경쓰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아, 나의 류나.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당신이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벨투리안은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채 집어삼켰다. 그녀는 나의 류나가 아니었으니까.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류나벨트는 나무에 기대어 잠들었고 벨투리안은 그런 그녀를 계속 보고 있었다. 오늘은 자지 않을 생각이었다. 언제 그 모습으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오늘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그게 다행이었다.

    벨투리안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아레히가 죽었다. 가슴이 시릴 것 같았다. 분명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에 가슴이 막막했다. 에리히에게 말해달라는 그 이야기도 조금 생각해보았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  말이 자신에게  것이라도 되는 것 마냥 느껴졌다.

    미안하다, 아레히. 그 말은 전해주지 못할 것 같다.

    자신은 이제부터 긴 도피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류나벨트를 데리고 가려면 더 힘들어지겠지. 언제 정체를 들킬지도 몰랐고 언제 추적에 따라잡힐 지도   없었다. 아마 에리히를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그러나….

    숨을 고르던 벨투리안이 잠든 류나벨트를 보았다. 그 순간 벨투리안은 당황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류나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류나벨트?”

    그리고 곧, 류나벨트가 피를 토했다.

     순간 처형식장에서 아마티코 듄벨이 다른 기사들과 함께 류나벨트와 벨투리안이 도망친 흔적을 보고 있었다.

    기사가 말했고 아마티코가 답했다.

    “쫓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아니, 물론 잡아야겠지. 그 야만인까지. 하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슬슬 약효가 돌 시간이니까.”

    ~

    시간대를 돌려   날, 올리안 살람이 쯔르레이를 치료하고 엘핀 세이피어스와 만난 후, 살람 그는 그대로 기사단장 아마티코 듄벨에게 가서 엘핀의 반응을 전부 보고했다. 아마티코는 뭔가 집히는 게 있다는 듯 생각에 잠겼는데, 살람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인물은 아니었다.

    “뭔가 집히시는게 있으신가보네요, 단장님?”

    “자네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그것보다 혹시, 자네 쓸만한 독이 있는가?”

    “독…이라고요?”

    “그래, 그 엘프에게 먹일 것이다.”

    “어차피 죽을 년에게 굳이 왜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흑마법사이다. 이미 외통수를 치긴 했지만, 혹시라도 모르는 일이다. 내일 처형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할 수가 필요해.”

    아마티코의 생각은 일견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과연 아마티코의 이 선택은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독이었다. 강력한 독이 류나벨트의 몸을 삼키고 있었다. 벨투리안이 어쩔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류나벨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토혈이 흘러내려 그 옷을 적셨다. 벨투리안은 어째서 류나벨트가 갑자기 피를 흘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독 때문이라고 바로 판단하기에는 벨투리안의 경험이 지나치게 일천하였다.

    “피…?”

    잠에서 깨어난 류나벨트가 피 범벅이 된 옷을 보며 중얼거렸다. 류나벨트의 얼굴은 명백하게도 창백했고  상태는 결코 좋아보인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류나벨트는 상황파악이 안된건지,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만! 일어나지 마요! 누워있어요.”

    “어, 어라…  이러죠. 몸이… 몸이 안 움직여요.”

    “움직이지 마요. 기다려봐요 내가 사람을… 아니 약을… 빌어먹을! 어떻게, 어떻게 해야하지?”

    약은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치료해줄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조금  이동하면 마을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도망친 흑마법사 딱지가 붙은 엘프를 그 어떤 이가 치료해준단 말인가? 치료의 가불가 여부를 떠나서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놔두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벨투리안은 류나벨트를 등에 업었다. 뺏어입은 기사의 갑옷이 피로 적셔졌다. 벨투리안은 류나벨트를 데리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결코 편한 길은 아니었기에 류나벨트가 흔들리면서 계속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걸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쿵쿵거리는 가슴이 두려워 그저 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벨투리안은 마을에 도착했다. 전에는 지나치고 갔었던 마을이었다. 등 뒤의 류나벨트는 다시 정신을 잃은지 오래였다. 벨투리안은 류나벨트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으나 의사가 필요하단 것만은  수 있었다. 벨투리안은 곧바로 아무 집이나 두들겨서 사람을 불렀다.

