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9화 〉들개들의 진혼가 (119/162)


  • 〈 119화 〉들개들의 진혼가

    “결국 돌아오지 못했군.”

    “…그러게, 가지말라고 했는데….”

    아레히가 깊게 숨을 들이마쉬었다. 고나한 한숨의 전조였다. 결국 벨투리안, 아니 쯔르레이는 돌아오지 못했고 모든 계획은 어그러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보다는 쯔르레이의 안위였다.

    “어쩔 수 없어요. 처음 계획한대로 가죠. 아마 경계가 더욱 심해졌겠지만… 지금이 가장적기에요. 이번을 놓치면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군. 계획은 원래대로 진행한다.”

    “하지만 미리 말한대로에요. 그 엘프를 구하는 일은, 저희는 동참하지 않을거에요. 에리히, 그리고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꼬마까지가 한계, 흑마법사라고 공인된 엘프를 구하는 미친 짓은, 불가능이에요.”

    “그래… 그렇게얘기했지. 나도 알고 있으니 두 번 말할 것 없어.”

    실비아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쯔르레이에게 얘기한 바대로라면 분명 쯔르레이가 실패할 경우 그녀가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에 난입하여 그녀를 구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비아, 아니 용병들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쯔르레이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아레히는 실패한 것이다. 그들을 설득하는데.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아레히를 도와 에리히를 구하려고 한 것은 순전히 아레히와의 친분과 인맥 때문. 아무리 그들이라 할지라도 알지도 못하는 꼬마를 위해 처형이 확실한 흑마법사를 구하는 일 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다못해 에리히를 구하는 일은 대의명분이라도 있었지만 흑마법사를 구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관련된 이들은 전원 현상수배에 잡히면 반드시 처형일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 일을 거절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레히 역시 그걸 알았기에 더 강요할 수 없던 것이었다. 쯔르레이가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것은 결국 쯔르레이에 대한 또다른 배신과 같았다. 아레히는 또다시 약속을 지키지못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레히는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다. 쯔르레이에게 다시금 배신을 당하는 일을 겪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우리가 당신을 구하러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에리히는 우리들 자식이나 마찬가지니까 구해주는거라고요. 젠장, 지금이라도 마음 돌리는 게 어때요?”

    그거 완전 개죽음이라고요.

    하지만 아레히는 그저 힘없이 웃어보였다. 구할 가능성이 한없이 제로에 수렴하더라도, 그저 그 혼자만이 목숨을 잃고 끝날 뿐일지라도.

    “나는  친구를 더 배신할  없어.”

    그래서 아레히는 스스로 그 모든 걸 짊어지기로 했다. 아레히는 에리히를 구하러 가지 않는다. 아레히는… 류나벨트를 구하러 갈 것이다. 아레히가 자신의 칼을 꺼내 보았다. 검신으로 자신의 얼굴이 비췄다. 젠장, 언제 이렇게 늙은이가 되버린거지.

    그건 이제 곧 개죽음으로 향할 얼굴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처형식에 난입하는 것은 그 혼자다.

    아레히 오바드.

     맹약에 잠겨 죽어라.

    “얼마든지.”

    ~

    ‘혼동 마법인가, 아니면 정말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엘핀이 복잡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은 쯔르레이의 상태에 대한 것. 이런 곳에서 재회할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엘핀이었기에 여러모로 당황한 상태였지만 문제는 자신보다는 그 녀석에게 있었다.

    무엇보다 그 녀석이 말한 휘리오비치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것 또한 문제였다. 하지만 휘리오비치는 분명 확실하게 죽였다. 리치가 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심장을 끊었으니 부활할 가능성도 없었다. 하지만 휘리오비치가 둘이라고? 말도 안되는 얘기였지만 상대는 흑마법사니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러고보니 르로망샤가 그랬지.’

    ~

    “석연치 않군.”

    “무엇이?”

    “그 휘리오비치가 이렇게 쉽게 죽어준다는 것이.”

    “쉽게? 우리 둘 다 죽을 뻔 했는데도?”

    “그래, 쉽게다. 애초에 정면승부를 하는 것은 휘리오비치의 취향에 맞지 않아. 북벽의 기사 베르헬트가 그렇게 쫓아도 꼬리를 대주지 않던 놈이 우리가 찾는다고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다.”

    ~

    …이 얘기는 르로망샤에게 얘기해두도록 해야겠다. 확실히 휘리오비치가 하나의 몸을 더 준비하고 있었다면 쯔르레이의 말도 어느 정도 신뢰성이 생긴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쯔르레이의 상태가 그래서야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미 흑마법사인 자에게 마음이 푹 빠진 상태는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물론 류나벨트라고 하는 그 엘프와 직접 대화해본 적은 없으니 그녀 개인의 인성은 알  없지만 흑마법사라는 것만으로 그녀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엘프이다. 가장 흑마법과 뒤떨어진 종족인 그녀가 흑마법을 배웠다는 건 일반적인 인간이랑은 얘기가 다르다. 어지간히 끔찍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아닌 엘프임에도 즉결 처형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흑마법사는 종족 불문 처형이었다.

    쯔르레이는 분명 속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엘핀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했다.

