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3화 〉들개들의 진혼가 (123/162)


  • 〈 123화 〉들개들의 진혼가

    들개 기사의 갑옷을 대충 차려입은 벨투리안은  한 자루만을 가진 채 달려나갔다. 류나벨트를 구해야겠다는 일념만큼은 그대로였지만 다시 벨투리안으로 돌아와서일까, 고통스럽게 자신을 갉아먹던 자괴감은 줄어있었다.


    그래, 적어도  모습이라면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일은 없으리라.

    단순히 모습만 바뀌어서라고 보기에는 힘든 상쾌함이 벨투리안을 감싸고 있었다. 늦지 않는다면 가능하다. 류나벨트를 구할 수 있다. 부디 아레히가 제 역할을 다했기를 빌었다.

    별관에서 바깥쪽으로 빠지는 와중에 멀리서 전투의 소리가 들려왔다. 서쪽이었다. 분명 에리히가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에리히를 구하러 간 이들의 소리일 것이었다. 지금 만약 자신이 저곳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잠깐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만두었다. 에리히를 구하는 것보다는 류나벨트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백작가의 성을 나와 가로에 도착한 벨투리안은 멀리보이는 처형식장을 향해 달렸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벨투리안의 발목을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 구석에 기대어 누워있는 이가 벨투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어이. 이봐…. 의사를 불러줘.”


    그건 들개들의 기사였다. 복부에 거대한 화살이 꽂힌 채 쓰러진 기사가 벨투리안을 보며 애원했다. 아마도 벨투리안을 다른 기사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착각을 정정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없는 벨투리안은 그대로 그를 놓고 가려했지만 그의 말 한 마디가 벨투리안을 붙잡았다.


    “사, 상대는  명…. 이다. 의사, 의사를 불러줘.”

    아니, 붙잡은 것이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 기사를 버린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모든 진상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것만큼은 알아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본능적으로 벨투리안은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깨달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분명 자기 자신의 탓이겠지. 자신 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자책할 시간 따위가 아니었다.


    처형식장에 도착하자 온 몸에 피칠갑을  아레히와 그와 대치하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레히의 얼굴은 이미 피곤과 고통에 찌들었고 그의 발 아래에는 부서진 가면이 뒹굴고 있었다.


    “아레히 오바드!!!”


    벨투리안이 외쳤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곧장 기사들에게 돌진하였다. 뒤에서 갑작스런 기습에 휘말린 기사들은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고 뒤로 물러섰으나 벨투리안의 솜뭉치는 본디 무게가 없는 검이었다. 그 무게가 없는 빠른 속도에 한 명의 기사가 그대로 부딪혔다. 적에게 닿는 그 순간 돌아온 거대한 무게가 그대로 그 기사의 팔을 망가트렸다.

    “끄아악!”


    벨투리안의 검술은 적을 파괴하기에 가장 안성맞춤이었다. 그저 적에게 닿는 순간  무게를 되돌리면 중력이 곧 적을 무너트리기 때문이다.

    왼팔이 그대로 망가진 기사는 비명을 질렀지만 다른 한 쪽 팔로는 검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 메아리가 울리듯 그 검이 벨투리안을 향해 쫓아들어왔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지금 신기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가볍게 그 검을 피해낸 벨투리안이 그의 남은 한쪽  마저 부서버렸다.


    죽지는 않았으나, 다시는 기사가  수 없으리였다.


    이 모든 일은 단 한 순간에 일어났다. 다른 기사들 역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멍청이는 아니었기에 벨투리안을 쫓아들어왔으나  순간 아레히가 끼어들어 막아냈기에 벨투리안에게는 닿지 않았다.

    “…하…하….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 얼굴.”

    “…말하지마라. 피가 흐른다.”

    “내 피가 아니니까 괜찮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투르.


    순간 벨투리안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버린 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떨어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숨어있었나보다.

    벨투리안은 아레히가 미웠다. 한때의 우정은 분노로 변했고 그 시절의 쌓인 추억과 그리움은 증오로 치환되었다. 그렇게 10년이었다. 다시 만난 그는 훨씬 늙어있었고 자신이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리히를 보며 자신이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어색했다.

    그랬던 그는 지금 자신이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친구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은.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기사들과 대치했다.

    “…이봐, 그때 기억 나나?”


    “조용히해라. 싸우는 중이다.”


    “너는 그때도 그랬었지. 늑대 무리한테 둘러쌓였을 때, 나보고 조용히 하라고 했지.”

    기사들이 동시에 둘을 향해 달려들었다. 등을 맞대고 있는 둘은 더 이상 뒤로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벨투리안의 거대한 솜뭉치가 적을 튕겨냈다. 아레히의 검 역시 기사들의 검을 피해 적을 밀어냈다.


    “그때 잡은 늑대의 송곳니가 너와의 맹약의 증거가 되었다.”


    “맹약은….”


    “그래, 지켜지지 않았지.”

    “….”

    다시금  사람은 교전을 이어나갔다. 기사들은 강했다. 기습으로 한명을 처리한 것이 다행이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하기 불가능한 수준도 아니었다. 이미 수는 꽤 줄었고 그들 역시 아무리 공격해도 쓰러지지 않는 아레히의 모습에 기가 죽어있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오직 분노로 이성을 잃은 부단장 올틴 뿐이었다.


    “뭘 그리 속삭이는 거냐, 쓰레기들아!”


