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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화 〉들개들의 진혼가 (124/162)



〈 124화 〉들개들의 진혼가

그때 엘핀 세이피어스는 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왕국의 수도로.

재회한 쯔르레이를 지키는 것과 흑마법사의 처형을 확인하는 일마저 제쳐놓을 정도로 급한, 그런 일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세이피어스님! 울펜슈타인 영애의 상태가 급속도로 안좋아졌다고 합니다!’

 한마디에 엘핀은 자리를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쯔르레이. 그러나 나는 그녀의 기사이다. 엘핀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기사 둘 만을 남겨두고 말에 올라탔다. 돌아가야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지금 휘리엘의 상태가 안좋아진단 말인가? 분명 휘리오비치는 물리쳤을 터인데. 흑마법사가 남겨둔 그 모든 저주가 풀린 것은 이미 제놈 그라시아가 직접 확인한 바였다.

순간 엘핀의 머릿속에서는 쯔르레이가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휘리오비치는 두명이다. 그 녀석은 아직 죽지 않았다. 설마….

깊은 고민을 하며 엘핀이 말을 찼다. 더더욱 빠르게 속도를 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떠나간 엘핀을 뒤로 하고 남은 두 명의 기사가  쯔르레이의 감옥으로 들어갔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때 서쪽 별관에서는 전투가 이뤄지고 있었다.

“결국 이 정도인가, 아레히가 없으면.”

“크윽… 지랄하지마라, 아마티코….”

하지만 그건 제대로  전투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건 이미 시작부터 진 싸움이었으니까. 당연하지만 용병단은 소수 인원이었다. 소년  명을 구하는 데 그렇게 많은 인원을 데리고 올 생각은 없었고, 실제로도 불가능했으니까. 설사 계획이 흘러나갔더라도 상대가 기사단의 대부분을 동원할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만약 이 곳에 아레히가 있었더라면, 아레히가 있었더라면 확실히 이야기가 조금 달랐을지도 몰랐겠다. 그러나 아레히는 약속을 지킨다고  엘프를 구하러 갔다. 젠장. 제리코가 중얼거렸다. 멍청한 자식.

이런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용병단 모두의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자식을 구하는데 있어 목숨을 아낄 아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보장해주지.”

“예!”

아마티코가 아까의 분노를 지운 채 태평하게 말했다. 제리코는 분해서 이를 악물었으나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망치는 길 마저 전부 막혀 있었다. 항복해야 하는건가?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 적어도 목숨을 부지할  있다면 후사를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언제 에리히를 잃을지 알 수 없었다.

그 때였다.

“잠시만,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별관에서 에리히가 튀어나와 외쳤다.

“에리히!”

“제리코 아저씨! 실비아 누나!”

기세 좋게 튀어나온 에리히는 곧장 아마티코에게 달려왔다. 그 폼새에 공격하려는 의사는 없어보였으나 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리히를 붙잡아 눕혀버렸다. 아마티코가 붙잡힌 에리히를 슬쩍 바라보더니 기사들을 향해 물었다.

“분명 묶어두라고 했을텐데, 어떻게 된거지?”

“그런 밧줄 정도는 나 혼자서도 풀  있습니다. 용병의 자식을 우습게 보지 마시죠.”

“과연, 아레히의 아들이란 건가. 하지만 그래서 그렇게 밧줄을 풀고 뭘 어쩌려는거지? 적어도 몰래 도망이라도 갔으면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 지금 이렇게 튀어나와서 네가 뭘 할 수 있지?”

“…나는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하려고 왔습니다.”

에리히의 당돌한 말에 아마티코는 코웃음을 쳤다.

“거래? 거래라는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을 때에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걸 구걸, 애원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그러나 이 제안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제 제안을 받아들이냐에 있죠.”

“흠….”

아마티코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적어도 호부견자는 아니라는 건가. 평소라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아마티코는 생각 외로 꽤나 고민했다. 붙잡힌 채로 말하는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의 누이와 같았기 때문일까.

“들어나보지.”

결국 아마티코는 변덕을 부렸다. 여전히 용병단이 포위를 당하고 있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로 무언가 길이 열릴지도 모르겠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백작 자리겠죠.”

그 순간 곧바로 에리히를 잡고 있던 기사의 칼이 에리히의 목을 향했다. 하지만 에리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계속해서 아마티코를 바라보았다.

“되었다. 치워라.”

기사는칼을 치웠다. 에리히는 내심 겁에 질렸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마티코는 눈치채지 못한건지, 아니면 못본 척하는 건지  수 없었지만 말을 꺼내지 않았다.

“너는 운이 좋다고 생각해라. 네가 내 누이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바로 죽었을 테니까.”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군요. 어차피 저는 죽일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알바디엔 듄벨을 죽이고 그 죄를 저에게 뒤집어 씌울거란 계획을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러자 아마티코는 예상 외의 반응을 보였다. 정말로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에리히는 그게 거짓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은거지? 설마 지금 네가 생각해낸 망상이라고들 얘기했다가는  목이 성치 못할 것이다.”

“…알바디엔 듄벨. 제가 잡힌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직접 얘기해줬습니다.”