    “이런 곳에서 또 뵙게 되는 군요.”

    “…듄벨 경.”

    “하하, 우연이네요. 어쩐지 다시  걷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들개 같은 놈.’

    엘핀이 속으로 생각했다. 당연히 그런 거짓말에는 속지 않았다. 분명 아까 자신이 당황한 채로 쯔르레이에게 달려간 걸  마법사놈이 보고한거겠지. 자신의 실책이었다.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신경쓰지 않는 척 해야했을텐데.

    “우연이 살짝 지나친거 같군요.”

    “그렇지만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요. 세이피어스 경께서는 어쩐 일로?”

    “…잠시 신경쓰이는 게 있어서….”

    “그렇군요. 그 별관 쪽에?”

    아마티코 듄벨은 돌려말하는 것 없이 곧바로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그래, 적어도 이런 점 만큼은 다른 귀족들보단 낫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게 끝이지만.

    “네, 잠시.”

    “그러고보면 살람, 아 저희 기사단의 마법사입니다. 아마 아시겠지만. 살람이 재밌는  얘기하더군요.”

    “….”

    “지금 감옥에 있는  아이가 금발이라고 하던데… 그러고보면 세이피어스 경의 여동생이라는, 아아, 미안합니다. 이런 얘기는 싫어하셨나요? 하긴 평민이 여동생이라는 것도 좀 우스운 이야기죠.”

    엘핀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떻게 되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좋은 표정은 아니란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마티코는 반대로 정말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 표정에 한 방 주먹을 때려넣고 싶다는 충동이 엘핀을 지배했지만 정말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재밌는 우연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감옥에 있는 그 아이와는 제대로 얘기를 나누셨는지?”

    “부디 신경쓰지 말아주시길.”

    엘핀은 말을 그렇게 남기고 아마티코 듄벨을 넘어갔다. 나름의 경고인 셈이었다. 적당히 하지 않으면 본인도 가만 있지 않겠다는. 아마티코 듄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다. 기분 나쁜 남자였다.

    어쩌면 좀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엘핀은. 아마티코 듄벨, 확실히 이 남자는 만만치가 않다.

    “참, 그러고보니  아이가 말하기를, 내일 감히 이 듄벨 가를 습격한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 아이가 잡힌다면 취소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뭐 글쎄요….   없는 이야기죠.”

    엘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가요, 부디 경계를 확실히 해주시길.”

    엘핀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아마티코도 이번만큼은 조금 의외인 듯, 엘핀을 살짝 흘겨보았다. 엘핀은 그저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나 속으로 엘핀은 분명 생각하고 있었다.

    ‘쯔르레이를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건가….’

    무슨 집단인지는, 듄벨 가의 상황과 관련된거 같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결코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이런 곳에 혼자 쯔르레이를 보낸 시점에서,  쯔르레이가 저런 상태인 시점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엘핀은 내일 동쪽 별관을 지키기로 마음 먹었다.

    반면 아마티코 듄벨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이피어스 경과는 관련이 없는 건가… 마주친 자체는 정말 우연이었나 보군.’

    “내일은 어느 쪽이든 확실히 경계해야겠군. 손가락 세 개를 버텨낸 건 대단하지만, 아직 어설프다고  수밖에 없겠군. 살람.”

    아마티코의 부름에 조용히 뒤에서 마법사 살람이 나왔다. 엘핀은 눈치챘으면서도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네, 단장님.”

    “내일, 양쪽 별관 쪽에 기사를 좀 더 배치하도록 해라. 처형식 쪽은 괜찮다.”

    “에, 처형식 쪽은 괜찮은겁니까?”

    “정신머리가 있다면 그쪽은 포기했다고 보는게 맞겠지. 오바드 놈이 주체인 이상, 엘프와는 무슨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아들 쪽을 선택할 것이니. 그 꼬마는 세이피어스 경과 협상하기위해서라도 잡아둬야 하고.”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부단장님에게 전해주도록 하겠습니다.”

    “서쪽 별관에는 내가 간다.”

    “네? 그 녀석을 지키려고요?”

    “아마 그 쪽이 제일 많이 올테고, 오바드가 직접 오겠지. 녀석까지 잡으면 계획은 완벽하다. 뭐 정말  꼬마의 말대로 계획을 미뤘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어설프지 않아.”

    확실히 아마티코의 판단은 정확했고, 상식적이었다. 엘프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맞다. 자신의 아들을 구하는  더욱 맞는얘기 아닌가? 그러니 이 판단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칠 거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이 판단은 많은 것을 바꾸진 못했지만,  하나의 운명을 조금 기울이는 것에 성공했다.

    결과에 큰 차이는 없을지도 몰랐으나, 그것은 분명한 변화였다.

    그리하여  남자는 전혀 다른 곳에서 각각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엘핀 세이피어스는 동쪽 별관, 쯔르레이를 지키기 위해서.

    아마티코 듄벨은 서쪽 별관, 에리히를 뺏기는 걸 막기 위해서.

    아레히 오바드는 처형식, 약속을 지켜 류나벨트를 구하기 위해서.

    이 세 남자의 엇갈림이 무슨 결과를 낼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

    그리고 처형식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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