    그러나 이성을 잃었다고 해서 그가 바보처럼 돌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편했겠지만, 그는 전투에서만큼은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아레히는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미 망신창이인 상태였다. 수적 우세를 앞세워 공격한다면 아무리 아레히라 할지라도 막을  없을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들개들의 기사 갑옷을 입은 야만인만 아니었다면!


    “나 빼고는 전부  가짜 기사를 공격해라! 내가 아레히를 상대하겠다!”


    그 판단은 실로 정확했다. 아무리 솜뭉치라 할지라도 공격 자체가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벨투리안의 괴력을 목도하고는 최대한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 그를 포위했다. 반면 올틴은 혼자서 아레히를 마주했다.


    올틴과 아레히의 검이 마주쳤다. 그러나 명백히도 티가 나게 아레히의 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계가 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드디어 힘이 떨어졌나?”

    “네 놈 하나 잡고 갈 정도는 되는거 같은데… 멍청한 올틴.”

    아레히의 체력은 명백하게 떨어져있었다. 처음부터 일대일이었다면 문제 없이 상대할 이들이었으나 그 혼자 죽인 기사들의 수가 벌써 한 손이었다. 이미 지쳐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허세는 여전하구나!”


    아레히는 올틴의 맹공에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점점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결국 아레히는 순간 집중력을 잃고 뒤로 밀려났다.


    “크윽….”

    벨투리안은 아레히의 상황을 대충이나마 보고 있었으나 그를 신경써주기에는 자신 역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기사들은 벨투리안을 포위한  말려죽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공격해왔다. 결코 검을 맞대주지 않은 채 피하고 몰아넣기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한다면 시간은 벨투리안의 편이었다. 적들도 이미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고 벨투리안의 눈먼 공격에 한번이라도 제대로 스친다면 그대로 리타이어였다. 문제는  전에 아레히가 버텨줄 수 있을지였다.

    지루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아레히는 한쪽 팔에 검상을 입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시금 둘의 등이 맞대어졌고 그 순간 아레히는 직감했다.

    ‘나는 죽는다.’


    아레히가 입을 열었다. 뭐라 말을 꺼내려던 순간 그 입에서 쿨럭하고 피가 토해졌다.

    “쿡… 쿨럭, 허억… 허억….”


    “괜찮나.”

    “하, 당연히… 괜찮지 않지. 크큭.”


    “말을 아껴라.”

    “아니, 들어라 벨투리안.”


    “말을 아끼라고 했다!”

    “미안…하다.”


    “….”

    “10년을 기다리게 했다. 미안하다. 그  밖에 할 게 없다. 이미 그런 약속 따윈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어리석었지. 아니, 어리석은 것 조차 아니었다. 그런 약속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내가 미약했다.”


    “이제와서 뭘 어쩌라는거냐.”

    “그냥, 마지막으로 말해두고 싶었다. 혹시 에리히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 있나?”


    “…모른다.”


    “그래, 그럼 됐다…. 혹시라도 만약, 에리히를 만난다면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줬으면 좋겠다.”

    “뭐…? 너….”


    “뒤로 돌아라, 벨투리안!”

    순간 아레히가 앞으로 치고 나섰다. 그러자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아레히에게 쏠렸다. 아레히는 곧장 올틴을 향해 달려들었다. 올틴은 당연하지만 체력이 빠진 아레히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대로 검을 대고 맞섰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아레히는, 죽음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아레히는 올틴의 칼을 피하지 않았다.올틴의 칼이 아레히의 복부를 찌르고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아레히의 칼이 올틴의 목을 찔렀다.


    “뒤쪽에 엘프가 있다. 돌아서 가라, 벨투리안!”

    벨투리안은 아레히가 만들어준 잠깐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뒤쪽 방향에 서있는 기사가 올틴의 죽음에 경악하고 있는 사이에 솜뭉치를 휘둘러 그를 뭉개버렸고 그대로 뒤를 향해 달려나갔다. 드디어 류나벨트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다지도 가슴이 시리는 걸까.

    그때는 분명 그에게 목숨을 바쳐서라도 류나벨트를 구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자신은 무슨 결과를 바란 거였을까.


    “도망쳐라, 벨투리안! 살아라!”

    마지막으로 아레히가 외쳤다. 그는  와중에도 다른 기사들을 붙잡아놓고 있었다. 직후 곧 그의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기사들의 칼에 찔려 죽어가는 아레히를 뒤로 하고 벨투리안은 류나벨트를 향해 갔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뒤로 돌아 처형장의 뒤로 가자 묶여있는 채 방치된 류나벨트를 발견했다. 류나벨트의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고문의 상처 말고도 돌멩이에 얻어 맞아 생긴 상처들도 가득했다.


    “…누구?”

    “당신을 구하러왔습니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벨투리안은 류나벨트가 상황을 파악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대로 류나벨트를 한쪽 어깨에 안아들었다.

    “꺄앗.”


    “잠시만 참아주세요.”


    부단장 올틴의 죽음으로 주의를 끌어서 그런 걸까, 기사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들도 살짝 이성을 잃을 상황이었던 것이다. 체력 또한 떨어졌으니 벨투리안을 쫓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일 것이다. 도망치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다. 벨투리안이 그대로 마을의 바깥 쪽 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됐건간에 류나벨트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 된 것이다. 벨투리안이 쓴 가슴을 마음으로 부여잡았다. 그 눈에서 흐르는 것은 분명 눈물은 아닐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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