    “이 밤에 무슨 일이야?!”

    “의사!! 의사가 필요하오! 의사의 집은 어디있지?”

    벨투리안의 두들김에 밤잠을 깨고 일어난 남자는 기사 차림의 벨투리안을 보고당황한 듯 외쳤다.

    “의, 의사? 이런 작은 마을에 의사가 있을 리가 없…!”

    “의사가 아니라면 그 비슷한 사람이라도 괜찮다!”

    “저, 저쪽 마을 어귀에 있는 집에 약초꾼 할매가 있소.”

    남자는 벨투리안의 박력에 밀린 듯 그대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벨투리안은 그 말을 듣고 남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곧바로 뛰쳐나갔다. 남자는 야밤의 방문자 때문에 정신을 살짝 놓은  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저 등에 사람… 귀가?”

    벨투리안은 남자가 가리킨 곳에 있는 집 앞에서 무작정 문을 두들겼다.

    “환자! 환자가 있소! 문 좀 열어주시오!”

    그러자  문이 열리고 고집 세보이는 인상의 노파가 튀어나왔다.

    “이 밤에 무슨 난리…!”

    “부탁합니다! 환자가 있습니다! 상태를  봐주세요!”

    “…들어와.”

    다행히도 노파는 별  않고 벨투리안과 류나벨트를 들여보내줬다. 그러나 문제라면 그 이후에 있었다.

    “에, 엘프라고?”

    노파는 류나벨트를 보더니 안색이  질렸다. 그렇다. 이곳은 바로 벨루나의 옆 마을이었다. 흑마법사 엘프의 처형식 소식이 안들어올리도 없었다. 류나벨트의 팔다리에 남아있는 족쇄가 변명조차 막고 있었다.

    “다, 당장 나가! 내 집에서 당장…!”

    벨투리안은 상황 판단이 빨랐다. 곧바로 노파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솜뭉치를 겨누고 말했다.

    “이 여자를 살려내시오.”

    “히익…!”

    노파는 벨투리안의 서슬 퍼런  끝에 결국 억지로 류나벨트를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류나벨트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노파는 아무리 류나벨트를 살펴봐도 자세한 걸 수 없었다.

    그저 간신히 이 상태가 결코 평범한 독이 아니란 것만을 알아낼  있었다.

    “나, 나는 못고쳐. 나 같은 심마니가 다룰 수 있는 독 같은  아니라우.”

    “살려내라고 했을 텐데…!”

    벨투리안이 다시금 솜뭉치를 들어올렸다. 자신도 이게 억지인 것은 안다. 이게 독이라면, 분명 듄벨에서 먹인거겠지. 설사 흑마법사가 도망치더라도 확실히 처리할 수 있게. 그렇다면 이런 약초꾼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독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벨투리안은 할 수 있는게 억지 부리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 벨투리안을 막은 것은 다름아닌 류나벨트였다.

    “그…만하세요. 벨투리안씨.”

    “류나벨트! 정신이 듭니까?!”

    “그만해요… 이 독… 알  같으니까. 이 분이… 치료할 수… 없을 거에요.”

    “그렇다면 다른 마을이라도 돌아가서…!”

    “아뇨, 제 집… 제 집이라면… 치료가 가능 할지도… 몰라요….”

    류나벨트는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벨투리안은 치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 곧바로 다시 류나벨트를 업은 벨투리안이 집 밖으로 나섰다. 잠깐의 주저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류나벨트에게서 집의 위치를 듣기도 전이건만, 그런건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와서 자신의 정체를 들키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류나벨트를 구하는 것이었다.

    워낙 그 시간이 짧아서 벨투리안은  수 없었지만, 남자와 노파가 경비대에 신고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 또한 경비대에게 들어갔다는 것은, 적어도 이 시점에서 벨투리안에게 생각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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