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0화 〉들개들의 진혼가 (120/162)



〈 120화 〉들개들의 진혼가


그리고 처형식의 날이 밝았다.

아레히 오바드가 천천히 무장을 하고 일어섰다. 이런 복장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용병 시절 입었던 무장이 아닌, 일족 시절에 쓰던 무장들. 철이 아닌 가죽으로 이루어진 옷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에 덮는 것은 일족의 가면.

과거 벨투리안, 쯔르레이가 왔을 때 직접 부수고 간 그 가면과 같은 것이었다. 그 안에 담긴 목소리는 일찍히 자신이 버렸던 형의 것. 이미 죽은 자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님이라.

그리고 아레히가 거대한 대궁을 들어올렸다. 용을 잡는다고 불리던 슈라헤의 대궁은 쯔르레이가 쓰던 작은 단궁과는   차이가 날 정도로 거대했다. 화살통 안에는 그만큼이나 거대한 화살들이 잔뜩, 아레히는 그것을 등에 매었다.

당연하지만 바보처럼 정면 돌파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아레히는 기척을 숨겼다. 본디 그는 일족의 전사였고 한때는 용병단의 대장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사람의 친구일 뿐이었다.

아레히 오바드가 처형식으로 향했다.

처형식의 장소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있었다. 당연하지만 흔치않은 처형식, 그것도 흑마법사, 심지어 엘프의 처형식이라는데 구경꾼이 안몰릴 수가 없었다.  와중에는 평소 류나벨트와 교류하던 마을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슬픔에 빠져서 조용히 처형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류나벨트님이 흑마법사라니…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백작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어머니,  조심하세요…. 흑마법사를 옹호하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저희도 위험해요.”

“아이고, 어쩌다 세상이 이리 됐단 말이냐… 너 어렸을 때 열병 걸린 걸 고쳐주신 것도 류나벨트님이었어. 우리 마을 모두가 류나벨트님의 은혜를 받고서 살았었는데….”

몇몇 마을 사람들은 눈에 보기에도 침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류나벨트는 수십 년간 그 숲에서 머무르면서 마을사람들을 도우고 지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타락한 엘프 흑마법사를 욕하고 있을 뿐이었다. 원색적인 욕설들도 가득했고 그들이 당한 일을 욕하고도 있었다.

“엘프가 흑마법사라니, 세상 말세가 다름없네….”

“분명  년이 전에 우리 농사를 망친걸거에요.”

“우리 아들이 병으로 죽은 것도 다 그 년 탓일거야!”

대부분은 근거없는 모략이었으나 상황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도 아직 처형식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직은 덜 흥분한 상태였다. 그나마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리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류나벨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류나벨트는  몸이 묶인 채로 기사들에게 끌려오고 있었다. 처형장의 중간에서는 류나벨트의 목을 칠 망나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류나벨트의 표정은 보기만 해도 겁에 질려있었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었다.

그 가련한 모습에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흑마법사고 뭐고  거짓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흑마법사라고 하기에 류나벨트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조용!”

들개들의 부단장 올틴이 앞으로 나서 군중들을 진정시켰다.  큰 목소리  방에 모두가 합죽이가 된 듯이 입을 닫았다. 기사가 잠시 기다린 후 모두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자 크게 입을 열어 소리쳤다.

“지금부터 타락한 엘프, 흑마법사 류나벨트의 처형을 진행한다!”

망나니가 칼에 물을 뿌렸다. 그것을 직접 바로 앞에서  류나벨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죄인 류나벨트는 들어라! 죄인은 영지의 숲 이남에 목적을 알 수 없는 포탈을 생성하였고, 그 포탈을 이용하여 흑마법 생명체를 도망시킨 죄! 그리고 영지의 농사를 망치고 가축들을 죽이는 역병을 뿌린 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죄로 흑마법사인 죄로 이곳에서 처형을 진행한다! 흑마법사인 죄는 대륙의 중죄로 종족을 가리지 않고변호할 자격을 받지 못한 채 사형으로 죄를 다스린다!”

“죽여라!”

“더러운 흑마법사년!”

“전에 우리 마을의 가축들이 죽은 것도  저 년 탓일거야!”

“저 흑마법사가 우리 농사도 망쳤어요!”

군중들도 분위기에 맞춰 류나벨트를 욕하기 시작했다. 류나벨트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듯 주변을 계속 둘러보았다. 류나벨트는 뭐라도 말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그녀의 입은 막혀 있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곧 류나벨트가 머리에서 강한 충격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류나벨트를 향해 날아온 것은 돌멩이였다. 그녀의 얼굴 한 구석에 돌멩이가 스쳐 피가 나기 시작했다. 돌멩이들은 계속 날아왔지만 올틴은 군중을 제지하지 않았다. 돌멩이 세례가 멈춘 것은 류나벨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올 때가 되어서였다.

“엘프 류나벨트가 흑마법사인 증거는 강대한 흑마법사 휘리오비치 세르미나카를 퇴치하신 두 분의 초월자, 볼타르의 기사 라로슈 데 르로망샤 경! 그리고  간티아의 기사 엘핀 세이피어스 경! 이 두   세이피어스 경께서 직접 듄벨 영지에 왕립하여 확인한 바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륙의 안위를 위협하는 흑마법사를 결코 왕국은 용납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듄벨 가는 흑마법사와의 전쟁에 결코 무엇도 아끼지 않음을 이곳에서 선언한다! 들개들에게 영광 있기를!”