그러자 아마티코는 정말로 우습다는 듯,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제서야 에리히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 이거 우스운 이야기로군. 네 놈은 정말 그 말을 믿은거냐?”

“…뭐라고요?”

“제리코, 묻도록 하지.  계획이라는 소리, 너희도 알고 있었나?”

“…그렇다. 안그러면 우리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쳐들어왔겠냐?”

“너희는어떻게 계획에 대해 알게 되었지?”

“…마찬가지로 알바디엔 듄벨이다. 그 애송이가 직접 와서 얘기했어.”

“하, 이거 참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당황한 제리코가 입을 크게 열었다.

“뭐가 말도 안된다는 거지? 네 계획이 들켰다는게 성이라도 나나?”

“너는 언제 이 얘기를 들었지? 알바디엔이 직접 찾아왔나?”

“…그래. 직접 찾아왔다. 에리히가 잡히고 난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정말 그런 허접한 계획 같은 걸 믿는거냐?.”

“뭐?”

“허접하다고 했다. 그런 계획 같은 건, 내가 에리히를 잡아온 걸  성에서 용인하고 있는시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정말 깨닫지 못하는거냐?”

“…분명 흑마법사의 처형식을 빌미로 일을 진행한다고.”

“아니, 잘생각해봐라. 알바디엔  녀석이 애초에  계획을 알고 있었다면 형님에게 말하는 걸로 간단하게 그런 계획 같은  파훼할 수 있을 거다. 애초에  계획은 알바디엔이 모른다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지만 알바디엔이 알고 있다면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티코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용병단들은 어쩐지 그런 걸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군. 네 놈을 잡은 것은 분명 따로 쓸 일이 있어서가 맞다. 하지만 네 녀석이 살고 있는 마을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 알바디엔이라고 내가 얘기했던가?”

에리히는 물론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먼저 너희를 찾고 있던 것은 나였지. 정확히는 녀석이 아니라 녀석과 함께 다니던 기사가 정보를 찾아왔다. 그러나 이 모든 정보의 출처가 모두 알바디엔이라는 건 꽤나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안그러나?”

“그럼 네 놈은 에리히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단 것이냐?!”

“글쎄, 이용할 생각은 분명히 있었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러나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제리코가 소리쳤다.

“어째서 우리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여 죽음을 자초시킨단 말이냐?! 알바디엔이? 어째서? 무엇이냐?”

“그건 나도 알  없지.”

“젠장! 그럴 순 없어!”

“포박해라, 다들.”

나머지 싸움은 꽤나 싱겁게 끝났다. 이미 용병들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전의를 상실했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수가 많이 차이나는 상황이었다. 더 싸워봤자 개죽음이었으니 순순히 잡히는 것이 차라리 이득이었다. 에리히를 죽이지 않는다고 하는 점에서 이미 싸울 이유도 어느정도 사라진 상태였다.

에리히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그런 에리히에게 아마티코가

“네 계획은 어떤 거였지?”

“제 계획은 아무 의미도 없었군요.”

“아니, 궁금하군. 말해봐라. 네가 원래 생각했던 얘기는 뭐였지?”

“당신이 백작이 될 수 있게 돕는단 얘기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당신의 계획을 따라준다고 하려고 했죠.”

“겨우 그 정도로 저들 모두의 목숨을 구하려고 한 건가?”

“내가 자백하는 것만으로도 당신 계획은 훨씬 쉽게 진행될 있을테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군.  계획이 사실이었다면 말이야.”

허탈한 에리히는

“…알바디엔 씨를 불러주십시오. 그에게 사실을 확인해야겠습니다.”

“그건 나도 하고 싶지만, 그 녀석은 지금 이곳에 없다. 며칠 전에 수도로 보내버렸지.”

그러나 아마티코의 머릿속에는 이미 하나의 의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알바디엔, 그 녀석.

분명 그 엘프와 계속 교류하고 있었댔지.

아마티코는 그대로 에리히를 다시금 별관 안쪽으로 보내버렸다. 어쨌든 상황은 예상 외로 평화적으로 끝났고 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그가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한 기사가 멀리서 달려왔다.기사가 입은 옷은 들개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검은 늑대의 것. 엘핀 세이피어스의 휘하였다.

“듄벨 경, 이곳에 계셨군요.”

“무슨 일이지? 세이피어스 경께 무슨 일이라도?”

“세이피어스 경께서는 급한 일이 생겨 수도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남았습니다. 그런데 엘핀 경이 길을 떠난 사이, 감옥에 잡아두었던 꼬마가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고?”

“그리고 경의 기사 한 명이 어떤 야만인에게 습격을 받고 옷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꼬마는 사라지고 갑자기 야만인에게 습격을 받는다고? 잠깐 엘핀 경이 지금 수도로 돌아갔다고? 아마티코는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을 표했다.

“이봐, 엘핀 경에게 급한 소식이란 것은 아마 울펜슈타인 영애의 이야기겠지?”

“대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궁금한게 하나 있군. 그 소식을 전해준 건 누구였지?”

“…검은 머리에 회색 눈을  키가 작은 들개들의 기사였습니다. 그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알바디엔.”

분명했다. 그는 알바디엔의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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