그리고 동시에 군중들에게서 환호성도 울려퍼졌다. 왕국의 들개! 듄벨이여 영원하라! 흑마법사에게 죽음을! 그러나 류나벨트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눈물이 흘러나왔다.

류나벨트의 얼굴이 밑으로 떨어졌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돌이킬 수 없구나.

류나벨트는  곳에서 죽는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올틴이 손을 크게 들어올렸다 내렸다. 그리고 말했다.

“처형을 진행하라!”

망나니가 칼을 들어올렸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수다.”

처형을 집행하는 망나니는 흑마법사의 저주가 무섭기라도  것인지 괜한 말을 꺼내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흑마법사는 죽어서도 움직인다는 얘기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공포였다. 사실 이렇게 예쁜 여자를 처형하는 것도 그리 맘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일이었다.

망나니가 칼을 내리치려는 그 순간.

망나니의 목에 거대한 화살이 박혔다.

“무슨 일이냐?!”

“누구냐?!”

“꺄아아악!”

기사들은 곧바로 칼을 꺼내들었다. 방패를 꺼내 자신의 몸을 가리는 이들도 있었다. 군중들은 쓰러지는 망나니의 모습에 흑마법사의 저주가 내렸다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화살은 한 발로 끝나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대비시킨 활을 들고 있던병사들이 곧장 활을 꺼내들었으나 시위를 채 걸기도 전에 그들의 목에 거대한 화살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여섯 명의 병사들이 명을 달리했다. 처형장은 이미 아수라장으로 변해 다들 도망가고 있었다. 몇몇 간 큰 이들만이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사들이 화살이 날아온 곳을 찾아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에 이미  명의 기사와 세 명의 병사들이 추가로 화살을 맞았다. 갑옷조차 뚫고 들어오는 거대한 화살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처형을 주관하던 부단장 올틴만이 오직 자신에게로 날아들어온 화살을 피할  있었다.

화살이 날아온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적은 대놓고 자신을 찾으라는  조금 떨어진 건물 위에서 저격을 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어떻게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할  있었는지가 더 이상한 위치였다. 아레히 오바드의 가면이 그들의 얼굴에 드러왔다.

아레히는 혀를 챘다. 조금 더 수를 줄여두고 싶었는데 적의 속도가 생각보다 더 빨랐다. 과연 들개들,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망치면 저 엘프가 곧바로 죽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자신이 시선을 끌어야 했다.

아레히가 건물 위에서 뛰어내려 기사들과 대치했다. 뛰어내리기 직전 화살을 한발 그들 사이로 쏘았지만 기사들은 개의치 않고 돌진해왔다.  이상 활은 쓸모가 없었다. 땅바닥에 대궁을 버리고는 칼을 꺼내들었다.

“감히, 듄벨의 영지에서 난동을….”

“그 목숨만으로 갚을 수는 없을 거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꺼내는 젊은 기사들을 보며 아레히가 비웃었다.

“올틴이나 아마티코가 말도 안해줬나보군. 내가 누군지도 못알아보는 걸 보니.”

“부단장님과 아는 사이냐?”

“알 필요 없겠지.”

대화가 더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대로 두 사람의 기사와 아레히가 부딪혔다. 아레히는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검사였다. 양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가볍게 흘려내고는 기사 한 명의 손목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손이 잘리진 않았지만 다시는 검을 들 수 없을 것이었다.

“끄아악!”

다른  명의 기사는 그 장면을 보고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진했다. 그러나 냉정함을 잃은 순간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그대로 치고 들어오는 아레히의 공격에 그는 목을 내주고 말았다. 아레히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칼을 찔러넣었다. 젊은 기사는 그대로 절명했다.

“수준이 떨어진 건지, 애송이들을 보낸건지.”

하지만 잡담을  시간은 없었다. 곧장 아레히가 뒤를 돌아보자 들개들의 부단장 올틴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일곱의 기사가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아레히 오바드!!! 네 놈이 감히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오랜만이다, 올틴.”

올틴은 분노에 찬 얼굴로 노성을 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듄벨가의 금지옥엽 아나시아 듄벨을 도둑질해가고 그의 기사들을 무참히 죽인 아레히는 그야말로 악이었다. 하지만 그런 올틴의 모습을 보며 아레히는 반면 안심하고 있었다. 올틴의 분노 덕분에 그는 최소한의 기사들만을 냅두고 자신에게 몰려왔다. 적어도 당분간 류나벨트의 처형은 미뤄질 것이다.

물론 그건 자신이 얼마나 버틸  있냐에 따라 달린 것이지만.

아레히는 땅에 던져주었던 대궁을 다시 들어 화살을 쏘아보냈다. 물론 이렇게 대놓고 쏘는 화살이 기사들에게 맞을리는 없었지만 견제 정도는 되었다. 잠시 기사들이 멈칫한 사이에 아레히는 등을 돌려 도망쳤다. 정면돌파는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들을 따돌리며 류나벨트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사들의 수가 생각한 것보다  적은 것이었다. 아니, 다행이라고   없나. 이곳에 기사가 적다는 것은, 그만큼 용병단이 침입한 듄벨가의  쪽에  많은 기사들이 있을 거라는 얘기니까.

‘제발, 무사해라. 모두.’

아레히는 기도했다. 그러나 그 기도가 하늘에 닿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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